꽤 한참을 나는 좀 특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제가 남들에 비해 좀 더 저 생각에 심취했을 순 있지만, 누구나 얼마간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곤 합니다. 담배를 피우면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어떻고 암은 어떻고 하지만, 흡연자 중 이 사실을 진심으로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면 ‘나’는 안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보통은 담배를 끊기보다는, 뉴스와 신문에 나오는 실험 결과를 끊습니다. (요즘은 담배 케이스에 실린 ‘혐오 경고 그림’을 끊는 것이 유행입니다)
실험을 통해 증명된 사실도 ‘나’라는 왜곡장 앞에서는 덧없이 스러집니다. 주식투자! 개인 투자자는 수익을 올리기 어렵다고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는 다르다. 내가 하면 다르다.”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흡연자의 대부분은 각자의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고, 주식 투자는 결국 5천만 원을 남깁니다. 1억을 투자했을 때. 매일 2천 명의 자영업자가 문을 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나는 다르다고 생각할까요? 왜 우리는 정육점이 망한 자리에 정육점을 차리고, 주식과 비트코인에 많은 돈을 투자할까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잠재워줍니다
이런 식입니다.
이번 학기 성적이 좀 안 나왔지만, 나는 (저 멍청이들에 비해) 머리가 좀 더 좋기 때문에 충분히 만회할 수 있어.
나는 살이 좀 덜 찌는 체질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운동은 좀 덜 하고 맛있는 고기는 좀 더 먹어도 돼.
나는 감, 운이 좋기 때문에, 주식 시장 분석을 조금 덜 해도 크게 먹을 수 있어.
이런 생각도 하죠.
(그럴 이유는 없지만) 왠지 그냥 수능 대박이 날 것 같다.
(그럴 이유는 딱히 없지만) 왠지 그냥 취업 원서 내자마자 붙을 것 같다.
실패는 그 자체로 매우 고통스럽기 때문에, 이를 되짚어보고 나아가는 것은 몹시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나는 다음엔 다를 것이라고,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이번 실패를 재빨리 잊기를 선호합니다. 이런 과정은 의식적으로 하기도 전에 무의식적으로, 반자동으로 처리됩니다.
행복 = (현실 / 기대)
문제는 앞선 일련의 자기합리화가 장기적으로는 더 큰 해악을 불러온다는 데 있습니다. 흔히 행복은 (현실 / 기대)라고 합니다. 행복의 값은 분자가 커질수록 커지고, 분모가 커질수록 작아집니다.
내가 특별하고 달리 낫다는 생각은 나에 대한 기대, 분모를 크게 조정합니다. 분모는 시간이 감에 따라 계속 커집니다. 특별한 경우에는 더 크게 증가하구요. (수능, 취업, 창업 등)
더 나아가서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은 분모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분자: 현실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왠지 잘 볼 것 같은 마음에 공부를 덜 합니다. 나는 사실 벡터를 잘 모르지만, 왠지 아는 문제가 나올 것 같고 그냥 지금 하기 싫으니 안 합니다. 100번은 본 집합을 다시 봅니다. 집합 문제를 또 풀고, 답을 맞춥니다. 생각합니다. “오케이 수학. 다 맞았어. 역시 나름 똑똑하구만.”
이 과정에서 현실은 잘해야 제자리, 오히려 퇴보합니다. 분자는 작아지고, 분모는 커집니다. 불행할 수밖에 없는 덫입니다.
불행×나는 특별하다= 더 큰 불행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제가 좀 특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니까요. 세상은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니까요. 이 때문에 저는 불행에 보너스로 비애감, 슬픔을 얹어서 곱빼기로 불행해야만 했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 원래 다들 보통은 힘든데, 몰랐습니다. 딱히 나라고 해서 안 힘들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왜 이렇게 성과가 안 나지?
→ 성과는 원래 내기 힘든 법인데, 몰랐습니다. 그냥 좀 더 열심히 하는 것 말곤 없는데.왜 나는 1등을 못 할까?
→ 제가 딱히 1등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공부도 딱히 열심히 한 것도 아니면서.왜 내가 서울대를 못 갔지?
→ 그냥 못 간 건데,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하니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대학 다니다 재수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남들보다 더 행복하고 더 뛰어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슬프지 않아야 할 이유도, 불행한 일을 겪으면 안 될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불행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외부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일 뿐이고, 이런 외부 사건은 미리 알고 예방하거나 피해가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큰 병에 걸리고, 갑작스레 사고가 나거나. 어느 날 집안이 크게 기울거나, 부모님이 이혼하시거나, 불행히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등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슬픈 일들을 겪고 있습니다.
제 말은 이런 일들이 어차피 남들도 다 겪는 것이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딱 그 사건의 임팩트만큼 슬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에게’, 왜 ‘나만’ 이라는 생각이 이 슬픔을 더 크게 증폭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왜! 나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세상은 나에게 아~무 억하심정도, 심지어 관심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일어난 일들은 그냥 일어난 일입니다. 곡성에서 황정민은 곽도원에게 말합니다. 낚시할 때 무엇이 낚일지 알고 하느냐고.
불행한 사건에 “왜 나여야만 하지?” 라고 묻는다면 이는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가 애초에 틀렸는데 답을 찾으면 나날이 고통스럽습니다. 주어진 불행에 능동적인 불행을 얹는 셈입니다.
이제 저는 제가 딱히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딱 옆자리 저 사람만큼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남을 깔볼 이유도, 옆 사람을 부러워할 이유도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주어진 만큼만 느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저는 좀 더 특별해지고 싶습니다. 다만 예전에는 ‘나의 특별함’이 당연한 명제, 어떤 천부의 권리처럼 느껴졌다면 이제는 제가 부단히 노력해도 얻기 굉장히 힘든 무엇임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마음이 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엉망인 글이지만, 무엇보다 과거 그리고 지금의 제 어리석음 때문에 폐 끼친 많은 분들께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원문: 김칼도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