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 새끼들과 북괴 놈들
이태 전인 2015년으로 기억된다. 창원동읍농협 김순재 전 조합장을 만난 적이 있다. 주남저수지 일대에 남아 있는 역사문화유적을 알아보는 과정에서였다. 무슨 말끝에 김순재 선수가 이런 말씀을 했다.
“김해에 이북면이 있었어예. 와, 북한을 이북이라 한다 아입니꺼. 그래서 사람들이 ‘이북 새끼들 다 나쁜 놈들이야’ 하는 식으로 말하다 보이 느낌이 좋지 않다 캐서 이름을 바깠다 아입니꺼.”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북초등학교’를 본 기억이 났다. 김해시 한림면에 있는데 진영 쪽에서 화포천습지생태공원전시관으로 가다 보면 오른편에 나온다. 그래 “아, 이북초등학교는 본 적이 있어예.” 했더니 김순재 선수는 나를 쓱 한 번 보더니 다른 말을 이어갔다.
“북계리도 있었어예. 백월산 쪽에 있는데, 백월산 북쪽 골짜기라서 그래 이름이 된 모양이지, 그것도 이름을 바깠어예. ‘북계 놈들은 다 때려잡아야 돼!’ 이런 말들이 막 나와서예.”
그것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알겠지만 우리 어릴 때는 ‘북한’을 그냥 ‘북한’이라 하지 않고 ‘북한 괴뢰’라 했으며 이를 줄여 ‘북괴’라 했다. ‘괴뢰(傀儡)’는 남의 말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라는 뜻이지만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우리는 그냥 무턱대고 ‘북괴’라 했다.
‘북괴’와 ‘북계’는 발음이 비슷하다. 경상도는 특히 더 그렇다. ‘북괴’도 ‘북께’고 ‘북계’도 ‘북께’다. 그러니까 북계 사람들은 영판 북괴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때 나는 남북 대결 반공냉전이데올로기가 지명까지 바꾸었구나, 생각을 했었다.
이북면을 한림면으로
그러고는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 화포천 답사를 하면서 다시 생각이 났다. 화포천 가는 길에 다시 ‘이북초등학교’를 보았던 것이다. 호기심이 일어서 한림면사무소 홈페이지를 찾아보았다.
고려시대 후기부터 하북면으로 명명되어 왔었고, 그 이후 조선시대 말 1896년에 상북면(上北面)과 하북면(下北面)으로 분리되었으나, 1914년 다시 병합하여 이북면(二北面)이 되었다. 이북면은 북쪽에 위치한 두 개의 면이 합하였다고 붙여진 이름인데 이북이란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하여 1987년에 한림면(翰林面)으로 개칭하여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림이란 명칭은 중심마을인 한림정에서 따온 이름이다.
말하자면 상북과 하북 이렇게 북(北)이 두(二) 개 있으니 이북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북초등학교는 옛적 그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화석 같은 존재가 되겠다.
내친김에 조선시대 지리서적인 <신증동국여지승람>까지 검색해 보았다.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에서 ‘방면’ 조를 찾아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중북(中北)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하북(下北) 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이다.
한림면사무소 홈페이지의 상북과 하북이 여기서는 중북과 하북으로 되어 있을 뿐 북이 둘인 것은 다르지 않았다. 이런 유래를 가진 이북면이 그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하여’ 족보도 없는 한림면으로 바뀐 셈이다.
북계리를 월계리로
이왕 시작한 김에 북계리도 찾아보았으나 잘 찾기지 않았다. 창원 북면사무소 홈페이지에서 ‘북계리’ 지명을 확인할 수는 있었으나 어디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북면은 …… 다시 1914년 국면 폐합시 동면의 북계리 일부를 합쳐 창원군 북면이라고 하고 18개리로 개편 관할하게 됨.
그러다 우연하게 <창원디지털문화대전>에서 지금 월계리(月桂里)가 옛날 북계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월계리의 옛 명칭인 북계리는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처음으로 나오며, 당시 동면(東面) 삼운(三運)에 속해 있었다. <영남읍지(嶺南邑誌)>에는 북계리(北溪里)라는 표기로 등장한다. ……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본포리 일부와 북면 마산리·하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고 북계리라 하여 창원군에 편입하였다. …… 1987년 월계리로 명칭이 변경되어 동면에서 북면으로 이속되었다.
김해에 있던 이북면이 한림면으로 바뀌던 1987년에 북계리도 월계리로 이름을 바꾸었던 것이다. 한림면사무소 홈페이지가 ‘발음이 자연스럽지 못하여’라고 에둘러 한 표현은 이북면뿐 아니라 북계리가 이름을 바꾼 이유도 된다.
무장이를 무장공비로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어린 시절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1972년 국민학교 3학년 때 이름이 김무장인 친구가 있었다. 무장이는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키가 작았는데 집안이 가난했는지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았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무장이를 시도 때도 없이 놀려먹었고 어떤 때는 군중심리에 사로잡혀 집단으로 때리기까지 하였다. 선생님들도 그때는 철이 제대로 들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지 심심하면 이 친구를 놀림감으로 삼았었다.
이름자 ‘무장’이 ‘무장공비’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무장이는 늘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구석진 데만 찾아다녔다. 그러면 그게 ‘북괴 무장공비’ 하고 똑같다면서 더욱 놀리고 괴롭혔다. (실제로 무장공비라고는 본 적도 없으면서)
지금도 계속되는 끔찍함
누군가는 장난으로 그랬을 수 있지만 이북면 사람들은 괴로웠을 것이다. 누군가는 심심풀이로 그랬을 수 있지만 북계리 사람들은 싫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놀리고 때렸지만 무장이는 학교에 오는 것 자체가 끔찍했을 것이다.
지난 시절 우리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감옥에 모두 갇혀 있었던 것 같다. 남북 분단·대결과 냉전반공이데올로기가 더없이 사소한 이런 따위 지명이나 인명에 대한 상상력까지 짓밟고 이웃과 동료조차 무시하고 멸시하게 했다.
평화가 아닌 대결이, 통일이 아닌 분단이, 포용이 아닌 냉전이 민족의 살길이라고 지배집단이 쉴 새 없이 윽박지르고 속여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누구든지 실제 감옥에 처넣는 짓까지 서슴없이 저지른 지배집단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끔찍함이 어리면 어린 대로 나이가 들었으면 나이가 든 대로 곳곳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해서 그 끔찍함이 완전히 끝났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그렇지 못하니 이게 어쩌면 더 끔찍하다.
원문: 지역에서 본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