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대한 오래된 원칙
요즘 성을 둘러싼 스캔들로 많은 사람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장관 후보자로서 처음으로 낙마한 사람은 여성의 동의 없이 허위로 혼인신고를 했던 것이 드러나 사의를 표했고, 어떤 청와대 행정관은 고교 시절 여학생을 성관계 대상으로 공유했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히 해 물의를 빚었죠.
야당은 이를 강력하게 규탄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돼지 발정제로 강간 모의를 했던 사람이 대선후보였고, 전 정부에선 아예 성 접대 스캔들이 폭발했으니까요. 오십보백보라기엔, 그 거리가 좀 많이 먼 것 같네요.
솔직한 성 담론은 좋은 일입니다. 우리 사이에 추파가 넘실댔으면 좋겠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호감을 표현하고, 어디에서나 새로운 상대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개방된 세상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때로 ‘성에 솔직한 사회’라는 현대적인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가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곤 하지요. 합의와 배려라는 아주 오래되고 가장 기본적인 덕목 말입니다.
네, 우리는 많은 경우 그런 실수를 저지르곤 합니다. 요즘은 이런 시대니까, 하며 새롭고 쿨한 척을 하면서, 정작 아주 오래된,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무언가를 잊어버리는 일을요.
경전 속의 지혜 ft. 허무개그
논어는 유교의 경전처럼 불리는 책입니다. 고루하죠. 읽다 보면 하품이 나올 지경이죠. 배울 게 뭔가 싶을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의 4편, ‘리인(理仁)’ 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공자와 증참(曾參)이란 제자의 대화인데요. 공자가 증참이란 제자를 갑자기 부르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내 도는 하나로 통한다.”
증참은 이 말을 듣더니 고민조차 하지 않고 0.5초 만에 이렇게 대답하지요.
“네.”
다른 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네”로 끝입니다. 그 말을 듣고는 공자는 만족스러워하면서 방에서 나가버립니다(?).
뭔가 허무개그 같은 이야기이지요. 사실 논어에는 이런 허무개그 같은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도 이게 뭔 개소리야 싶었는지 증참에게 이게 무슨 얘기냐고 물어보았는데요. 증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공자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뿐입니다.”
여기에서의 ‘충(충성 忠)’이란 나라나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에 충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자신에게 충실한 뒤 필요한 미덕이 ‘서(恕)’인데요, 바로 그 자신의 마음에 가졌던 ‘충(忠)’과 같은 태도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확장해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엔 자신에게 충실한 사람이 많습니다. 공부도 굉장히 많이 했고, 도덕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그럴듯한 책을 써내죠. 하지만 현실에선 룸살롱에 가고 술자리에 여자를 부릅니다. 이런 것은 서(恕)가 제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높으신 분들 사이에 많은 유형입니다.
한편 자기 자신도 도덕률에 엄격하고 남들에게도 도덕률을 강조(강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까진 좋은데, 그 도덕률이 좀 괴상한 경우가 종종 있죠. SNS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유형입니다. 서(恕)는 어느 정도 되는데 그 기반이 되어야 할 충(忠)이 부족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지도요.
사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고도화되면서 고전은 뭔가 케케묵은 소리나 하는 책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10년 전만 해도 지금과 같은 여성 혐오논란 같은 것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죠.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들은 복잡한 현대사회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이처럼 오래된 원칙을 잊고 무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충’과 ‘서’ 같은 가치들 말이죠. 정말 ‘충’과 ‘서’에 충실하다면 사람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멸시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논어를 다 읽고 있는 건 사실 동양철학 전공자가 아닌 이상 바보 같은 짓 같기도 해요. 어쨌든 공자는 의례에 집착하던 고대 인물이고, 군주의 예를 신하가 따라 한다며 ‘말세로다, 말세야’ 하고 한탄하던 2,000년 묵은 꼰대니까 말이죠.
고전에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인문학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걸 하나하나 끄집어내기엔 너무 힘들다는 거죠. 분량도 많고, 꼬부라진 한자가 가득하고, 에헴 하는 공자님 말씀들이 고루하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맞게 정제된다면 무척 흥미롭고도 유의미한 가르침이 되죠.
그래서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일 테지요. 고전의 가르침을 정제하여 전달하는 인문학 도서 말입니다. ‘승자의 공부’는 바로 그런 책입니다. 공자님 말씀 속에서 “충”과 “서”라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정제해내고, 그걸 오늘날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그런 종류의 책이죠.
군주민수: 1,500년 전의 메시지
이 책은 당 태종부터 강희제, 주공 단, 관중, 저우언라이, 그리고 청나라 말 인물인 좌종당에 이르기까지 여섯 사람의 제왕학과 용인술, 오늘날로 따지면 일종의 경영학적 마인드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무경칠서’라 불리는 중국 병서가 소개하는 인문학적 원칙을 또한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모든 이야기를 소개할 순 없으니, 첫 강의를 장식하는 인물을 한 번 살펴볼까요. 당 태종은 당나라의 최고 명군이며, 이후 무려 세종대왕을 포함해 동아시아 군주들의 지향으로 여겨진 인물입니다. 그의 어록을 담은 책 ‘정관정요’는 역시 세종대왕을 비롯해 제왕학을 공부하는 군주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고요.
이 책에는 위징이라는 당 태종의 신하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하도 입바른 소리를 해서 당 태종이 정말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내치자니 입에 쓴 말이긴 해도 하나같이 충언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는데요.
한번은 당 태종이 놀러 가려다가 또 위징이 뭐라 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는데, 위징이 당 태종이 놀러 간다는 소문만 가지고도 당 태종을 갈구었다고 합니다. 당 태종이 이번에는 진심 화가 나서 이번에는 기필코 죽일 테다 부들부들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들은 황후가 갑자기 축하할 때 입는 예복을 갖춰 입고 나와선 이렇게 말했다고 하네요. 그런 충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이지 기쁜 일이라고 말이죠.
