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전쟁의 끝
1939년 8~9월,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를 기습적으로 침공하였다. 이에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하였으나, 전쟁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적극적인 군사활동은 하지 않았다.
프랑스군 일단의 병력이 독일 국경을 넘었지만, 적극적 공격 의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마저도 금세 철수하였다. 독일 또한 폴란드 전역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전포고만 해 놓고 전투는 벌이지 않는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심지어는 전선의 병사들이 서로 공격하지 않을 것을 공공연히 약속하기도 했다. 후세에 가짜 전쟁(Phoney war)이라고 부르는 기간이었다. 독일이 노르웨이 침공을 감행한 1940년 4월까지도 독일과 영·프 연합군은 이렇다 할 전투 하나 없이 서로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 기묘한 침묵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폴란드 전역을 승리로 이끈 독일은 1940년 5월 10일,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거쳐 프랑스를 침공한다. 가짜 전쟁의 끝이었고, 황색 작전의 시작이었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
1940년 5월 10일, 독일은 총 3개 집단군을 구성하여 프랑스를 공격한다. 독일군은 이를 황색 작전이라고 불렀다. 이 작전의 주력은 1차대전부터 참모로 활약한 게르하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이 이끄는 A집단군(Heeresgruppe; 수 개의 야전군을 묶은 최대 편제단위)이었다. 독일군의 전역(Campaign; 일련의 연속된 전략을 하나로 묶은 단위) 계획은 아래와 같았다.
- 벨기에 북부에 B집단군, 남부에 A집단군을 포진시키고 마지노선 전방에 C집단군을 배치한다.
- 마지노선의 존재로 인해 프랑스 남부로의 병력 전개는 어려우므로,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 북부로부터 공세를 개시한다. 단, C집단군은 지속적인 활동으로 마지노 선에 배치된 프랑스 병력을 묶어 둔다.
- 이 때, 벨기에 북부를 공격하는 B집단군을 아군의 주된 공격부대, 즉 주공으로 오인하도록 적을 기만한다. 벨기에 북부는 남부에 비해 병력이 움직이기 쉬운 평탄하고 넓은 지형이기 때문에, 주공인 A집단군과 대등한 전력인 B집단군이 이 곳을 공략하면 프랑스·영국 연합군은 이를 주공으로 볼 가능성이 높다. B집단군은 적극적으로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대한 공세를 감행함으로서 적을 더욱 철저히 기만하고 아군의 배후를 확보한다.
- 기만작전에 성공할 경우, 연합군은 벨기에 북부를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벨기에 북부 및 프랑스와 벨기에 국경의 북쪽으로 투입할 것이다.
- 이렇게 되면, 실제 주공으로서 전력을 비축하고 있던 A집단군이 연합군의 약한 남부를 돌파하여 배후로 기동, 북쪽에 배치된 연합군의 후방을 포위하여 고립시킨다.
- 연합군의 병력을 포위섬멸한다. 이 과정에서 주력인 A집단군의 기동이 마치 서양식 굽은 낫으로 풀을 베는 것 같다고 하여 영국에서는 이 작전을 낫질작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연합군은 완벽하게 기만당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 대장은 프랑스군 주력을 벨기에 중심부로 이동시켜 벨기에 내에서 독일군을 방어하는 딜 계획을 채택했다.
그러나 연합군을 기만하는 데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은 계획대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좁은 전투구역에 대규모 집단군이 포진하다 보니 서로 길을 막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함께 공세에 참여해야 할 예하 부대들이 제 때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기갑집단(Panzergruppe)을 단독으로 편제하여 기동력을 극대화하는 아이디어는 혁신적이었으나 그만큼 많은 반발과 오해를 낳았고 지휘상의 마찰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성공적으로 아르덴과 스당을 돌파, 뫼즈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 허를 찔린 연합군은 독일의 전진을 막기 위해 역습을 감행하지만, 너무 늦은 대응과 후진적인 전술 개념으로 인해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독일군은 연합군을 완벽하게 포위섬멸하기 위하여 대서양을 향해 질주해 나갔고 프랑스 북동부 해안에 갇힌 수십만의 연합군은 꼼짝없이 전멸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독일군의 오판
5월 20일, 베강 플랜(프랑스의 새로운 총사령관 막심 베강이 입안한 독일 주력에 대한 방어계획)을 바탕으로 아라스 전차전을 비롯한 연합군의 필사적인 역습이 진행되었지만,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대서양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영국에서는 부랴부랴 고립된 연합군 병력을 구출할 계획을 세웠다. 작전 입안자는 후에 횃불 작전(북아프리카 상륙)과 오버로드 작전(노르망디 상륙)에도 참여하게 되는 버트럼 홈 램지 제독이었다. 그가 당시 수상이었던 처칠에게 이 작전을 설명한 곳이 해군지휘소의 다이나모 룸이라는 방이었기 때문에, 작전명은 “다이나모”가 되었다.
