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적 통찰력을 유려한 문체로 전달하는 책은 어떤 소재를 다루든 읽는 내내 즐겁다. 이렇게 쓸 수 있는 저자는 그리 많지 않은데, 아니 많은데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지금 당장 생각나는 저자는 『대한민국 치킨전』을 쓴 정은정 선생님과 『결혼파업, 30대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쓴 윤단우 선생님, 이렇게 두 분이다.
두 분의 다른 공통점이라면 책을 많이 내지 않는다. 윤단우 저자는 저 책을 낸 뒤로 『사랑을 읽다』와 『열아홉 번의 사랑』을 내긴 했지만 두 저서 모두 문학, 공연에 대한 비평서 성격이 강해 그다지 많이 끌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가 반가웠다.
페미니즘을 대하는 모순적 태도
이 책은 대한민국 현대 여성을 다룬다. 내가 페미니즘에 느끼는 감정은 이 책 5장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에서 엄마와 딸 사이에서 느끼는 그것과 비슷하다. 엄마는 딸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자신처럼 살기를 바란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에노 치즈코는 어머니들이 이처럼 이중 메시지를 전하는 심리에 대해 나에게 없었던 것을 딸이 가지기를 바라는 한편 자신의 인생이 딸을 통해 부정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략)
어머니의 이러한 모순적인 기대는 딸들을 혼란에 빠트린다. ‘여자’로서 살아야 하는 딸이 남자의 선택을 받지 못해서는 안 되며, 남자의 선택을 받을 때는 딸을 선택한 남자의 가치가 여자인 딸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어머니 입장에서 딸이 별 볼 일 없는 남자에게 선택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머니와 딸의 인생은 2인 3각 게임처럼 서로에게 묶여 있다.
- 270-271쪽
나 역시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는 모순이다. 이는 개인적인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특히 대학생 신입생 시절 겪었던 경험 탓이다. 2003년. 01학번과 02학번 선배는 무서웠다. 수능 끝내고 ‘어떻게 하면 대학에서 재밌게 놀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새내기에게 일부 선배는 그간의 잘못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서 올바른 세계관을 탑재하도록 강요했다.
새터(새내기 배움터)라는 행사를 위해 이동하던 고속버스에서 동기가 ‘소양강 처녀’를 불렀다. 그 친구는 춘천 출신이었다. 곧바로 02학번 선배가 나와서 두 손으로 X를 표시하며 제재했다. 성차별적인 노래라는 이유였다. 새터에서는 가부장제가 왜 잘못되었는지 토론했다. 술이나 재밌게 퍼마시려던 나의 기대는 제대로 어긋났다. 드라마, 연예인 이야기가 나오는 족족 비판받았다.
‘예쁘다’는 말도 금기어였다. 연애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기제인지라 지양되었다. 물론 선배들 사이에도 연애하는 사람은 있었는데, 실제 그들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한편 다른 반에서는 복학생 남학생이 농구공을 들고 와서 농구 하자고 했다가 대자보가 붙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라 그 분위기를 굳이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열심히 읽었다. 연예인이나 드라마에는 원래 관심이 없었다. 예쁘다는 말을 내 사전에서 삭제했다. 그 좋아하던 농구도 학교에서는 한 적이 별로 없다. 덕분에 나는 그 시기 인문대생 중에서 평균에서 아주 살짝 많은 정도로 페미니즘 도서(꽤 많이 읽었다 생각하는데 지금 생각나는 저자는 거다 러너 정도다)를 읽었다.
동시에 대학 생활을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즐기지 못했다는 다소 인과 관계가 모호한 피해 의식을 품었다. 대학 밖에서야 남자라는 특권을 누렸지만 안에서는 존재만으로 움츠려야 했으니까.
여성혐오는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영어 ‘misoginy’의 번역어인 이 단어는 단순히 여성에 대한 미움이나 증오를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성적 도구로 취급하는 것, 하나의 인격으로, 주체적인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고 대상화하는 시각 모두를 가리킨다. “여성혐오를 하다니, 제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같은 발언은 이 단어가 어떻게 오해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 27쪽
페미니즘에 전반적으로 찬성하고 공감하며 지지하면서도 아주 가끔 ‘저건 너무 나간 주장인데’ 할 때가 있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이 그랬다. 범인은 조현병 환자로 밝혀졌는데 이런 소식을 접하며 저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는 일부 목소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친구 중에 조현병 환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 친구를 떠올리며 저 사건을 여성혐오를 범죄 원인으로 꼽는 건 너무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했다.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를 읽으며 내 생각을 바꿨다. 강남역 살인 사건은 여성 혐오 범죄가 맞다. 윤단우 저자가 300여 쪽에 걸쳐 서술한 현대 대한민국 여성의 삶을 읽는다면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인터넷상에서는 ‘여성혐오’에 대응하는 것으로 ‘남성혐오’에 대한 발화가 떠돌아다니지만 ‘남성 혐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혐오는 상대적인 약자를 향해 표출되며, ‘여성혐오’는 종국엔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을 겨누는 방아쇠가 된다.
- 30쪽
성범죄는 위계질서가 있는 고시라면 어디에서든 일어난다. 성범죄 가해자가 대부분 남성인 것은 남성 중심 사회구조에서 권력을 쥔 것이 주로 남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이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특수한 사회, 대표적인 ‘여초사회’로 꼽히는 학교나 병원은 어떨까. (중략) 이는, 한국사회의 낮은 성 평등 의식이 학교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48-49쪽
생뚱맞은 논의지만 종교학 시간에 배운 내용이 생각난다. ‘기적’이라는 걸 다루는 시간이었다. 기적은 반증하기 어려운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기적이 사회적 맥락에 대단히 의지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성모 마리아의 재림을 보지, 관자재보살의 형상을 보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 역도 똑같다. 즉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우발적 범행이라도 그 범행은 여성혐오가 강하게 작동하는 가부장제라는 맥락 안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만약 여러 성이 평등하고 힘이 균등한 상황이라면 상황이 달랐을 테다.
