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는 살인이다”는 문장이 노동자가 맞닥뜨린 참담한 현실을 규정하는 명제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09년, 쌍용자동차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 이후부터로 기억된다. 실제로 쌍용자동차 2,600여 명의 희망퇴직자와 정리 해고자 가운데 2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병으로 숨졌다.
해고는 단순히 당사자가 직업을 잃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은 물론 그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일상의 평화와 가정의 단란함을 빼앗긴 해고자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거나 돌연 찾아온 질병에 희생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문자 한 통으로도 해고를 통보할 수 있는 비정규직이 1,000만에 육박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지금 한국은 아이들 장래 희망이 ‘정규직’인 세상, 해고는 정규직에게는 먼 나라 일이지만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에겐 일상이 되어 버린 사회다.
그러나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나와는 무관한 일이다. 간간이 기업의 이른바 ‘구조조정’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해고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우리는 안도한다. 그게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나지 않아서 안도하는 대신,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웃에게는 잠깐의 연민을 보내면서.
국가산업단지가 있는 구미에도 해고는 일상적으로 존재한다. 굵직굵직한 글씨로 신문 지상에 이름을 올리는 기업에서 해고되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여야 했던 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스타케미컬이 그랬고, 케이이시(KEC)가 그랬으며 이태 전 아사히글라스가 그랬다.
연 매출 1조 원의 일본계 투자기업 아사히글라스의 사내하청 업체 지티에스(GTS)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것은 2015년 5월이었다. 구미공단에 최초로 설립된 이 비정규직 노동조합에 2주 만에 138명이 조합원이 되었다.
‘노예’처럼 일하던 공간이 ‘현장’으로 바뀐 것을 기꺼워한 것도 잠시, 한 달 뒤에 이들에게 입사 9년 만에 휴무일이 공지되었다. 긴가민가하면서 쉬던 그 휴무일에 이들의 휴대폰에 지티에스에서 보낸 해고 통보가 떴다. 원청인 아사히글라스가 하청 지티에스에 도급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는 것이다.
9년 만의 휴무일에 날아온 해고 통보
그 문자 메시지 하나로 노동자들은 자기 뜻과는 무관하게 오랜 일터로부터 내쳐졌다. 회사 측의 위로금을 받고 명예퇴직을 선택한 동료들에게 그것은 끝이었지만, 이태를 넘기면서도 끈질기게 싸우고 있는 스물두 명의 노동자들에게 이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해고 노동자들은 TFT 액정용 글라스 기판을 만드는 대신 회사 정문 앞에 천막을 치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들어갔다. 이들은 농성을 계속하면서 시민들의 서명을 받았고, 법정 투쟁을 벌였고 지역과 공장을 넘어 전국 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지난 2년을 씩씩하게 버텨왔다.
2016년 3월, 중앙노동위원회는 아사히글라스가 도급 계약을 해지한 행위를 부당노동행위로 판정하고 구제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회사는 중노위 판정 결과에 불복하여 행정소송을 제기하였다. 진실과는 관계없이 소송은 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이어질 것이었다.
소송과는 별도로 회사는 구제명령은 이행해야 하지만 정작 노동자들에게는 물론 법조차도 이를 강제할 수단은 없다. ‘법은 여전히 멀고 주먹은 가깝다.’ 당면한 밥조차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게 이 나라의 노동 현실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부당노동행위와 함께 원청과 하청업체가 불법적으로 노동자를 파견한 사실을 고소했다. 불법파견 조사를 위해 사업장 특별근로 감독이 실시되어 실제로 노동자 ‘파견’이 확인되었지만 이 사건은 아직도 고용노동청에 머물러 있다. 해고는 손바닥 뒤집는 일처럼 쉽지만 그걸 바로잡는 일은 피를 말리는 시간의 연속인 것이다.
『들꽃, 공단에 피다』는 자본과 불평등한 제도를 상대로 고단한 싸움을 계속해 온 아사히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의 ‘투쟁과 삶의 기록’이다. 짤막한 스물세 편의 글 속에는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성장하는 인간이,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하면서 깊어지는 지아비와 아비가 오롯하다.
지난 4월부터 무려 27일 동안 서울 광화문 광고탑 위에서 ‘고공 단식 농성’을 전개하는가 하면 투쟁 현장을 돌면서 노래패로, 몸짓패로 연대해 온 이들의 싸움은 고단하고 격렬했다. 그러나 정작 책에서 글로 만나는 이들은 강고한 투사라기보다는 평범한 이웃의 얼굴이다.
