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타임머신 방의 예시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먼 미래, 인류사상 첫 “타임머신 방”이 문을 연다. 타임머신을 이용해 고객을 과거의 역사 속 어디로든 보내주는 놀이시설이다. 물론 고객 안전과 역사 유지를 위해 고객과 과거 간 상호작용은 극히 제한되지만 고객은 과거의 사건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 소리를 들으며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
첫 고객은 영국인이었다. 먼 미래의 영국에도 “덩케르크 정신”이라는 말은 전해진다. 이 말의 유래가 궁금해진 그는 타임머신 방을 이용해 그 유명한 됭케르크 철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자 한다. 이때 이 고객이 경험한 것을 우리는 과연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2. 기존과 다른 ‘영화의 목적’
이러한 의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신작 〈덩케르크(2017)〉는 기존의 영화와는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이 작품이 기존의 영화와 다른 ‘새로운 영화’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던 바로 그 ‘영화’이기는 한가’ 하는 의문을 자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는 ‘영화’는 스토리와 영상의 복합체다. 뛰어난 스토리가 훌륭한 영상과 결합한 것을 우리는 좋은 영화라고 말한다. 이러한 영화를 감상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영화’ 그 자체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온 영화는 전달하고자 하는 스토리가 있고,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고, 과시하고자 하는 영상미가 있는 매체이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느끼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은 스토리와 영상, 의미 각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스토리가 흥미진진하거나 영상이 아름답거나 혹은 영화가 담고 있는 의미가 감동을 자아낼 때 우리는 영화를 ‘즐긴다.’ 지금껏 영화의 목적은 이러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에 있었다.
반면 〈덩케르크〉가 목표하는 바는 사뭇 다르다. 이 영화(일단은 영화라고 부른다면)의 목적은 관객에게 스토리와 영상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가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손에 닿는 경험이고 관찰이다. 이 영화는 이제껏 은막 너머에 있던 관찰자를 은막 속으로 던져넣고 영화 속 사건들과 단순히 접촉하게 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감독은 영화 속에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구축하지 않았다. 스토리 이전에 스토리 구축의 기반이 되는 캐릭터 구축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건들은 존재하지만 하나의 핵심 내러티브를 통해 흘러간다기보다는 다소 파편적이다. 이조차도 최소한의 흥행을 위해, 혹은 과도기적 장치로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상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영화의 영상들은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매력은 리얼리티에서 온다. 많은 영화가 회화적인 영상미를 통해 아름다움을 뽐내고자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덩케르크〉는 스토리의 즐거움과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상당 부분 포기하면서까지 극한의 현장감을 추구한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더 이상 은막 너머에서 스토리를 감상하는 외부의 관찰자가 아니다. 관객은 무방비한 상태로 은막 안에 던져진다. 물론 영화 속에 던져진 관객은 여전히 관찰자이다. 하지만 이제 관객은 영화를 보는 간접적 관찰자가 아니라 영화 속 직접적 관찰자가 되고 사건에 연루되어 이를 경험한다. 다만 거기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을 뿐이다. 마치 맨 처음 예시로 든 “타임머신 방의 고객”처럼 말이다.
3. 관객을 은막 속으로 던져넣기 위한 장치들
관객을 다만 그 현장에 던져넣기 위해 감독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매우 조용하게 묘사한다. 이때 조용하다는 것은 소리가 작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감을 위해 포성이나 총성 등을 거의 실제의 그것과 같은 수준으로 크게 표현해 놓아 영화 자체는 매우 시끄러운 편이다. 그러니 설명이나 대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 다른 영화였으면 작전의 배경이나 이전에 있었던 일을 인물들 간의 대화나 자막을 통해 줄줄 설명했을 터이지만 이 영화는 그러지 않는다. 영국군이 포위당했다. 그 사실만을 짤막하게 알려줄 뿐이다. 그 뒤로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도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이들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를 설명해 주는 대사는 거의 없다.
