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치사에 ‘바보’라는 별명을 가진 정치인이 있었습니다. ‘바보 노무현’입니다. 안 될 줄 뻔히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덤벼들었던 정치인, 불의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자기 갈 길을 가던 정치인.
‘바보 노무현’이 정치를 하게 된 과정을 여러 증언을 통해서 알아봅니다.
정치인 노무현입니다
현재 부산·경남은 보수당 지지 지역이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정부에 쓴소리를 하는 야권지역이었습니다. 이 정치 구도가 보수화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군사정권 세력과 3당 합당을 하며 이 지역을 보수당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당 합당 이전의 김영삼은 진보파였습니다. 그가 정치 세계에 등용한 사람이 바로 노무현입니다. 당시 노무현은 인권변호사로의 명성이 퍼져가는 중이었으며, 송기인 신부 등과 함께 힘든 자들을 도와주는 사회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총선이 다가오면서 김영삼은 새로운 인물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송기인 신부가 귀띔했습니다.
“전화가 왔는데, 재야의 인사 중에서 네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거예요. 노무현보고 네가 좀 해보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제가 국회의원 될 생각은 없지만 선거운동은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이러는 거라. ‘댔다, 그럼!’ 말이지….”
송기인 신부가 밝히는 노무현의 정치 데뷔 과정입니다.
노무현은 부산 동구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허삼수와 대결을 하게 되었습니다. 허삼수는 12.12쿠데타에서 전두환을 도와 공을 세운 이후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허삼수는 당시 최고의 실세였으니까… 야 그거 힘들지 않나? 그러니까 대답이, ‘야, 어차피 붙으려면 군사정권 최고 실세하고 한판 승부를 해야지!'”
고교동창 ‘원창희’의 걱정에 대한 노무현의 말입니다. 하지만 거대 골리앗과 작은 다윗의 싸움인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그런 사람이 노무현입니다.
“인권 변호사답게 임했죠. 선거운동 방식도, 유세 내용도 철저하게 그런 방향이었어요. 어찌 보면 굉장히 아마추어적인 선거를 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런데 그걸 통해서 민심이… 지지가 올라가는 게 눈에 보였어요.”
문재인 당시 변호사의 증언입니다.
“예상을 깼죠. 허삼수를 깬다는 것은 전국적인 관심사였죠. 그 당시에.”
문재인과 원창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문재인은 훗날 자신이 대통령에 도전하게 될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5공 청문회 스타 노무현입니다
“부산 동구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노무현입니다. 국무의원 여러분, 저는 성실한 답변을 요구 안 합니다. 성실한 답변을 요구해도 비슷하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신명 나게 일하게 되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은, 적어도 자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1988년 첫 대정부 질의에 나선 노무현의 말입니다.
1988년은 ‘5공 청문회’가 있던 해입니다. 이때 가장 이슈가 된 청문회 스타가 노무현입니다.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정치자금법에 대한 규정도 모르고 어떤 정치자금이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것도 모르는 안전기획부장에게 이 나라의 안전을 맡겼습니까?”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게 말한 노무현의 발언입니다.
“그럼 국민의 비난은 누가 책임질 겁니까! 본 의원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의혹이 엄청나게 남아 있습니다.”
“과거에 힘 좀 있다고 모든 걸 자기 임의로 다 숨겨놓고 밝혀주지 않던 것을 국민들에게 다 밝힐 수 있어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하고…”
청문회의 의미를 정의하는 노무현의 인터뷰입니다. 무자비했던 군사정권의 비리를 국회에서 파헤치는 일은 한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서슬 퍼렇던 권력자에게 호통을 치는 노무현의 인상은 그래서 더욱 강렬했습니다.
잘못을 못 느끼는 그들로 인해 눈물까지 글썽이며 울분을 참던 사람도 노무현입니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부산, 경남을 대표하던 진보세력인 김영삼이 갑자기 보수세력과 손을 잡고 3당 합당을 해 버린 것입니다. 덕분에 나중에 김영삼은 14대 대통령이 됩니다.
“이게 회의입니까?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1990년, 3당 합당을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린 당의 결정에 이렇게 항의하며 반항하던 노무현입니다. 결국 그는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또 온 집안이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왜 안 따라가느냐, 네가 뭐가 잘났다고 안 따라가느냐 뭐 이런 식으로… 남들 다 하는 대로 해야 된다. 그렇게 반대들을 좀 했었죠. 그러나 노무현 의원은, 길이 아니라는 거죠.
‘3당 합당은 야합이지. 내가 이런 거 하려고, 그저 국회의원 되려고 정치하는 거 아니다.'”
변호사 정재성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손해를 알면서도 도전한 노무현입니다
김영삼이 보수당에 들어가자 부산, 경남이 순식간에 변했습니다.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은 진보의원들은 15대 총선에서 낙선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노무현입니다.
“한 10년 동안은 김영삼 대통령을 주축으로 한 그런 기반이나 김대중 대통령의 기반에 확실하게 소속되어 있지 않고 독자를 얘기했기 때문에 손해 보는 보는 단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15대 총선에서 전부 다 떨어진 거죠.”
