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은 대한민국 대통령 중 가장 서민적인 대통령으로 꼽히는 정치인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가장 그리워하는 대통령’ 여론조사에서 1위를 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서민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부유한 조세 전문 변호사가 되었다가, 인권변호사로 사회문제를 깨닫는 시간까지의 과정을 증언을 통해 알아봅니다.
가난한 시골 소년 노무현입니다
가난한 소년 ‘노무현’은 1946년 경남 김해의 한 시골에서 태어났습니다. 5남매의 형제 중에서 늦둥이로 태어나 어머니가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공부는 어느 정도 했으나 마음 상하는 일이 많았던 노무현입니다. 미술 시간에 크레용을 준비하지 못해서 혼나기도 하고 ‘사친회비’를 안 낸다고 수업 중에 쫓겨나기도 했다고 합니다. 노무현 스스로도 가난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6학년 때 전교 회장을 한 것은 담임선생님의 응원 덕분이었는데, 그때 가진 자신감이 평생 꺾이지 않는 노무현을 만든 것 같습니다.
도시락도 없이 살면서 점심시간에 수도꼭지를 틀고 물 마시고 ‘아.. 배부르다…’하고 이 쑤시는 사람…
이 사람이 고교 동창 ‘이병권’이 기억하는 노무현입니다. 실제로 노무현은 중학교 입학 때 입학금이 없어서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가 외상으로 입학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중학교 2학년 때는 ‘이승만’의 생일을 기어맞이하여 학교에서 찬양의 글짓기를 시키자 급우들과 이를 거부했던 적도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반성문을 쓰게 하려고 했지만, 노무현은 잘못한 일이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고 합니다.
조금의 여유가, 형편이 괜찮으면 자취방을 전전했고… 그렇지 못할 때는 학교에서 잠을 잔다든지… 안 그러면 상점에 가서 야간근무, 잠만 자는 거 있죠? 지킨이… 지켜주는 그런 생활도 오래 했죠.
또 다른 고교 동창 ‘홍청섭’이 증언하는 노무현입니다. 노무현이 ‘부산상고'(현.개성고)에 진학한 이유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재임기간 동안 야당과 보수진영에서는 고졸 출신이라며 노무현과 그 부인을 비아냥거렸습니다. 학벌 좋고 힘도 가진 그들은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정치인이 된 후 노무현은 1994년 한 방송사에서 고시 공부를 하게 된 개기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 보니 장학금을 주는 상고에 갔어요. 어릴 때부터 형님이 사법시험, 그땐 고등고시였는데, 그 준비를 하고 있었고요, 그런 게 영향을 많이 주었을 겁니다.
그리고 시골이라서… 그 당시는 다양한 직업에 대한 전망을 몰랐습니다. 단지, 그냥 관리가 되는 게 제일 출세하는 줄 알았죠.
당시까지만 해도 그저 먹고 살기에 급급했던 노무현입니다. 결국 그는 낮에는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고시 공부를 하다가 육군 병장으로 제대한 후 9년 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잘나가던 변호사 노무현입니다
노무현은 8개월간의 판사 시절을 거친 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습니다. 노무현은 조세 전문 변호사로 나름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 변호사님은 일반적 변호사로서 유능하고, 그다음에 사건이 많고… 승률 높고, 수입도 많고… 말하자면 성공한 변호사였어요.
당시 동료였던 ‘문재인’ 변호사는 변호사 시절의 노무현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당시만 해도 부유한 생활을 살 수 있었던 노무현입니다. 가족들은 돈 잘 버는 변호사 덕에 아파트도 새로 마련했습니다. 노무현 스스로도 아쉬운 것 없이 사는 날이 온 것입니다.