가장 광범위한 낙인
저자 윤단우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총 82명을 만났다고 한다. 인터뷰 소요 시간은 1만 4,524분. 녹취록을 푼 분량은 A4 용지로 4,026매다. 저자의 이러한 값진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인터뷰한 여성은 자신의 삶을 말했다. 때로는 그들의 목소리를 큰따옴표로 전하고, 때로는 저자가 개입하며, 때로는 다른 책을 인용한다. 나는 이런 형식을 굉장히 좋아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말한 상호텍스트성에 충실(책에서 소개하는 다른 훌륭한 책이 많다)하면서도 윤단우 저자만의 목소리도 함께 실렸다.
주제는 간단하다. 여성 상위 시대는 개뿔. 여전히 인류의 절반이 나머지 인류의 절반을 지배하는 사회다. 지구 곳곳에, 대한민국에 낙인이 존재한다. 학벌, 출신 지역, 현재 거주지, 나이, 기타 등등. 이 중에서 여남 문제가 가장 절실한 건 앞에서 말한 비율 때문이다. 그 어떤 낙인도 이렇게 광범위하게 작동하지 않는다.
이제 성형은 리얼리티쇼에까지 진출해 여성들의 자아실현 방법 중 하나로 격상되었다. 다시 말하면, 현대의 여성은 성형 수술을 해서라도 아름다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은 여성들은 노력이 부족한, 그래서 무시당해도 되는 존재다.
- 97쪽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러한 태아 성감별에 따른 여아에 대한 젠더사이드가 여성 권익 증진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 115쪽
대한민국 절반은 집주인이고 절반은 세입자니 여기에 빗댈 수 있을까. 하지만 집주인/세입자도 파고 들어가면 주택 소유자는 절대다수가 남자다. 부부가 함께 돈을 모아 집을 사도 명의는 남편인 게 태반이니. 한편 여/남이라는 건 너무나 가시적이다. 이런 이유로 로지 브라이도티는 ‘페미니즘이란 유물론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페미니즘은 모두에게 절실하다
“마흔 넘은 아줌마, 그것도 애 키우면서 쉬다 온 아줌마를 써주는 회사가 어딨어요. 이렇게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죠.”
정은 씨의 말에 주책맞게 또 눈물이 났다. 여자들의 이야기는 대체 울음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 157쪽
슬픈 책이다. 펑펑 울지는 않았지만 찔끔찔끔 울었다. 붓다 말마따나 삶은 고인데 여성의 삶은 더 고되다. 전 우주적 차원에서 보자면 도토리 키재기라도 인간에게는 필요하다. 누구 삶이 더 힘든지 목소리 내는 작업이 필요하단 말이다.
30년 넘게 남자로 살면서 확실히 여성보다 특권이 많았다. 취업하기도 쉽고, 술 마시고 밤늦게 돌아다녀도 괜찮고, 살짝 못생겨도 되고 뚱뚱해도 된다. 결혼 전이나 결혼 후에도 명절에 여성보다 남자가 훨씬 편하다. 후어어어얼씬.
OECD는 2000년부터 성별 임금 격차에 대한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한국은 이 부문에서도 15년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남녀의 평균 임금 격차는 36.7퍼센트로 남성이 100만 원을 벌 때 여성은 63만 3,000원을 번다는 뜻이다.
- 112쪽
고용의 질이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여성들이 직업 안정성이 높은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귀결이다.
- 125쪽
명절은 가정 내에서 남자 형제와 별다른 차별을 받지 않고 자라며 학교와 사회에서 남자들과 공정한 경쟁을 한다고 믿었던 여성들이 전근대사회의 여성의 위치를 체험하는 장이다.
- 250쪽
많은 페미니즘 저서가 그러하듯 이 책은 모성을 다룬다. 모성이데올로기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데올로기라는 게 흔히 그러하듯 있는 게 아니라 만들어졌다’고 기술한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재생산의 처음과 끝을 담당하는 여성, 그에 필요한 재화를 벌어오는 건 남자’라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분리가 모더니티의 핵심이고 이로써 자본주의는 성장할 수 있었다는 데도 동의한다.
자본주의는 잉여를 만들 외부가 필요한데 제국은 식민지를, 남자는 여성을 식민화했다는 지적에도 동의한다. 식민지에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듯 시장은 여성의 가사 노동에 화폐를 제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맥락에서 모성은 모더니티에서 이데올로기로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엄마와 아빠가 아이를 사랑하는 건 시대나 공간을 막론하고 본능이다. 親, 나무 위에 올라간 아이를 본다. 다만 모성이라는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성이라면 그 모성은 아빠에게도 당연히 존재하고, 그런 면에서 모성이라기보다는 역(易)성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주역 표현에 生生之易이라는 구절이 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지만, 살리려 하는 건 본능이다. 내 자식은 매우 살리고 싶고, 남의 자식도 살리고 싶긴 하지만 정도는 덜하겠지. 이것이 유가. 아끼되(仁), 차별(禮)하라.
딸 둘을 둔 아빠로서, 페미니즘은 이전보다 더 절실해졌다. 내 딸들이 좀 더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이 많이 팔리고, 읽혔으면 좋겠다.
원문: 듬틀 또 레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