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갈린 면도날 같은 영화, <더 테러 라이브>
어느 때보다도 냉소가 넘쳐나는 시절이라 그런가, 요즘 비아냥만으로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 ‘비아냥거’들을 탓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을 향한 분노와 좌절이 오래 묵으면 발효해서 냉소가 된다고들 하니까.
영화 ‘더 테러 라이브’는 촘촘한 플롯과 생생한 분노 위에 서 있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차분하게 할 말을 다 하고 있다. 미디어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 약간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감히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 정도로 오늘날의 대중이 느끼는 분노를 잘 만져준다.
오전 9시를 넘긴 시간.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윤영화(하정우)는 얼마 전 모종의 비리 사건으로 인해 마감 뉴스 앵커 자리에서 밀려난 충격을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 청취자와의 전화 연결 코너에 엉뚱한 남자가 전화를 걸어 온다. 그리고 그 남자는 “내가 폭탄을 갖고 있는데, 자꾸 이러면 터뜨리겠다”고 말한다.
짜증스럽게 구는 남자의 태도에 “그래, 터뜨리려면 터뜨려봐!”라고 욕설로 맞받아친 윤영화. 하지만 얼마 뒤, 그는 스튜디오 창문을 통해 마포대교가 정말로 폭발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윤영화는 이 사건이 구겨진 자신의 입지를 다시 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거다. 테러범이 다시 전화를 걸어 올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이를 빌미로 차대은 국장(이경영)에게 자신이 이 상황을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펼친다.
리얼타임에 가깝게 진행되는 이 영화는 사건을 긴박감 넘치게 보여주지만, 실제로 영화가 드나드는 공간은 좁은 라디오 스튜디오와 그 조정실 뿐. 이른바 밀실 서스펜스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본 고전 흑백영화 팬들은 시드니 루멧의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을 떠올린다. 배심원 회의실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12명의 사람들이, 일견 너무나 뻔한 사건에 대한 의견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이 세대를 넘어 수작으로 꼽히는 가장 큰 이유는, 총격전이나 자동차 추격전 같은 거창한 액션 없이 사람들 사이의 대화만으로도 관객이 손에 땀을 쥘 수 있는 스릴을 충분히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더 테러 라이브’의 가장 큰 강점 역시 ‘대화가 주는 긴박감’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사건에 참여한 등장인물들이 모두 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가 주고받는 대화에서 서로의 수 싸움이 제대로 느껴지고, 대화를 통해 실제 판이 뒤집히고 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재난상황을 리얼타임으로 그리고 있는 ‘제7광구’나 ‘타워’같은 영화는 어떨까. 두 영화 모두 폭발음과 화염이 부지런히 터지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씬’을 그리지만, 막상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배우들에게 주어진 대사가 극중 캐릭터의 눈으로 사건을 보고 있지 않고, 그저 뻔하게 상황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
안타깝게도, 한국 영화 가운데 ‘더 테러 라이브’ 수준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해 주는 ‘현장의 대사’가 살아 있었던 작품을 꼽기가 쉽지 않다. (있다면 좀 추천해 주시기 바란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는 ‘분노’에 대한 영화다. ‘내가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누가 과연 나의 편을 들어 줄까’하는 질문은 아마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담아 두고 있을 것. 날이 갈수록 사회 안에서 ‘위쪽과 아래쪽’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 있는데, 이 ‘아래쪽’ 사람들의 공분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다는 점 또한 대단한 강점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에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싶은 개연성 떨어지는 부분이 꽤 있다. 무전 너머로 들리는 “반드시 사살하세요”같은 거, 이건 좀 오버였다. ‘테러범과의 생중계’ 자체가 과연 해도 좋은 일인가에 대한 생각도 해봐야 한다.
‘표현의 자유’의 베프, ‘알 권리’
얼마 전 있었던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의 마포대교 투신 사건 때에도 현장에서 이 장면을 촬영한 방송사 카메라에 대한 비난이 쏟아진 적이 있다. 더 오래 전, 분신한 채 추락하는 사람의 몸에 붙은 불을 끄고 구급차를 부르는 대신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이유로 시민들이 사진 기자를 폭행하는 장면이 외신을 탄 적이 있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일은 왕왕 일어난다. 수단 내전이 한창이던 1993년, 하도 굶어 뼈밖에 안 남은 어린 여자애와 그를 노리는 독수리를 찍은 문제의 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작가 케빈 카터는 “아이를 구할 생각은 없고 사진으로 유명해지겠다는 생각만 있었던 거냐”는 극심한 비난에 시달린다. 결국 그는 1994년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이 사진으로 인한 죄책감이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항상 변명거리처럼 등장하는 것이 ‘대중의 알 권리’다. 기자라면 대중의 알 권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잊혀지기도 하는 거다. 독수리의 먹이가 될 위기에 있는 소녀를 촬영하는 것이나, 테러범과의 대화를 그대로 생방송하는 것은 전혀 다른 사례인 것 같지만 사실은 매우 유사한 사안이다. 둘 다 ‘대중의 알 권리’를 위해 그보다 상위에 놓여야 할 다른 가치들을 무시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극중 윤영화도 테러범과의 전화통화를 생중계하기 직전, 리드 멘트로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테러범과의 대화를 내보낸다고 얘기한다. 스페인 영화 ‘떼시스’에서 방송 앵커가 스너프 필름을 방송하는 이유를 댈 때에도 ‘국민의 알 권리’를 앞세웠었다. 김병우 감독이 꼬집고 싶었던 방송의 행태에 대한 비판은 바로 이 부분에 담겨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힘 있고 돈 있는 사람 편만 드는 방송국’을 욕하지만, 더 걱정해야 할 대상은 바로 ‘시청률이면 무슨 짓이든 다 하려는’ 미디어다.
테러범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로 선택한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테러범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하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과연 방송은 테러범과의 통화 내용을 그대로 내보내도 좋을까.
현실에서 테러를 하기로 마음먹은 진짜 테러리스트라면, 절대 그를 생방송에 출연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말 위험한 메시지를 일반에게 퍼뜨리려는 목적을 가진 자들이라면, 이들의 목소리가 그대로 걸러지지 않고 방송을 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와 유사하게, ‘어쨌든 인질들을 살려야 한다’는 이유로 정부가 테러범과 협상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테러범과 협상하지 않는다’는 해당 방침은 이 영화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그려졌다.)
어쨌든 ‘더 테러 라이브’는 마땅히 ‘올해의 영화’로 꼽힐만한 수작이다. 젊은 김병우 감독이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P.S. 아래는 그냥 웃자는 이야기.
마포대교 폭파 장면. 왼쪽에 63빌딩이 보이는 걸로 보아 이 장면은 마포 쪽에서 여의도 방향을 보고 찍었다. 그런데 잘 보면 63빌딩 옆에 국회의사당이 있고, 마포대교 바로 옆에 있어야 할 쌍둥이 빌딩은 어디로 갔는지 없다.
하정우의 시점상 오른쪽으로 쌍둥이 빌딩의 일부가 보이는 곳에는 사실 방송사가 없다. 위치상 가장 가까운 곳은 MBC지만 그 건물에는 마포대교가 안 보인다. 영화 속 방송국 건물은 IFC 정도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