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단체, 독재자 미화 우려해 발행 중지 요구
기어코 우정사업본부에서는 올 9월에 ‘박정희 100년 기념 우표’를 발행할 모양이다. 지난해 4월, ‘박정희 100년 사업’에 골몰해 온 구미시는 우정사업본부에 이 우표의 발행을 요청했고, 우정사업본부는 5월에 우표발행심의위원회를 열어 이의 발행을 결정했다.
우정사업본부는 오는 30일까지 우표 디자인 도안을 마무리하고, 7월 10일 인쇄 발주를 거쳐 9월 15일 ‘박정희 100년 기념 우표’ 총 60만 장을 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에 구미 YMCA, 구미참여연대, 민주노총 구미지부, 어린이도서연구회 구미지회, 전교조 구미지회, 참교육학부모회 구미지회 등 구미지역 시민사회단체(아래 시민단체)들은 14일, 연명으로 우정사업본부에 ‘박정희 기념 우표’의 발행 계획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시민단체들은 박정희 우표의 발행이 구미시민들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중지를 요청해 온 ‘박정희 100년 사업’의 일부로 시민의 동의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 또 ‘정치적·종교적·학술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의 경우 기념 우표를 발행할 수 없다’는 ‘우표류 발행업무 처리 세칙’에 주목한다.
구미 시민단체들, 박정희 우표 발행 중지 요구
시민단체는 박정희가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를 유린한 ‘독재자’라는 평가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므로 이를 무시한 ‘우표발행심의위원회’의 결정은 무효라고 지적한다.
우표발행심의위원회가 박정희 우표 발행을 결정하던 회의에서는 정작 안건에 올라간 『백범일지』 기념 우표는 발행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우표발행심의위가 『백범일지』나 백범 김구는 논쟁의 소지가 있어서 그렇게 결정했다면 박정희 우표를 발행하기로 하면서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을 의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위대한 인물의 ‘탄생 100년’을 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올해는 박정희(1917~1979)뿐 아니라 음악가 윤이상(1917~1995)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 위대한 음악가의 탄생을 기리는 행사로는 ‘2017 통영국제음악제’가 베풀어진 게 다였다.
올해는 또 우리 국민의 애송시 ‘서시’나 ‘별 헤는 밤’의 시인 윤동주(1917~1945)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 일제에 저항하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다 숨졌을 때, 시인은 스물일곱 살이었다. 같은 시기에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일왕을 위해 군인이 되었던 박정희의 100주년 기념 우표를 발행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럼 윤동주는?’이라고 반문한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들은 동시대를 살아갔던 두 청년의 엇갈린 삶과 그 무게를 새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국민의 혈세로 수십, 수백억 원의 예산을 들여 심복인 정보부장에게 피살된 독재자의 100년을 기념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까. 구미시와 경상북도가 추진하는 ‘박정희 100년 사업’은 이미 지역에서부터 숱한 반발에 부딪히고 있으며 뜻있는 국민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독재자 미화 · 우상화 우려
사람들이 이 사업에 반발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이 사업이 독재자를 미화, 우상화하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구미지역에서만 박정희 사업에 투입된 예산은 수백억을 웃돈다. 총예산 870억짜리 새마을 테마공원은 지금도 공사 중이다. [관련 글 : 여론 ‘모르쇠’한 구미시, 내년도 박정희 예산 대폭 늘렸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전두환, 두 전임 대통령은 취임 기념 우표와 함께 해외 순방 등 대외활동을 홍보하는 우표를 펴냈고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는 취임 기념 우표만 발행됐다. 대통령의 태어난 날을 기념해 발행된 우표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임 중 두 차례밖에 없었다고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는 밝혀질 만큼 밝혀졌다. 그 역사적 평가가 아직 정리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박정희 신화’를 신봉하는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기 때문이다. 탄핵당해 감옥에 갇힌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극은 어쩌면 신화와 현실의 경계를 놓친 주권자들의 정치적 선택의 결과 때문인지도 모른다.
구미시가 발행 중지를 요청하지 않는 한, 또는 우표발행심의위원회가 여론을 살펴 우표 발행을 취소하지 않는 한 석 달 후에 우리는 ‘박정희 100년 기념 우표’를 만나게 될 것이다. 국민의 동의와 무관하게 뜬금없이 발행된 우표는 호사가들의 수집 취미를 자극할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의 동의 없는 이 우표의 발행은 여전히 구시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민낯을 드러내는 일임은 분명하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