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노동절 행사, ‘노동이 멈추면 세계도 멈춘다’
1890년 5월 1일은 역사상 첫 번째 메이데이(노동절)였다. 많은 국가의 노동자들은 저마다 자기 나라의 형편에 맞는 형식과 방법으로 메이데이 행사를 벌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는 1일 총파업의 형태로, 독일과 영국에서는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저녁 시간 대중 집회의 형식으로 첫 노동절 행사를 치렀다.
노동자들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며 파업과 시위를 벌이자, 자본가들은 이들의 메이데이 기념 시위가 확산되는 걸 막으려 갖은 애를 썼다. 자본가와 결탁한 국가 권력의 탄압과 방해가 이어졌지만 행사는 멈추어지지 않았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선 5만 명의 노동자가 시위에 참가했고, 폴란드의 바르샤바에선 80만 명이 동맹 파업을 결행했으며, 벨기에에서는 34만 명이 행사에 참가했고, 이탈리아에서는 메이랜드, 토리노 등지에서 수십만 노동자들이 거리를 행진했다.
러시아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정치투쟁이 펼쳐졌고 프랑스 전국 138개 도시와 광산 지역의 노동자들은 일손을 놓고 1871년의 파리코뮌(Paris Commune)의 전통과 경험을 이어 파업·집회·시위를 벌였다.
영국에서는 5월 첫째 일요일에 메이데이 행사를 치렀는데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참관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이 행사의 인상과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중앙위원회의 7개의 연단 주위로 수십만 이상의 노동자가 음악과 깃발에 맞춰 끝이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밀어닥치고, 비슷한 수의 군중이 개별적으로 몰려들어 가세했다.……(메이데이는 ‘신기원을 이루는 사건’으로) 영국의 노동자가 바야흐로 거대한 국제적인 대열에 합세하고, 드리어 오랜 겨울잠에서 깬 차티스트의 후손들이 전투 대열에 들어섰다.”
노동 계급의 각성과 국제 조직
역사상 첫 번째 메이데이가 성대하게 베풀어질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초반부터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진 결과였다.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하면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지만 당시 노동자 계급의 삶은 참혹했다.
노동자의 가족은 판잣집이나 지하실의 구질구질한 방에서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집에서 두 가족 이상이 살기도 했다. 그나마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면 행복한 편이었다. 많은 노동자가 움막 속에서 합숙을 하거나 그것도 모자라 공원의 벤치나 길거리에서 밤을 지내기도 했다. 먹는 것은 형편없었고, 입는 것 역시 누더기였다. 아버지가 받는 쥐꼬리만 한 임금으로 한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젖먹이를 가진 어머니조차도 일터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집에 남은 어린아이는 아무리 울어도 젖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온종일 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들 사이에서는 어린아이가 우는 것을 막기 위해 아편을 넣은 약(팅크)을 먹이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것을 먹이면 위가 마비되므로 어린아이가 배고픈 것을 느끼지 못해 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을 먹이면 체질이 약화되어 어린아이의 사망률이 매우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 아이들은 6~7세가 되면 공장이나 탄광으로 일터를 찾아 나기야만 했다. 특히 탄광의 갱도에서는 말을 이용하여 수레를 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혁대로 자기 몸과 석탄 상자 4, 5개를 실은 수레를 연결해 끌어내는 일을 했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굴속에서 중노동으로 시달리다 보니 발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기형적인 신체를 갖게 되곤 했다. 특히 구루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도 못 가고 바로 공장에 들어가 어른들 틈에 끼어 밤늦게까지 기계 앞에서 씨름하게 되니 몸을 망치게 되는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정상적인 발달이 불가능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1845) 중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기계라고 생각하고 ‘러다이트 운동(Luddite)’을 벌였지만 기계를 부수어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적이 기계가 아니라 자본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영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단결했고 10년 동안의 차티스트(Chartist) 운동을 벌여서 1847년에 10시간 노동법을 쟁취했다. 뒤이어 1856년, 호주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를 따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1864년에는 노동자들의 국제 조직인 제1인터내셔널(First International)이라 불리는 국제노동자협회를 창립했다.
1884년, 미국노동총동맹은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해 1886년 5월 1일에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1886년 5월 1일, 노동자 34만 명이 시가행진을 벌였고, 19만 명이 파업 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이 노동을 멈추자 세상도 멈추었다. 이날 노동자들은 목 놓아 ‘8시간 노동과 8시간 휴식, 8시간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시간’을 노래했다.
