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 영화의 미덕을 칭찬하기 위해 쓰여진 글은 아니다. 이미 ‘설국열차’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논평이 등장해 있으니까. 영화 속 상징들에 대해 온갖 종류의 해석을 한 리뷰들에서부터, 봉준호 감독 본인이 나서 ‘그건 이런 의도’라고 해석한 인터뷰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관련된 읽을 거리가 넘쳐난다.
이 영화가 깨시민을 옹호하는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할 생각도 없다. 본격적인 상징 해석도 아니다. 그러니 요나가 성경에 나오는 그 요나를 뜻하는 거라든가, 불의 등장이 인류의 문화 발달 단계를 의미하는 거라든가 하는 얘기를 원하는 분들은 다른 글을 보시기 바란다. 영화를 보면서 조금 껄끄러웠던 부분, 그리고 어딘가 아쉬웠던 부분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써 봤다.
스포일러가 닥치는 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 글은 영화를 보신 분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줄거리 생략.
1. 왜 열차인가.
만약 별도의 연료 지원 없이도 영원히 멈추지 않는 영구기관이 있다면, 그리고 그걸로 얼어붙은 지구에서 인류 문명을 어떻게든 유지해야 한다면, 그 수단을 열차로 선택하는 건 정말 바보같은 짓이다. 당연히 정지된 상태에서 이 영구기관의 에너지를 이용해 뭔가 해보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기차를 쓰면 외부인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웬만한 배리어만 친다면 어차피 온 세계가 다 얼어붙은 상황(이라는 설정)인데 접근할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런데도 굳이 열차다. 물론 ‘왜 열차인가’는 기차를 리드하는 인물 윌포드(에드 해리스)를 ‘기차에 미친 사람’으로 설정한 것으로 어느 정도 해명이 가능하다. 미친 사람이 무슨 짓을 못하겠나. 그리고 ‘왜 그 영구기관의 기술을 윌포드만 갖고 있느냐’는 질문 역시 그렇다. 미친 사람이라는데 뭘 따지겠나.
2. 혁명에 대한 오해
많은 사람들이 이 열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고전적인 혁명 이야기로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간단치 않은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맨 뒷칸의 승객들은 고전적인 시각에서 볼때 ‘착취당하는 민중’이 아니다. 이들은 기차가 달리게 하는 데 어떤 노동력을 제공하지도 않고, 그냥 윌포드로부터 열차 공간과 식량을 제공받을 뿐이다. 영화 속 논리에 따르면 어쩌다 어린이 한두명과 바이올린 연주자 정도를 얻어간 듯 한데, 역시 영화 속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의 혁명에서 가장 큰 명분은 무엇일까. ‘인류의 유일한 생존 공간이 기차 안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 기차 안의 자원을 동등하게 공유할 자격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다소 납득하기 어렵다. 영화 안에서도 언급되듯, 맨 뒤칸 사람들은 이 기차와 아무 인연이 없는 사람들로, 우연히 윌포드의 선의(?)에 의해 승차한 – 타지 않았으면 동사했을 –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일행이 원하는 것은 결국 ‘휴머니즘의 차원에서, 열차 안의 자원을 모든 사람이 공유, 생활의 질이 다 같이 떨어지더라도 전체 인원의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자’는 것인데, ‘앞칸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뒷칸 사람들로부터 빼앗은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혁명(?)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의문부호를 붙일 수밖에 없다.
커티스는 “앞칸에 도달하면 (윌포드를 포함해) 거기 있는 자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말한다. 이런 대사는 봉준호 감독에게 이들이 꿈꾸는 ‘체제 전복’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의도는 별로 없음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굳이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전통적인 계급갈등에서 오는 혁명 이야기라기 보다는 ‘남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여담이지만 이 영화의 설정대로라면, 커티스 일행은 ‘왜 앞칸 인간들만 잘 먹고 잘 사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대체 왜 윌포드는 도움될 것 하나 없는 뒤칸 인간들을 프로틴 바를 먹여 가며 기차에 싣고 다니는가’를 궁금해 했어야 할 듯.
