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곳에 계시네요.”
회사 위치가 서촌이라고 하면 항상 듣는 말입니다. 서촌은 피곤한 아침 출근길을 조금은 즐겁게 만들어주는 동네였습니다. 점심시간에는 한옥으로 둘러싸인 고즈넉한 골목길을 산책할 수 있고, 눈이 오면 추위에도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
늘 곁에 두고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는데, 슬로워크는 6월 26일부터 서촌이 아닌 성수동 헤이그라운드로 터를 옮겼습니다. 물론 어딜 가도 그곳에 정착하면 익숙해지겠지만 좋아했던 서촌을 떠나는 것이 당장은 너무 아쉽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뽑아보았습니다. 서촌을 떠나기 아쉽게 만드는, 슬로워커가 사랑한 작은 가게들. 모두 특색 있고 각자의 이야기가 담겨 어느 한 곳을 선정하기가 어려웠지만 식당, 카페, 편집숍 세 분류로 나눠 투표해보았습니다. 투표에는 총 20여 명의 슬로워커가 참여해 주었습니다.
식당 부문
공동 3위: 청하식당
슬로워크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청하식당은 가장 가까운 식당임에도 엄청 자주 가진 않습니다. 점심 이후에 바로 미팅이 있어 빠르게 식사를 마쳐야 하거나 비가 쏟아져 멀리 가기 귀찮은 날 주로 가는 곳인데요, 그렇다고 해서 맛이 없는 식당은 결코 아닙니다. 밑반찬도 늘 다양하고 제육볶음, 부대찌개, 청국장 등 웬만한 한식 메뉴를 다 맛볼 수 있습니다.
슬로워크에 처음 방문하는 분들이 길을 못 찾아 전화를 주시면, 늘 “혹시 청하식당 보이세요?”라고 할 정도로 이정표 역할을 해주었던 정감 있는 청하식당. 서촌을 떠나기 아쉽게 만드는 가게, 3위에 뽑혔습니다.
공동 3위: 효자동 초밥
항상 긴 줄을 자랑하는 효자동 초밥은 가성비 갑 초밥집입니다. 엄청난 고급 초밥집은 아니지만 1만 원이면 다양한 모듬초밥 한 접시를 맛볼 수 있고, 회덮밥은 비비기 힘들 정도로 푸짐하고 맛도 훌륭합니다. 성수동에도 적당한 가격의 맛있는 초밥집이 있길 기대해봅니다.
공동 3위: 아로이타이
서촌에는 꽤 다양한 맛집이 있습니다. 유독 쌀국수집이 없어 아쉬웠는데요. 2년 전 드디어 문을 열었던 쌀국수집 아로이타이가 3위에 뽑혔습니다. 서촌 유명 맛집은 아니지만 경복궁역 주변 직장인들에게 사랑받는 곳입니다.
원래 핫플레이스보다 현지인이 가는 곳이야말로 맛집이듯 아로이타이는 모든 메뉴가 골고루 맛있습니다. 여러 명이 함께 갈 경우 쌀국수, 팟타이, 아로이볶음밥 등 여러 메뉴를 주문하여 나눠 먹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2위: 고희
카페와 식사를 겸하고 있는 고희는 가격대가 조금 있어서 주로 팀회식 장소로 애용하던 식당입니다. 2위로 뽑혔네요! 함박 스테이크, 해산물 떡볶이, 토마토 스튜, 새우커리 등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메뉴들이 하나하나 아주 정성껏 만들어져 나옵니다. 특히 떡볶이 위에 올라간 실한 주꾸미와 새우, 감기에 걸렸을 때 먹었던 따뜻한 토마토 스튜는 잊히지 않네요.
1위: 공기식당
짝짝짝! 처음 설문을 공유하면서 이미 예상했지만, 역시나 압도적인 표 차로 공기식당이 1위를 차지했습니다. 공기식당에 가면 항상 다른 테이블에 앉은 슬로워커를 만날 수 있어 비공식 사내 식당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곳입니다.
주메뉴인 카레와 함께 매일 다른 정식 메뉴를 맛볼 수 있는데요. 치킨 요리, 두부 요리 등 일본식 메뉴가 나오고, 정말 매일 맛있습니다. 카레 조금과 정식 메뉴 두 가지를 다 먹을 수 있는 혼밥 정식이 눈앞에 놓이면 ‘아, 이런 게 행복이구나’ 싶고요.