우리도 이제 노동일은 않을 테야
일해 봐도 보람도 없는 그런 일은 않을 테야
겨우 연명할 만큼 주면서 생각할 틈도 안 주다니
진절머리가 난다네
우리도 햇볕을 보고 싶다네 꽃 냄새도 맡아보고 싶다네
하나님이 내려주신 축복인데 우린들 아니 볼 수 없다네
우리는 여덟 시간만 일하려네
조선소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점포에서
우리는 힘을 길러 왔다네
우리 이제 여덟 시간만 일하세
여덟 시간은 휴식하고 남은 여덟 시간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보세
- 1886년 5월 1일, 노동자들이 시가행진 때 부른 노래
1886년 헤이마켓 사건
이틀 후 파업 농성 중인 ‘맥코믹(McCormick) 농기계 공장’에 난입한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4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튿날 ‘헤이마켓(Haymarket) 광장’에서 대규모 항의 집회가 벌어졌다. 집회가 끝나갈 무렵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노조 지도자 한 명이 연설을 시작했을 때 180여 명의 기동대원이 들이닥쳐 집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이 ‘평화 집회’라고 항의하는 순간 누군가가 던진 폭탄이 터져 경찰과 노동자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무자비한 경찰의 폭력 진압이 잇따랐다. 이튿날부터 자본가들과 언론은 노동자들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대다수의 주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증거도 없이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제일 먼저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 자본가들이 아니었던가. 놈들에게 본때를 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놈들에게 총알 세례나 퍼부어라” 하고 말한 것은 누구였던가? 펜실베니아 주지사인 톰 스코트가 아니었던가. “놈들에게 흥분제나 먹여 주라”고 말한 것은 누구냐? 《시카고 트리뷴》지가 아니었던가.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5월 4일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들이다. 8시간 노동 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뉴욕에서 특파된 음모자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악랄무도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오.
- 앨버트 파슨스(Albert Parsons)의 최후 진술 중에서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다면 말이다!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뒤에서, 사방팔방에서 불꽃은 꺼질 줄 모르고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는 없으리라.
- 어거스트 스파이스(August Spies)의 최후 진술 중에서
1887년 11월 11일, 시카고 교도소에서 파슨스·스파이즈·피셔·엔젤 등 4명의 노동자에 대한 교수형 공개 집행되었다. 스파이스는 교수대에서 “언젠가 우리의 침묵이 우리를 교살하는 당신들의 명령보다 훨씬 강력해질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들의 시신은 기차 편으로 월드하임 묘지로 향했는데, 20만 명이 거리에 나와 장례 행렬을 지켜보았다. 이후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파슨스 등을 순교자로 기렸다.
1889년에는 파리에서 제2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1890년 5월 1일 “모든 사람, 모든 도시에서 동시적으로, 1일 8시간 노동의 확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대규모 국제적 시위를 조직한다.”고 결의했다. 이듬해인 1890년 5월 1일, 첫 메이데이 행사가 열린 것은 이 결의의 결과였다.
처형된 앨버트 파슨스의 아내 루시는 4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기념물을 세우기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고 1893년 6월에 헤이마켓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바로 그날 일리노이 주지사 존 피터 알트겔드(John Peter Altgeld)는 복역 중이던 필덴 등 3명을 특사로 석방했다.
이 진보 정치인은 “헤이마켓에서 있었던 폭탄 투척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고 범인이 경찰관에 대한 적개심으로 단독적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건 관련 재판기록을 분석하여 8명의 피고가 무죄라는 것을 증명했다. 결국 8명의 노조 지도자에 대한 유죄판결은 조작된 허위였던 것이다.
127돌 메이데이, 그리고 한국
2017년 한국의 메이데이는 여전히 ‘근로자의 날’이다. ‘노동’은 여전히 불온한 언어이고 노동의 권리는 가위 눌리고 있다. 노조 조직률이 10%가 되지 않는 나라, 대통령 후보가 공공연히 ‘노조’를 적대시해도 아무 일도 없는 나라의 메이데이는 1890년, 127년 전의 그날보다 얼마나 진화했을까.
여전히 한국은 최저임금 1만 원이 까마득하고,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나라다. 성별 임금 격차, 임금 불평등, 저임금 계층의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에 가깝고,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이 2,113시간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
2017 메이데이 행사를 벌이는 민주노총의 요구는 ‘지금 당장 최저임금 1만 원, 비정규직 철폐, 재벌 체제 해체, 노조 할 권리 보장’이다. 무엇보다도 ‘노조 할 권리’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나라 국민은, 그 국민의 대다수인 노동자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