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13일 10시 45분,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소재 지방도 제56호선에서 주한 미군 보병 2사단 대대 전투력 훈련을 위해 이동 중이던 부교 운반용 장갑차에 깔려 여자 중학생 두 명이 현장에서 숨졌다.
그날은 목요일로 지방 자치단체장 선거 날이었다. 당시 조양중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던 열네 살 난 두 여학생 신효순, 심미선은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가기 위해 인도의 구분이 없던 지방도로의 갓길을 걷던 중이었다. 두 여학생은 목적지를 300여 미터 앞두고 변을 당했는데 다음날은 효순이의 생일이었다.
주목받지 못한 죽음, 묻지 않은 책임
사고를 낸 경기도 파주시 캠프 하우즈 미2사단 44공병대대 소속의 운전병 워커 마크 병장,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은 ‘굽은 도로였고, 브레이크를 밟았으나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피치 못할 사고’였다는 것이었다.
때는 2002 월드컵 경기(5. 31.~6. 30.)로 온 나라가 들떠 있었던 때였다. 폴란드를 꺾고, 미국과 비긴 한국 대표팀은 다음날인 14일의 포르투갈전을 치를 예정이었고, 뜻밖의 선전에 국민은 잔뜩 고양되어 있었다. 또 당일은 지방선거일이었다.
그래서일까, 소녀들의 죽음은 몇몇 진보언론 외에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심지어 유력 보수 언론은 이 사고를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 : ‘미선이·효순이는 정말 ‘교통사고’로 희생된 것이었나‘ 참고)
사고 이후 유족들은 “사고 차량의 너비가 도로 폭보다 넓은 데다 마주오던 차량과 무리하게 교행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고는 이미 예견된 살인행위였다”라고 주장했다. 사고가 난 도로는 인도가 따로 없는 편도 1차선의 좁은 도로로, 주민들은 평소 갓길을 인도삼아 통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당일, 미8군 사령관은 유감 성명을 발표하고 다음날에는 2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위로금을 전했고 가해 병사들을 ‘과실치사’ 혐의로 미 군사법원에 기소했다. 한국정부도 유족에게 배상금 지급을 결정하고 미군 측에 1차적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다. (자세한 내용은 ‘사건일지’와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누리집 참조)
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미국은 미 태평양 사령관과 국무부 국제안보차관이 국무장관을 대신해 사과했다. 그러나 미군은 한국정부의 1차 재판권 포기 요청을 거부했고, 군사 법정은 두 가해 사병에게 무죄를 평결했다. 여론이 다시 들끓자, 대통령 부시는 미국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유감을 표명해야 했다.
여중생 범대위는 미국에 대표단을 파견해 항의 시위를 벌였고 12월에는 전국에서 약 10만여 명 집결한 최대 규모의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실체적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사고의 책임은 물어지지 않았다. 이후 해마다 두 학생의 기일이 추모제가 베풀어지는 것 외에 이 사건은 잊혀갔다.
뒤늦게 미군 당국이 무죄 평결 직전 사고 차량 소속 중대장, 중대 선임하사, 소대장, 소대 선임하사 등 훈련 지휘관 4명에게 견책의 징계를 한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유족들의 슬픔은 물론, 국민의 분노를 달랠 수 없었다.
정말 ‘피치 못할 사고’였나
미군 측이 ‘사고’로 처리하고 넘어가려 했던 비극이 ‘사건’으로 비화했던 것은 사고의 진상을 은폐하려 했던 미군의 오만한 태도를 통해서 주둔 미군 범죄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재판권 등 한미 양국 동맹에서 늘 불평등한 지위를 감내해야 했던 현실이 새삼 환기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군은 자체 조사 뒤 관제병이 30m 앞에서 여중생을 발견하고 운전병에게 정지 명령을 내렸지만, 소음으로 듣지 못했으며 사고 당시 운전병은 지휘부와 무선교선을 하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또 주민들에게 훈련 사실을 미리 알렸다고 했지만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현실적으로 가해 미군 병사가 의도적으로 살인을 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이들이 피할 수 있었던 사고를 방치한 혐의, 이를테면 사고엔 ‘미필적 고의’가 개입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차병 출신의 한 전역 군인이 미군 병사들의 관련 변명을 조목조목 반박한 것은 쉽사리 배제할 수 없는 그 미필적 고의의 증거가 될지도 모르겠다. (관련 글 : ‘전차병이 바라본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 사건’)
그리고 어느 새 15년이 흘렀다. 올해는 신효순·심미선 양의 추모비와 평화공원이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사고 현장에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을 만든 김운성·김서경 작가가 공동 제작한 미선·효순 추모비 ‘소녀의 꿈’은 2012년 10주기 때 시민단체와 600여 명 시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
15주기, 추모비와 평화공원 조성 예정
그러나 사고 현장에 세울 부지를 마련하지 못해 추모 행사 때마다 트럭에 실려 다녀야 했던 ‘소녀의 꿈’은 5년 만에야 겨우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규명되지 못한 사건의 진상과 함께 두 소녀의 죽음으로도 환기되지 못한 이 나라의 상처 입은 자존처럼 보인다.
“푸르러 서글픈 유월의 언덕
애처로이 스러진 미선아, 효순아
손에 손 촛불 횃불로 타오를 때
너희 꿈 바람 실려 피어나리니.”
– 추모비 ‘소녀의 꿈’ 전문
지난 1일, 사고를 낸 미군 2사단이 소재하고 있는 의정부시는 주민들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수억 원을 들여 ‘주한미군 2사단 창설 100주년 기념 콘서트’를 강행했다. 그러나 ‘우정을 넘어선 미래를 위한 약속’(The next movement)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 콘서트는 초대가수들의 공연 거부로 파행을 겪었다.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 15주기를 사흘 앞둔 추모 주간에 미군을 위한 거액의 예산을 들여 호사스러운 축제를 기획하는 의정부시의 행태는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한미관계의 일단을 잘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가 될지 모르겠다.
늘 검은 띠를 두른 영정사진으로만 만나는 두 여학생의 사진에서 검은 띠를 떼고, 지난 2010년 8주기 때 연주된 추모곡, ‘약속, 우리 촛불이 되자’를 듣는다. 민중노래 작곡가 윤민석이 곡을 쓰고, 윤민석과 우위영 외 여러 사람이 노랫말을 붙인 노래를 들으면서 사드(THAAD) 배치를 두고 미묘한 기류를 보이고 있는 2017년의 한미관계를 다시 생각해 본다. (관련 글 : 효순·미선이 8주기, 역사는 바래고 노래는 남는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