서촌 골목 깊숙이 자리한 식당이지만 날이 갈수록 손님이 늘어 혼자 음식을 만드시는 사장님이 너무 힘드실까 조금 걱정입니다. 그렇게 바쁜 사장님께서 슬로워커를 위해 지난 금요일 깜짝 송별회까지 열어주셨어요. 감동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식당 또 있을까요.
카페 부문
3위: mk2
카페 mk2는 슬로워크와 같은 골목에 위치한 서촌의 오래된 카페입니다. 그런데 오래된 카페 같지 않게 꽤 트렌디한 곳입니다. mk2를 뽑은 어느 슬로워커의 의견 중에도 mk2는 힙스터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조금 부담스럽다는 내용이 있었죠.
유럽의 빈티지 가구와 조명들로 채워진 카페는 가끔 들를 때마다 내부의 가구 배치가 바뀌어 전시 공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시각적인 즐거움을 줄 뿐 아니라 음료와 케익 맛도 좋은 흔치 않은 카페입니다. 특히 당근케익이 맛있습니다.
2위: 스타벅스 경복궁역점
사실 예쁘고 독특한 카페보다도 평소에 가장 많이 들르는 카페는 스타벅스입니다… 특히나 성수동에는 아직 스벅이 없다고 해서 많은 슬로워크가 스벅을 뽑아주셨어요. 그치만 스벅은 서촌에만 있는 카페가 아니므로… 패스하겠습니다.
1위: 통인동 커피공방
통인동 커피공방 역시 서촌에서 오랫동안 자리한 카페입니다. 처음엔 아주 작은 가게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대로변에 꽤 크게 자리하고 있죠. 직접 로스팅을 한 다양한 종류의 커피 원두와 각종 커피 장비를 저렴한 가격에 판매합니다. 커피공방은 여느 다른 카페와는 조금 다릅니다. 길을 가다 갑작스럽게 비가 오면 우산을 빌려주기도 하고, 노동절에는 휴업하며, 그 전날에는 커피를 무료로 나눠줍니다.
커피공방을 뽑은 슬로워커의 제보에 따르면 지난 촛불 집회 때 시민들에게 물과 화장실도 제공해주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무엇보다 적립금이 많이 쌓여 금세 무료 음료를 마실 수도 있고요. 성수동에도 핫한 카페가 많다는데 커피공방처럼 사람 냄새 나는 곳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편집숍 부문
2위: 가든하다
식물을 파는 가게 가든하다는 슬로워크와 인연이 있는 곳인데요. 주로 다육식물을 판매하며, 유리그릇 속에 식물을 심어 작은 정원을 꾸며보는 테라리움을 통해 식물 키우는 재미를 알게 해 줍니다. 키우던 식물에 문제가 생기면 찾아가 질문하기도 하고, 꼭 구매하지 않아도 가끔 들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가게입니다. 화분에 얹을 피규어를 고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1위: 마켓엠
마켓엠은 가구, 소품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편집숍입니다. 나무 소재의 자체 제작 제품과 마켓엠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해외 브랜드의 제품들을 셀렉하여 판매하고 있는데요. 하나하나 갖고 싶지 않은 물건이 없습니다. 작은 명함꽂이, 노트 같은 소소한 물건들을 구매하는 것만으로도 소비 욕구를 채워주는 곳입니다.
에필로그: 공기식당 송별회
저녁 영업도 포기하시고 공기식당 사장님이 마련해주신 송별회. 들어가기 전부터 설렜습니다.
하나하나 너무 맛있는 음식들 덕분에 행복했던 마음을 담아, 사장님께 상장과 롤링페이퍼를 전달하며 송별회를 마무리하였습니다.
너무 많이 알려져 이제 새로운 가게들도 들어서고 변화를 맞이한 서촌이지만 여전히 낮은 건물들과 이곳을 오랫동안 지킨 가게들이 어우러져 정감 있는 풍경을 만들어내는 동네입니다. 서촌이어서 행복했습니다. 아듀-서촌.
원문: 슬로워크 / 필자: 박영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