지난 이태 동안을 지치지 않고 싸워왔지만 이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강고한 신념과 이론으로 무장한 노동운동가가 아니다. 이들은 대부분 노조 활동이 처음인 초심자들이고 여전히 노동조합을 잘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싸움을 치러내는 힘은 신념과 이론에서만 비롯하는 것도 아니고 싸움의 상대가 반드시 외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노동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소박한 동기로 시작한 투쟁의 과정에서 성장하면서 이들은 자신과도 맞서며 자기 삶을 성찰할 수 있었다.
농성장을 지키다 그 공간마저 빼앗긴 싸움을 기록한 한 노동자의 글은 소중한 일상을 지키고 가꾸는 일이 자신의 노동과 삶의 존엄을 지키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오롯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짓고 생활할 때는 그저 공간이었지만, 그 허름한 농성장이 우리 투쟁의 꿈이고 희망이었음이 새삼 느껴졌다. 한편 ‘그래, 어차피 철거할 거면 해라. 또 새로 짓지 뭐’ 하는 생각도 들었다. 꿈도 희망도,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다시 우리의 것이 된다. 천막 한 동이라도 지키기 위해 열두 명의 동지들이 목에 밧줄을 감고 버텼지만, 농성장은 결국 철거됐다.
- 이민우, ‘투쟁의 눈물과 우리의 희망이 담긴 농성장’, 92쪽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 이후 투쟁과정에서 연대의 감동을 누리고 그것이 때론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하면서 흘린 분노의 눈물을 통해 공감과 연대가 자신의 삶을 확장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제 코가 석 자면서도 이들이 전국의 ‘투쟁사업장’과 ‘공동투쟁’을 벌이는 이유다.
‘삶과 투쟁의 기록’을 읽는 것도 ‘연대’다
스물세 명의 노동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투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농성장의 조리를 담당하는 ‘짬장’은 ‘밥하는 것이 자신의 투쟁’이라 여기고 이발사였던 노동자는 ‘이발로 세상과 연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패로, 몸짓패로 현장을 달구어 낼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자 자신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서 먼저 만난 이들 노동자를 지난 7월 14일, 구미 YMCA에서 열린 ‘노회찬과 함께하는 비정규직 이야기 한마당’에서 처음 만났다. 이태 넘게 힘들여 투쟁을 이어오면서도 이들은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이들 해고자의 낙관 앞에서 사람들은 조금 부끄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의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 구조였다면 이들은 거리의 노동자가 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일터를 잃은 이들이 만만치 않은 조건 가운데서도 희망과 낙관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소박한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전처럼 공장으로 돌아가 동료들과 열심히 일하고 싶을 뿐이지요.”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 비정규직지회의 농성 천막을 찾았을 때 농성장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노동자는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고작 그 정도일 뿐이지만 그거 하나 이루는데도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과 부담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들,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옮겨진다. 해고는 죽음이면서 때로는 ‘가족의 이산’을 강제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남편의 투쟁을 지지하며 묵묵히 부담을 나누고자 하는 아내들의 강단은 눈물겹다. 아빠의 용돈을 걱정하는 초등학교 6학년짜리 딸의 성장도 그 일부분이다.
아내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촛불 집회 장면이 나오니까, “아빠, 데모하러 가?”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서 딸이 한 마디 툭 던진다. “다치지 마래이!” 어린 딸에게서 짧은 걱정의 말을 듣는데 내가 투쟁하는 이 상황이 서글프기도 하고, 딸이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게 마음 아팠다.
설날이 지나고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딸이 “아빠, 돈 있나?” 묻는 것이다. “왜?” 하고 물으니, “그냥, 내 용돈 좀 줄라고. 아빠 돈 없잖아……. 세뱃돈 받은 거 있는데.” 해서, 웃으면서 “됐다, 마” 했다. 아빠와 딸이 반대가 돼야 하는데, 서글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도 한 번씩 딸에게 용돈을 주는데, 투쟁하고 나서부터는 “아빠 써. 아빠…… 없잖아” 하면서 안 받는다.
- 박성철, ‘가족들의 사랑으로 고통을 이기고’, 160쪽
해고된 아사히글라스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공단의 콘크리트를 뚫고 피어난 ‘들꽃’으로 비유한 지회장 차헌호는 ‘이 책이 끝나지 않은 우리의 투쟁에 힘이 되고, 전국에 넘쳐나는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때로 싸우는 사람들의 고단한 여정 앞에서 안온한 일상이 민망하게 느껴진다면 이 책에 실린 무명의 이웃들이 전하는 낮은 목소리를 듣는 것도 좋은 일이다. 거창하게 어깨 겯고 싸우는 것만을 ‘연대’라고 하지 않는다. 갈피에 숨고 행간에 담긴 가족의 자존, 눈물과 상처에 공감하는 것도 그들의 손을 맞잡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