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현지에 69만 명 남짓 있었다. 7만 명이 조선 사람이었다. 4만 명이 죽고 3만 명은 죽지 않았다. 2만3000명은 돌아오고 7000명은 남았다.
다섯 살 여자아이 이곡지도 이 때 돌아왔다. 아버지와 언니는 나가사키 일터에서 숨졌다. 이곡지는 어머니와 함께 합천 외가에 와서 누구나 가난하던 시절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다.
이곡지는 겉보기에 문제가 없었다. 1960년대 두 살 많은 합천 남자 김봉대와 결혼하여 부산에서 살면서 4남2녀를 두었다. 위로 세 자녀와 여섯째 막내는 탈이 없었지만 1970년 태어난 넷째·다섯째 쌍둥이는 달랐다.
동생은 1년 반 만에 폐렴으로 죽었고 형 김형률은 선천적으로 병약했다. 결석을 밥 먹듯 한 끝에 초·중학교만 겨우 졸업했다. 김형률은 궁금했다.
왜 나는 다른 사람처럼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할 수 없지?
의문은 스물다섯 되던 1995년에 풀렸다. 각혈을 하고 호흡이 멈춰져 특별혈액검사를 했더니 ‘면역글로불린M 증가에 따른 면역글로불린 결핍증’이 나왔다. 어머니의 핵피폭에 따른 유전병이었다. 면역력이 거의 없어 폐렴·기관지확장증 등 심각한 합병증 위험이 상존하는 상태였다. 동생이 태어나자마자 페렴으로 죽은 이유가 그제야 짐작되었다.
김형률은 2002년 3월 22일 핵피폭 유전을 우리나라 최초로 커밍아웃했다. 이로써 핵피폭 2세의 고통이 처음 알려졌다. 김형률은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꾸리고 ‘원폭피해자와 원폭2세환우 등의 진상규명·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에 힘을 쏟았다.
목적은 핵피폭 1세와 2세 모두 치료·건강·생존·인권을 보장받으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김형률은 ‘병구를 이끌고’ 죽을힘을 다해 세상과 맞섰다. 그러다 2005년 5월 29일 가쁜 숨을 몰아쉬고 붉은 피를 토하면서 감을 수 없는 눈을 감았다.
우리나라 핵피폭2세가 적어도 1만 명이라 한다. 탈 없는 경우도 많지만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이도 적지 않다. 탈 없는 2세조차 그 3세는 유전병에 걸릴 개연성이 있다.(그런데도 유전·유전병에 대한 조사·연구는 없다. 가해자 미국, 원인제공자 일본, 피해자 한국이 모두 그렇다)
게다가 핵발전에서도 핵에 노출되면 죽거나 다친다. 겉은 멀쩡하지만 유전병 대물림도 생길 수 있다. 스리마일(미국)·체르노빌(소련)·후쿠시마(일본)가 일러주는 바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핵피폭 가계(家系)와 혈연으로 맺어지면 누구나 바로 당사자가 된다. 핵피폭 1·2·3·4…세들의 문제는 그들만이 아닌 모두의 문제다. 그런데도 지난해 제정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에서는 핵피폭 2세가 제외되었다.
김형률이 목숨 걸고 요구한 내용이 통째로 빠진 것이다. 핵피폭1세는 물론 그 자녀까지 사회의 관심 속에 보호·관리를 받으며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 핵이 없어져야 하는 이유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원문: 지역에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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