나중에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은 그가 이 때 대형 ‘요트’를 보유하는 등 초호화 생활을 했다며 서민 정치인이 아니라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 당시 88올림픽을 서울에서 여는 걸로 확정이 됐는데, 올림픽에 한 번 나가고 싶다는 겁니다. 어떤 종목이라도… 다 들여다봤는데 예선이 있어서, 또 기준이 있어서 안 된대요. 그런데 요트는 가능하다는 거예요. 개최국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자기는 요트를 하겠다고, 실제로 그래서 일본까지 건너가서 요트 스쿨까지 나오고 그랬어요.
사시 동기 변호사 ‘강보현’이 노무현의 요트 논란을 설명하는 증언입니다. 흔히 말하는 휴양용 요트가 아니라 경기용의 작은 요트였던 것입니다.
보수언론과 다른 정치인들이 유언비어를 퍼트리며 비난의 꼬투리로 삼았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즐겼던 노무현입니다. 그는 미래의 정치인은 IT를 이해해야 한다며 직접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서 코드를 짜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던 1981년 어느 날, 우연히 맡게 된 ‘부림사건’을 통해서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부림사건은 ‘군사정권’이 사건을 조작해서 ‘빨갱이 사건’으로 몰았던 사건입니다. 후에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최병국’ 검사의 지휘 아래에 진행되었으며, 대공분실에서 불법감금과 살인에 가까운 고문을 통해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재소자들한테 듣기로 조세 전문 변호사이고 승률이 아주 높아서 갈고리로 돈을 긁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저희들 사건에 대해서 그렇게 정성을 다해서 정말 밤잠을 안 자면서 도와주셨습니다. 저희들이 읽었다고 공소장에 나와 있는 책들을 열심히 읽고, 저희들하고 많은 대화를 하고 그러면서 아주 진지하게 저희들 사건을 대해주셨고… 그 과정에서 본인 자신이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걸 저희들이 느낄 수 있을 만큼…
당시 부림사건의 피해자 ‘고호석’은 뜻밖의 일로 변화하는 노무현 변호사를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인권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서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변호에 들어가면서는 실제로 판사와 말싸움을 벌일 정도로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인권변호사가 된 노무현입니다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던 노무현이 고난의 길을 왜 가게 되었는지는 인간적인 변화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잘 나가던 조세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변신하며, 힘 가진 자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을 도와주는 삶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변호사를 즐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너무 가난했다가 수입도 좋아지고 하니까.. 그러다가 이제 더 큰 가치가 무엇이냐에 눈을 뜨게 된 거죠.
당시 어려운 사람들을 돕던 ‘송기인’ 신부도 이렇게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시국사건을 통해 돈보다 더 큰 가치를 발견한 노무현입니다.
너무 충격적이잖아요. 우리가 무슨 변호사고 헌법이 어떻고 법이 어떻고 하는 얘기가 너무나 무색했죠. 나중에 보니까 나도 제법 구호도 외치고, 시위도 하고 이러더라고요.
대통령에 당선된 후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법이라는 게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에 대한 울분을 느낀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새부터인가 민중 속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기득권을 버리고 고난의 길를 찾아 나선 노무현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비민주의 시대에서 겪어야 할 고난은 노무현의 몫입니다. 보수 정권이 반대자들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일은 역시나 같았습니다.
“하루는 어느 날 권 여사께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요즘 건호 아빠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는데, 막 형사들도 찾아오고 정보계통에서도 자꾸 찾아오는데 도대체 뭐 하는지 모르겠다고…”
‘원창희’ 고교 동창은 노무현의 부인이 걱정하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정보계통이란 국가정보를 다루는 기관을 말합니다. 억울한 자들을 도와주면 국가의 감시를 받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한국이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가족의 걱정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초기에는 부부싸움도 많이 하셨어요.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잘 나가던 우리 남편이 왜 저럴까? 꼭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노무현의 조카사위이며 변호사인 ‘정재성’도 가족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지키고 불의에 항거한 사람이 노무현입니다. 목에 힘을 주고 가진 것을 자랑하는 기득권층들에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 노무현은 그래서 평생을 전쟁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원문: 키스세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