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꽃을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늦봄이었다. 안동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그 터전이 수몰되면서 집단이주한 구미시 도개면 일선리의 전주 류씨 세거지에서였다. 반듯한 양반가옥의 대문 옆에 피어 있는 분홍빛 꽃이 해맑고 고왔다.
꽃 이름을 알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꽃을 만난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여러 해가 지났다. 그 꽃을 다시 만난 건 대엿새 전이다. 동네 도서관 앞 길가에 그 꽃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단박에 식물∙꽃∙나무 이름을 알려주는 앱 ‘모야모’를 통해 그 꽃의 이름을 알았다.
‘분홍낮달맞이꽃’, 이름은 관계의 출발점
이름도 그 해맑은 아름다움과 어울렸다. ‘달맞이꽃’은 알지만 ‘낮달맞이꽃’이 따로 있는지는 몰랐다. 하기야 세상에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게 어디 한두 가진가 말이다. 꽃과 이름을 잇자마자 자연스레 분홍낮달맞이꽃이 눈에 꽂히기 시작했다. 북봉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전원주택 부근에서 다시 그 꽃을 만난 것이다.
뜻밖에 그것들은 가까이 있었다. 아니, 가까이 있는데도 무심히 지나치다가 꽃을 제대로 알게 되면서 눈에 저절로 들어온 것이라 말해야 옳다. 김춘수 싯구로 말하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인 것이다.
분홍낮달맞이꽃은 바늘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달맞이꽃의 원예종이다. 달맞이꽃과 마찬가지로 남아메리카 칠레가 원산지인 귀화식물이다. 밤에 피는 달맞이꽃과는 반대로 해 뜰 무렵 피기 시작해서 해 질 무렵 시든다. 이름에 ‘낮’이 들어간 까닭이다.
이름을 아는 것, 유의미한 관계의 출발점
‘안다’는 것의 의미는 매우 복합적인 층위를 갖지만 김춘수의 ‘꽃’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인간 사회에서 ‘이름’을 아는 것은 인식의 출발점일 뿐이지만 꽃과 나무는 좀 다르다.
인격적 상호 관계가 불가능하지만 꽃과 나무는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차원이 다른 관계가 열릴 수 있다. 지난 1년 동안 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한 번 더 눈여겨 바라보는 것은 ‘아는 꽃’이고 ‘아는 나무’다. 지난봄 내내 생강나무의 성장을 지켜보았고, 지금은 청미래덩굴의 생육 상태를 나날이 살펴보고 있다.
이름은 안다는 것은 곧 의미 있는 관계의 출발점이다. “거기에 가면 좋은 꽃이 많아.”라고 하는 것보다는 “거긴 분홍낮달맞이꽃이 지천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은가. 이름을 불리는 순간부터 꽃과 나무는 단순한 객관적 사물에서 ‘상관물(相關物)’이 될 수 있는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분홍낮달맞이꽃이니 다른 빛깔의 낮달맞이꽃도 있겠다 싶어 검색해 보니 ‘황금낮달맞이꽃’도 있었다. 어저께 잠깐 들렀던 충북 영동의 전통 가옥 ‘성위제 가옥’ 앞에 피어 있는 노란 꽃이 바로 황금낮달맞이꽃이었다. 돌아와 산을 오르다 다른 전원주택 화단에 핀 노란 꽃도 황금낮달맞이꽃이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핀 것이 아니라, 무심히 ‘하나의 몸짓’으로 지나쳤던 내가 그를 알아보는 순간 ‘내게로 와서 꽃’이 된 것이다. 산을 오르며 하나씩 아는 꽃을 더하게 되면서 나는 내 삶이 풍성해지는 느낌을 받곤 한다. 때로 관계는 축복이기도 하다.
꽃과 나무의 서사, 그 차이
달맞이꽃은 그리스 신화에 슬픈 전설을 남겼다. 별을 사랑하는 요정(님프 nymph) 가운데 유독 홀로 달을 사랑한 요정의 이야기다. 이를 시기한 동료들의 고자질에 제우스는 그를 달도 별도 없는 곳으로 추방했고 이를 안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그를 찾아다녔지만 제우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르테미스가 마침내 그를 찾았을 때 이미 요정은 달을 그리워하며 죽은 뒤였다. 달의 여신이 그를 묻어주고 슬픔을 떨치지 못하자 제우스는 그를 달맞이꽃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였다. 꽃말이 ‘기다림’이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대체로 꽃에 얽힌 서사(敍事)는 이처럼 비극으로 이루어지는 게 많은 것 같다. 꽃의 서사가 주로 ‘슬픈 사랑-죽음-무덤 위에서 피어난 꽃’과 같은 화소(話素)로 이루어지는 것은 꽃의 유한성 탓일까. 피었다가 지고야 마는 생멸(生滅)의 순환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꽃 이야기는 삶과 사랑을 떠나지 못하는 시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에 나무와 그 이름에 얽힌 서사는 훨씬 폭넓고 구체적이며 산문적이다. 하루걸러 산을 오르면서 조만간 ‘참나무’ 공부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이른바 참나무 6형제를 분간하지 못한 청맹과니를 벗어나야겠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상수리는 임금의 ‘수라상에 오른 도토리’라는 뜻이고, 신갈나무는 나무꾼들이 짚신 바닥이 해지면 참나무 잎을 깔아 신곤 했다고 해서 ‘신을 갈다’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떡을 찔 때 그 잎으로 떡을 싼다고 하여 떡갈나무고, 다른 참나무보다 단풍을 오래 지니고 있다고 해서 ‘가을’의 준말인 ‘갈’을 붙인 게 갈참나무다.
세로로 깊은 골이 생기는 참나무라 하여 골참나무에서 이름이 바뀐 게 굴참나무고 참나뭇과의 나무 중 잎과 열매가 가장 작아 ‘졸병’이란 의미가 담겨 있는 나무가 졸참나무라고 한다. 나무의 서사가 꽃의 서사와 다른 것은 일회적인 꽃과 달리 나무는 그 실용성 덕분에 인간의 삶과 구체적 관계를 맺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참나무 6형제를 분간하기까지에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요즘 나는 산을 오르내리며 참나뭇과에 속한다 싶은 나무들은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또 청미래덩굴의 열매가 얼마나 굵어졌는가를 산행 때마다 살펴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꽃과 나무, 혹은 삶의 확장
어저께에는 산등성이에서 낯선 꽃 하나를 만났다. 내 눈에 설 뿐 그 꽃은 물론 지금껏 그 자리에서 때가 되면 피어난 꽃이었겠다. 이름을 모르면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진을 찍어 모야모에 알려달라고 요청했더니 바로 답이 왔다. 기린초(麒麟草)라 한다.
이름이 한자말로 된 이 꽃은 돌나물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이다. 한국, 일본, 중국, 동시베리아 등에 분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중부 이남에서 주로 자란다. 흔히 관상식물로 기르며 어린순은 먹기도 하는데 한방에서 이뇨와 강장 약재로 쓴다. 공교롭게도 이 꽃의 꽃말도 ‘기다림’이다.
산에 피는 꽃 모두를 들여다보고 그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앞서 말했듯 아는 식물의 이름이 더해질수록 내 삶이, 생활이 풍성해지는 느낌에 행복해한다. 삶과 이어진 세계의 일부라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도 당연히 삶의 확장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