작전이 수립되고 준비되는 동안에도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작전 수립일인 5월 20일 당시 연합군이 이용 가능한 대표적인 항구로는 불로뉴, 칼레, 됭케르크 등이 있었는데, 이 중 불로뉴와 칼레는 각각 5월 25일과 27일에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됭케르크 앞에도 이미 대규모의 독일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포위된 연합군 병력의 운명은 이미 끝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5월 24일, 독일 A집단군은 돌연 대서양으로의 기동을 멈추었다. 이는 폰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룬트슈테트는 현재 기갑전력만이 과도하게 돌출되어 있어 연합군의 역습에 의해 고립될 수 있으므로 기갑집단이 진격을 멈추고 전선을 유지하는 사이 후속 보병부대가 아라스 등지의 연합군 병력을 공격하여 기갑부대의 배후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까지 보여준 기갑부대의 활약상을 감안할 때, 향후 프랑스 전역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기갑전력을 온전히 보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됭케르크 인근에는 플랜더스 습지가 있어 전차의 기동에 불리하다는 점 또한 이러한 판단을 뒷받침했다. 프란츠 할더에 따르면, 당시 독일 공군(Luftwaffe) 사령관이던 헤르만 괴링이 공군의 힘을 보여줄 기회라고 히틀러에게 떼를 쓴 결과물이라고도 한다.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이러한 결정에 거품을 물며 반대했지만,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또한 룬트슈테트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였기에 진격정지 명령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5월 24일부터 26일까지 독일군은 됭케르크를 20여km 정도 앞둔 곳에서 멈춰 서 있었다.
연합군의 분전과 기적의 철수
연합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철수작전을 위해, 됭케르크 인근에 포진하고 있던 연합군 병력은 야지방어를 포기하고 됭케르크로 철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다이나모 작전, 됭케르크 철수작전은 26일부터 실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가능한 한 빨리,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수송하기 위해 영국군은 타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은 물론, 선박 징발령을 내려 국내의 배란 배는 다 긁어모았다. 국민들의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화물선, 어선은 물론이고 징발 대상도 아닌 보트까지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참가하겠다고 모여들었다. 실제 작전에 참여한 선박 중 가장 작은 선박은 14피트짜리 개방형 픽업보트로, 현재 영국 전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물론 징발 대상이 아닌 배들은 대부분 돌려보내졌고, 실제로 병력의 대부분은 대형 선박에 의해 구조되었지만 이들의 헌신과 의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영국 해군 또한 함대의 총기함을 상징하는 성 조지 기를 구출에 참가한 모든 선박이 게양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이들의 헌신을 칭송했다.
26일, 영국 해외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제6대 고트 자작, 존 베레커 경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영국군은 방어를 강화하는 동시에 수송할 수 없는 장비 및 보급품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26일 저녁, 히틀러는 전군 정지 명령을 철회하였고 27일부터 독일군은 다시 연합군의 숨통을 조여 오기 시작했다. 위챠트, 릴, 이프레스 등 각지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연합군은 여러 전투에서 피해를 입었지만, 됭케르크로 진출하려는 독일군을 간신히 저지하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제12 차량화보병사단과 제150 보병연대 등은 철수하는 아군의 배후를 끝까지 지키다 결국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독일군의 맹렬한 공격의 한편에서 르 파라디스 학살과 같은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지상 뿐 아니라 하늘에서도 독일군은 연합군을 맹렬히 공격했다. 독일군의 폭격기들이 철수하는 함선들을 공격하고, 영국 전투기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하고, 이 영국 전투기를 격추하기 위해 독일 전투기들이 달라붙는 치열한 공중전이 계속되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의 서전(序戰)이 열린 것이었다. 영국 공군은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치열하게 독일 폭격기에 달라붙었다. 수많은 병력이 도버 해협을 건너 안전하게 탈출하는 동안 영국 공군은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작전 첫 날인 5월 27일은 8000명 미만의 병력만이 구조되어 연합군을 긴장하게 했으나, 이윽고 풍랑이 잠잠해지며 탈출 인원은 늘어났다. 후방의 병력과 공군이 분전하는 사이 5월 31일에는 6만 8천여명이 도버 해협을 건넜고, 5월 27일부터 6월 4일까지 총 9일의 작전기간동안 약 34만명의 연합군 병력이 독일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영국 땅을 밟았다.
됭케르크 철수, 그 이후
됭케르크 철수는 분명 기적적인 사건이었으나, 본질적으로는 연합군의 패배였다. 독일은 부대를 재편성하고 적색 작전을 발동, 프랑스를 항복시켰으며 프랑스 서부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군 잔존 병력은 6월 15일부터 25일까지의 아리엘 작전(프랑스 서부 셰르부르, 브레스트, 보르도 등 항구를 이용한 병력 철수 작전)을 통해 프랑스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됭케르크에 남겨두고 온 장비와 물자는 파괴되거나 독일군에게 노획되어 영국군은 한동안 재무장에만 골머리를 앓아야 했고, 공군의 막대한 손실 또한 문제거리였다.
그러나 이 철수작전의 기적적 성공은 영국 국민들에게 자긍심과 의지를 심어주었다. “됭케르크 정신”이란 말은 영국에서 아직까지도 국민이 단결하여 역경을 이겨내는 불굴의 의지를 뜻하는 말로 쓰이며, 이 정신이야말로 런던 대공습을 포함한 기나긴 전쟁에서 영국이 버텨내는 힘이 되었다.
됭케르크 철수가 종료된 6월 4일, 수상 윈스턴 처칠은 그 유명한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내어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에서, 또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연설으로 이 의지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또한, 됭케르크 철수로 보존된 영국 병력은 단기적으로는 영국 본토 방위를 통하여 영국 상륙이라는 히틀러의 야욕을 억제하는 데 기여했고 장기적으로는 영국의 북아프리카 및 서유럽 전전 참전의 주축이 되었다. 구출된 프랑스 병력 대부분은 다시 프랑스로 귀환하여 프랑스가 항복할 때까지 독일에 맞서 싸웠으며 일부는 망명 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원문: kalay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