영화라면 이상한 일이지만 현실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일개 보병이 딜 계획이니 황색 작전이니 하는 배경을 알 리도 없을뿐더러 당장 사느니 죽느니 하는 마당에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줄줄 설명하고 있는 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짓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관찰자’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이 영화는 집착적으로 관찰자가 그 눈을 돌려 볼 수 있는 곳만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이는 등장인물 또한 마찬가지다. 등장인물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묘사가 몇 번이나 나온다. 그들은 그냥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살려고 하고, 임무를 수행하려고 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니 만나는 사람들 따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관객은 좋든 싫든 그 옆에서 가장 가까운 관찰자로서 함께 달려가게 된다. 관객과 등장인물은 똑같이 별로 아는 게 없다. 이 모든 것이 관객에게는 기묘한 현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더 이상 관객에게 감상할 것은 없다. 다만 관찰할 것이 있을 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지금껏 잘 선택하지 않았던 실화 배경 역사극을 선택한 것 또한 관객들을 관찰자로서 은막 안에 밀어 넣기 위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관객은 아직 이런 타입의, 관객을 은막 속으로 던져넣고 관찰자 역할만을 맡기는 종류의 영화에 익숙하지 않다.
그런 이들에게 〈인터스텔라〉니 〈인셉션〉의 환상 속 세계부터 경험하게 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 포맷에도 적응하기 힘든 와중에 내용까지 쉽사리 이해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면 반감은 두 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역사적 사건은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고 납득만 가능하면 비교적 쉽게 관찰자로 역할을 전환할 수 있다. 감독이 최대한 실제 사용된 것과 유사한 소품을 입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 또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일 수 있다.
다만 감독의 무 CG에 대한 집착 때문에 실제 철수 작전에 비해 빈약한 스케일로 작전이 구현된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리 작전구역 중의 일부라 하더라도, 33만 명이 항구 하나에서 탈출하는 작전인데 눈으로 보이는 스케일이 서술되는 것에 비해 너무 작아 현실감을 훼손한다.
4. 이것은 과연 영화인가?
앞서 설명했듯 〈덩케르크〉는 관객에게 스토리와 영상미 대신 경험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들과 판이하다.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접근방법 또한 차이가 크다.
영화를 아이맥스나 4D 등으로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이 영화는 아이맥스건 4D건 현장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모든 장비를 동원해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현장감, 그 경험이야말로 이 영화가 목표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아이맥스 기술 등 영화 기술의 발달이 이러한 영화의 등장을 끌어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이 더욱 발전해 VR을 통해 영화를 제작한다면 어떨까. VR 기술을 이용한다면 이보다 더 집착적으로 ‘보이는 부분만 보여주는’ 영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관찰자가 눈을 돌려 보아야 보이는 영화.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은 결국 볼 수 없는 영화. 이런 영화는 기존의 영화와는 판이해야 할 것이다.
그 유명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VR 영상으로, 체험하는 영화로 만든다고 생각해 보자. 관찰자는 어지간히 주의가 깊지 않으면 설리번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밀러 대위가 손을 떠는 것도 놓치기 쉬울 것이고, 정말 산만한 사람이라면 특공대가 구성되어 출발하는 광경까지 놓쳐버릴 수도 있다. 이처럼 특정한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하는 영화는 VR 영화와는 맞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VR을 통해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 영화는 〈덩케르크〉처럼, 혹은 그보다 더 극단적으로 다양한 광경을 ‘묘사하기만 하는’ 영화가 될 가능성이 있다. 가급적 현실감 있게 모사된 정황과 배경 속에서 관찰자로서의 관객이 모든 사건을 관찰하고 경험하는 타입의 영화 말이다. 만약 진짜로 그런 영화가 주류가 된다면 그 시초는 아마 〈덩케르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 첫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과연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영화”인가?
원문: HANAM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