어쨌든 정관정요에는 이 위징이란 사람이 당 태종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君主人水, 水能載舟, 亦能覆舟.”
임금은 배이며, 사람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또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어딘가 익숙한 얘기죠? 군주민수(君舟民水)는 교수신문이 뽑은 2016년의 사자성어이기도 합니다. 바로 박근혜를 겨냥한 것이죠. 박정희의 후광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을 좌지우지하며 정략에 골몰했고, 이러한 권력의 사유화에 분노한 국민이 100만의 촛불을 들고나와 그를 가라앉혔습니다.
박근혜 탄핵은 민주주의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오늘날에도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지금도 대통령을 국민이 끌어낼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는 없습니다. 하지만 100만, 200만이 모여 하나의 물결이 되자 아무리 사정 기관을 손에 틀어쥔 대통령이라 해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박근혜가 1,500년 전 당 태종만큼만 듣는 귀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박근혜뿐이겠습니까. 고전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무경칠서의 필두인 ‘손자병법’을 잠깐 한 번 살펴보죠. 손자는 ‘전쟁은 졸속으로 하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끝내야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뛰어난 작전치고 오래 끄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건 오늘날의 경영에서도 마땅히 통용되는 원칙입니다. 디자인, 조립, 마케팅에 이르는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고, 공동 프로모션을 통해 집중적으로 시장을 공략하는 경영의 원칙들 말입니다. 갤럭시 시리즈가 10개월 주기로 출시되는 것, 그리고 이번에 갤럭시 노트 8을 8월경에 출시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1년 주기로 출시되는 아이폰과 경쟁하기 위함이란 얘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요. 말 그대로 속도전입니다.
삼십육계
책은 강의록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구어체와 존댓말을 써서 생생한 강의를 듣는 것처럼 느껴지죠. 위에서 제가 당 태종과 위징과의 일화를 소개해 드린 것처럼, 짤막한 일화나 책의 일구를 소개하고, 그 함의를 전달하지요. 읽기 편하다는 건 책이 갖기 힘든 정말 좋은 미덕이지요.
책의 가장 하이라이트라 할 부분은 후반부의 ‘삼십육계’ 부분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왔던 지략의 집대성이죠. 개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그 서른여섯 번째 계책, 삼십육계 줄행랑…이 아니고 주위 상(走爲上)입니다. 잘 도망치는 것이 상책인 경우 말이죠.
때로는 우스갯소리처럼 사용되는 주위 상입니다만, 사실 잘 도망치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인 경우는 많습니다. 다이나모 작전, 혹 됭케르크 철수 작전이라 불리는 30만 영국군/프랑스군 철수 작전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책이 소개하는 이야기보다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면…
독일군의 전면 침공으로 포화에 휩싸인 서부전선, 독일군은 항구도시 됭케르크를 비롯한 주위 도시를 중심으로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였습니다. 영국은 대규모 철수 작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죠. 철수를 위해선 선박이 필요했고, 영국은 선박 징집에 나섰습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국에서는 10대 학생들까지 선박 징집에 호응하며 영국 정부가 원한 것보다 너무 많은(!) 선박이 모였습니다. 영국 공군은 100대가 넘는 전투기를 희생시키며 이들을 엄호했고,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가장 많은 33만 8,000명의 병력이 철수에 성공합니다.
이 철수 작전은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영국군의 사기를 충천시켰습니다. 독일에 패배해 본토로 도망친 게 아니라, 위대한 영웅들이 33만 명이나 돌아온 겁니다. 이는 연합군 반격의 선봉이 되죠.
주위 상은 일견 우스워 보이기도 합니다만, 가장 실현하기 힘든 전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철수가 가장 위대한 선봉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법입니다. 결국 이 전쟁은 쾌속으로 전진하던 독일군이 아니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거든요.
권모술수를 넘어
현대 사회는 몹시도 복잡합니다. 권모술수가 난무하죠. ‘군주론’으로 대표되는 마키아벨리즘은 더 이상 비난거리가 아닙니다. ‘정무적 판단’ ‘정략적 사고’가 당연시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박근혜는 사정 기관을 동원한 정무적 판단, 정략적 사고의 대가였습니다. 박정희라는 강력한 후광이 있었던 만큼 웬만해선 무너지지 않을 강력한 지지층까지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아주 오래된 가르침을 무시했기에 무너졌습니다. 충언을 중시할 것. 군주가 배라면 민심은 물이란 걸 명심할 것. 이런 단순한 것들이죠.
아주 자주, 우리는 당연한 원칙을 잊어버림으로써 실패합니다. 새로운 기술이 기존의 모든 지혜를 대체할 것처럼 이야기하죠. 하지만 그건 오히려 사기, 기만일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 우리는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문화에 젖어 가장 고전적인 가르침을 잊고 경거망동하게 됩니다.
아주 많은 경우에, 정답은 생각보다 쉽고 근본적인 곳에 있는 법이죠. 늘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이 책이 일깨워주는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고요. 이 책은 머리말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흡수할수록, 우리의 정신적인 이해 능력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가 떨지 않기를 바란다면, 위험이 닥치기 전에 그를 가르쳐라.”
세네카의 말입니다. 리더십과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 인간 경영에 대한 지혜는 한순간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이야기와 지침을 받아들이며 아주 조금씩 연마되는 것이죠.
이 책이 제게 그러했듯이, 여러분에게도 절차탁마의 도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책은 특히나, 그 절차탁마, ‘공부’라는 과정을 무척 효율적으로 가능케 해 주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