박계동 전 국회 사무총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노무현은 서울로 올라와서 종로 재보궐 선거에 당선되었습니다. 이제 종로에서 정치 텃밭을 만들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놀랄 선언을 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서 16대 총선에서 영남, 그중에서도 부산, 경남에서 출마할 결심을 밝혀 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 최대의 과제인 지역갈등을 해소하고 동서화합과 화해를 이루려고 합니다.”
갑자기 부산 총선 출마 선언을 한 것입니다.
“왜 이러실까? 그 날 저녁에 소주를 한 잔 먹고 집에 들어가는 중에 대문 앞에서 제가 울었어요. 아, 너무 힘들고 대통령(당시 국회의원) 하시는 게 너무 이해가 안 되고….”
당시 노무현의 보좌관이었던 송인배는 그 심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의 밤에 찾아가 가지고, 나는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말이 되느냐, 거기 가면 될 줄 아느냐…”
강보현 변호사가 말렸지만, 이미 노무현은 지역감정을 깨려는 확고한 결심을 세운 뒤였습니다.
“피하고 싶었죠. 2000년 4.15 총선 때도 부산에 내려갈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그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하고 내려간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열심히 선거에 임했고, 기죽지 않고 열심히 임했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노무현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권이 독재하든 말든 경상도 당이면 무조건 그 당만 찍어주는 현실을 지난 선거에서 여실히 느꼈고, 그래서 그 벽에 도전하여 지역감정을 깨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한 번만 더 종로에서 하고 싶었어요. 종로에서 한 번만 더 우리 자리를 좀 만들어 가지고, 그다음에 부산에 갔으면 했어요.”
“그만 떨어졌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종로 보궐선거 되시고 나니까 너무너무 기쁘더라고요. 부산을 가신다고 하시니까 정말 솔직히 저는 굉장히 불안했거든요. 그런데 선거운동을 하면서 선거운동도 재미있었어요. 왜냐하면 ‘될 것 같은’ 선거였거든요.”
노무현의 가족 ‘권양숙’과 ‘노연정’의 말입니다. 노무현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바로 노무현입니다.
“초반에는 분위기가 좋았어요. 대통령(당시 국회의원)이 가지고 계신 이미지나 거리를 다니면서 매일 새벽부터 같이 시민들을 만나서 인사하고 그랬을 때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당시 보좌관 송인배의 말처럼, 노무현이라는 인물은 믿음감을 주는 후보였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낙선이 꼭 되어야 우리 ‘부산 죽이기’에 골몰하고 있는 김대중 정권이 정신을 차릴 겁니다.”
당시 보수당 후보 ‘허태열’은 역시나 지역감정을 조장했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무현이 입었습니다.
“차차 깎아 먹더라고요. 그게 악수만 해도 압니다. 손만 잡아도 느낌이 와요. 지는 선거가 4번째였죠. 지는 선거가 정말로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그런 얘기를…”
송인배는 ‘김대중 호남당’이라는 지역감정 때문에 노무현이 선거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결국 인정받은 바보 노무현입니다
“그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당시)이 부산에 출마한다고 해서 우리 한국 정치의 지역구도가 전부 변화하는 것은 아니었죠. 다만 그런 의지를, 타파해 보려는 의지를 가진 정치인이 있다는 것, 그게 국민들에게 좀 각인됐던 것 같습니다. 어떤 하나의 상징이 되어 버렸죠. 그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출마에 일종의 어떤 상징성이 되었고…”
이상돈 교수는 노무현이 떨어질 줄 알면서도 도전한 부산 선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음 부산출마는 절대 안 됩니다. 이번 출마는 다소 명분이 있었지만, 다음 출마는 이번 총선에서 등 돌린 사람들에게 한 표를 구걸하는 식의 이미지만 줄 뿐입니다.”
이때부터 노무현의 정치 팬들이 생겨났습니다. 인터넷의 응원 글에는 ‘바보 노무현’에 대한 답답한 심경이 올라왔습니다.
한국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 ‘노사모’는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기존의 ‘정치인’이라면 거짓말 잘하는 사람이지요. 대통령, 국회의원 그런 거 당선될 때는 뭐든지 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그렇지 않잖아요. 자기 몸보신을 한다고 그러나? 그런 것만 우선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하죠. 그런데 그런 것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기 할 일 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말 대변하는 모습이 좀 다르다… 다른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김성례라는 시민의 말입니다. 한국에서 시민들이 정치를 응원하는 풍토가 나타나게 한 한국 최초의 정치인이 바로 노무현입니다. 한국의 국민참여 정치풍토가 완전히 바뀌는 시점도 이때부터입니다.
“마지막 2000년 선거는 종로에서 당선이 되었는데, 종로가 훨씬 유리한 곳인데 왜 그걸 버리고 부산으로 가냐, 바보. 이렇게 붙여줬죠. 그동안 사람들이 나한테 붙여줬던 별명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별명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사연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돼지 저금통 나누어 주고 돈 보내고 학 접어서 보내고 그랬던 사람들이 지금은 내가 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불안하죠.”
재임 시절의 노무현이 자신을 응원했던 국민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한 말입니다.
노무현의 선거는 국민의 후원금을 모금해서 치렀기 때문에, 과거의 선거보다 깨끗했습니다. 이 또한 새로운 한국의 정치역사입니다.
(※ 이 글은 MBC 방송 인터뷰 내용을 자료로 하고 있습니다)
원문: 키스세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