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5일, 북한의 수도 평양에서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남북 정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만나 이틀간(6.13~15.)의 회담 끝에 이루어낸 값진 결실이었다.
반세기만의 만남, 평화와 통일의 논의
한민족이면서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데는 무려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남북의 정상이 만나게 된 것은 분단의 질곡을 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념’ 아닌 ‘민족 동질성’이란 점을 확인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2년 만에 만난 남과 북의 최고 당국자들이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평화’와 ‘통일’을 위해 공동 노력하자는 합의에 이른 것은 그것 자체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전쟁 발발의 위험성을 배제할 수 없는 한반도의 두 당사자들이 ‘평화’를 합창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단에 따른 냉전이 지속되던 시기에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 김일성과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합의하게 한 7·4 남북공동성명이었다.
이 공동성명은 국제적 데탕트 분위기와 주한미군 철수선언, 군비경쟁 축소를 제창하였으나 이후 통일논의를 통해 남북 양측이 자국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이용되었다. 남한은 3개월 뒤에 유신을 단행하여 영구 집권에 들어갔고, 북에서도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여 주체사상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듬해인 1973년 6월 23일, 박정희는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 이른바 ‘6·23 선언’을 발표하여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문호 개방 등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정작 남북한이 UN에 동시 가입하게 된 것은 18년 뒤인 1991년이었다.
노태우 정부 때인 1991년, 제46차 유엔총회(9. 17.) 결의 제1호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결의 제1호는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라는 제3차 유엔총회 결의 제293호를 번복하고, 대한민국은 휴전선 이남의 남한 정부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휴전선 이북의 북한 정부라고 입장을 변경한 것이었다.
유엔 동시 가입을 배경으로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남북한 상호 체제인정과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하였다. 이는 공산권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노태우 정부의 이른바 ‘북방외교’ 정책의 결과이기도 했다.
7·4공동성명에서 ’10·4선언’까지
그러나 이러한 합의와 선언 등은 국가수반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긴 했지만 직접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평양을 방문하여 이틀간의 회담 끝에 통일 문제를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등 5가지 원칙에 합의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6·15선언은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되 남측의 ‘연합 단계’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 안’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같은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남측의 ‘남북연합’은 국방 및 외교권은 남북이 각각 소유하는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였던 반면, 북측의 ‘느슨한 연방제’는 ‘1민족 2체제 2정부’는 같으나 ‘1국가’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 달랐지만 남북한의 체제공존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체제공존과 교류·협력 천명한 남북공동선언
또 선언은 가족, 친척방문단 교환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로 하고, 남북 경제 협력으로 민족 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꾀하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공동 선언 말미에 있듯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의 서울 방문은 국제 정세의 급변 등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남북공동선언은 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2000), 경의·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착공(2002)을 거쳐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차 남북정상회담(2007)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서해교전(2002), 1차 핵실험(2006)에도 이어지던 남북 교류는 2008년 금강산 관광객이 피격 사망한 사건 이후 급속하게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북한의 핵 실험은 2009년 이후 5차에 걸쳐 이어졌고, 마침내 2016년 2월에는 남북 경제협력의 상징이었던 개성공단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2차례 이루어진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인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각각 2009년에,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끌어낸 남북공동선언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2007. 10. 4.)은 모두 한반도에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남북 교류와 화해를 지향한 적극적 대북정책이었다. ‘햇볕정책’이라 불리는 이 공존과 평화를 위한 대담한 정책은 그러나 뒤이은 보수 정권에 의해 단절되면서 남북 관계는 2000년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보수 정권 때 단절된 햇볕정책, 새 정부에서 이어질 듯
햇볕정책과 대북포용정책을 계승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는 민주당의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다시 잊히고 있었던 6·15선언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비록 잇따른 핵실험으로 남북관계는 막혀 있긴 하지만 새 정부는 민간 교류를 시작으로 관계 회복의 기회를 모색할 듯하다.
남북의 대립으로 인한 긴장이 끊이지 않았던 한반도에서 남북 정상은 ‘민족 동질성’에 기반한 ‘통일 원칙’과 ‘교류 협력’이라는 통 큰 합의를 이뤄내자 세계는 반색하며 박수를 보냈다. 미국의 AP통신이 선정한 ‘2000년 세계 10대 뉴스’ 가운데 남북정상회담은 5위를 차지하였다.
노벨평화상, 화해에 평화에 주어진 세계의 상찬
김대중 대통령은 1948년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한 정상이 처음으로 만난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켰다. 그리고 전 생애에 걸쳐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민주주의 발전에 헌신해 온 공로로 그는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한반도의 화해를 추진하기 위한 끈기 있는 노력으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에게 돌아간 노벨평화상은 암흑 속의 한 줄기 소망의 빛이다.”
– 더 타임스 사설 (2000. 10. 14.) 중에서
6·15선언은 말할 것도 없고, 노벨평화상 수상을 두고도 이 나라 국민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북한에 퍼주기’와 ‘노벨상 로비’를 통해 상을 받았다며 아직도 그의 대담한 선언과 업적을 조롱하고 폄훼하는 세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00년 6월 15일에 이루어진 남북정상의 공동선언이 냉전 반세기를 끊고 새로운 민족 화해의 길에 대한 7천만 겨레의 의지를 확인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것은 또 한편으로 지난 9년간 북의 공세를 빌미로 남북 관계를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데 그친 보수 정권의 무능과 직무유기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