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사고실험을 하며 반론을 만들어 봐도 문재인 대통령의 장점 중 이것 하나는 부정할 수가 없다. 바로 ‘중심 차지하기‘. 미국 방문부터 이번 G20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준 것은 중심을 차지하는 기술이다.
미국 일방주의로 낙인 찍히긴 하지만 트럼프의 생각은 간결하다. 강한 미국 만들기다. 거기에 방해되는 건 세계와의 약속이든 올바른 이념이든 일단 제낀다. 팔 수 있는 건 팔고 이익되는 건 (싸게) 사겠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부실한 곳은 메꾸고 넘치는 곳은 잘라낸다. 기후협약 탈퇴하고 한미 FTA는 수정하자는 게 모두 이런 식이다.
어느 나라 어느 정권이 이렇지 않겠느냐마는 트럼프의 특징은 이를 외교적 수사로 눙치는 대신 강대국이란 입장을 살려 직설로 선포함으로써 논의의 틀을 선점한다는 데에 있다. 관련국 입장에선 그 틀에 뒤늦게 반응할 수밖에 없고 대응이 부산해질 수밖에 없다. 외교 군사 정책에 같은 시각을 유지한다는 건 이미 다 알려졌고, 동아시아 정세에도 같은 자세를 유지할 거란 건 이미 주지의 사실.
동아시아 군사 긴장은 북한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중 마찰은 오랜 역사적 관계도 있지만 결국 해양세력화에 대한 양국의 갈등이며 중국과 해양경계선을 마주하는 동남아시아 각국과의 마찰도 이유는 비슷하다. 최근엔 이걸 미국의 힘만으로 관리하기 벅차니 일본을 첨병 삼아 뒷배 노릇 하는 정도의 노선을 유지했다.
여기에 문 대통령이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북한의 존재가 정말로 골치 아픈 건 미국 영토에 핵폭탄을 쏠지도 모른다는 것보다 (지금까지 보여준 바로는 당장 그만한 체계와 기술력을 가졌는지 의문이다) 그러잖아도 복잡한 동아시아 정세를 더 꼬이게 만드는 변수를 키운다는 데 있다.
한국이야 직접 당사국이라 북이 작은 단거리 미사일 하나만 개발해도 위험지수가 올라가지만 넓게 보면 북의 노림수는 항상 아시아를 둘러싼 강대국의 외교 복잡도를 올리는 것에 집중되었다. 즉 무기개발이라는 호전적 태도를 유지해 군사갈등 위기를 계발함으로써 외교 중심을 차지하려는 것이다. 사실 이는 미·일 양국의 대 중국 외교 지렛대에도 유리하니 서로 길항상태를 유지해 이익을 추구하기로는 모두가 같다. 북한이 외교 갈등의 중심에 있을 때 각국의 지렛대는 하나씩 늘어난다.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이때 대한민국의 입지는 약화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이 지점에서 매우 큰 실기를 했다. 어떤 이유로 그랬든 결과는 중심에서 밀려나는 거로 맺어졌다. 중심에서 밀려난 국가는 외부의 입김에 쉽게 흔들리고 군사는 물론 경제면에서도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그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를 그대로 살려 ‘우리가 역할을 할 테니 우릴 밀어줘라, 대신 너는 힘을 덜고 재편되어가는 세계정세에 네 돌 하나를 쥐어라’고 딜을 건 것이다.
문 대통령의 이 전략으로 한미공조로 상징되는 미국 패권주의의 이미지를 살려주는 동시에 한국은 중국에게 권역 내 중요 협상대상자가 된다. 한국은 이로써 동북아 균형자 노릇, 즉 갈등 해결의 핵심국가가 될 수 있다. 일본은 한반도 정세를 제외한 나머지 갈등만 관리하게 되고 한·일 양국의 외교적 세균형은 보다 수평적으로 조정된다.
이쯤 되면 강경화 장관의 발탁 이유는 여성 인권 이미지 활용을 통한 대 일본 외교전 정도가 아니라 이런 문 대통령의 수를 확장할 역량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타당하다. 여러모로 쓰임새가 있었단 뜻이다. 문 대통령은 이렇게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빠르고 간략하며 신속한 과정이다.
민주당 재활을 성공시킨 것이나 외교 무대에서의 모습이나 문 대통령의 ‘중심 차지하기’는 우리 정치사에서 실로 오랜만에 보는 장면이다. 또한 동맹국과 묘한 긴장을 타지 않고도 세련되게 주고받을 줄 아는 능력은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심지어 상대가 트럼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