사실 혁명의 성공 가능성이라는 것도, 윌포드 일행이 최초의 소요가 일어난 순간 귀찮은 뒤칸을 아예 떼어 내 버리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체 뭣 때문에 윌포드는 적잖은 경비 인력을 희생시켜가며 정기적으로 소요를 일으켜 온 뒷칸을 유지해 온 것일까, 거기에 대해 커티스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내게는 참 이상했다.
3. 은유와 액션 월드 사이
‘설국열차’에서 기차는 거대한 상징이다. 이런 기차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 주인공 일행이 휘젓고 다니는 각 열차 칸의 의미 등등은 도저히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하다.
뭐 영화 설정상으로 1000개의 칸이 있다고 하니 꼭 필요하지만 비쳐지지 않은 칸(예를 들어 앞칸 사람들이 먹는 스테이크를 공급하기 위한 육류 육성 칸 – 또는 인조 고기 생산을 위한 공장 칸) 들도 꽤 있었을 터. 아무튼 커티스 일행이 지나치는 대부분의 공간, 학교나 기타 앞칸 승객들을 위한 생활공간 등은 모두 리얼리티보다는 상징을 위한 공간일 뿐이다.
그런데 또 이런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액션들은 필요 이상의 리얼리티를 강요한다. 몽둥이와 칼, 살과 뼈가 마주치는 대결의 현장이기 때문. 그런데 이런 리얼한 액션은 수시로 리얼리티와 단절된 상징적인 공간과 맞닥뜨린다. 예를 들면 열심히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추격하던 분노한 앞칸 승객들은 어느 순간에 증발해 버리고, 또 뒤칸으로부터 성화를 봉송(?)해 앞칸에서의 싸움을 이끄는 장면은 그동안 통과해 온 열차의 길이나, 이들이 통과해야 할 터널의 길이를 생각할 때 도대체 가능해 보이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이런 사소한 부분들, 어디까지를 상징의 세계로 보고 어디부터를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리얼리티의 세계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상당히 불친절한 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괴물>에서는 식구들이 식사하는 장면 가운데 딸 고아성의 유령이 나타나 식구들이 주는 밥을 먹는 장면이 갑자기 삽입된다. 리얼리티의 세계 안에 불쑥 등장한 은유의 세계인 것. 이 장면이 별 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그 영화 전체가, ‘어쨌든 이런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리얼리티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상징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가 너무 자주 교차한다. 그러느라 상당 부분 설득력을 떨어뜨렸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불편함을 털어놓은 데에는 이런 이유도 상당히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4. 종교의 역할
이 영화에는 두 번, 사람의 머리 위에 신발을 얹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의 신분과 위치에 대한 비유로 사용됐다.
선종 불교의 지혜를 담은 <벽암록>이라는 책에는 ‘남전참묘南泉斬描’와 ‘조주대혜趙州戴鞋’라는 두 가지 화두가 나온다. 승려 둘이 고양이 한마리를 놓고 서로 싸우는 광경을 보고 큰 스님인 남전이 “누구든 이 고양이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한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않아 스님은 고양이의 목을 쳐 버린다.
뒤늦게 절로 돌아와 이 소식을 들은 제자 조주는 스승 남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신발을 집어 머리 위에 얹은 채 방으로 들어간다. 이를 본 남전은 “조주가 있었다면 고양이를 살렸을 것을…”하며 탄식했다는 이야기.
대단히 난해한 화두다. 해설서들을 봐도 분명한 해석이 되어 있지 않지만, 오히려 ‘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면 오히려 선불교의 화두가 아닐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신발을 머리에 얹는다는 것은 가치의 전도를 말하는 것이며, 이렇게 전도된 가치를 갖고(살생금지의 계율에 대한 금지를 깨 가면서) 누구에게 진리를 전달할 수 있겠느냐는 힐난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 화두가 과연 <설국열차> 속의 장면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지는 생각하기 나름인 듯. 미시마 유키오가 그의 대표작 <금각사>에서 이 화두를 사용했듯, 근본적인 가치의 전도를 위한 소도구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장면 외에도 두어 장면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있다. 윌포드가 커티스에게 ‘저 불쌍한 애욕에 물든 중생들에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기차 운영자(=부처?)의 길’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그랬고, 또 길리엄(존 허트)이 맨 뒷칸에서 행했다는 자비행의 모습이 그랬다고 할 수 있겠다.
자기 살을 베어 이웃을 먹인다는 장면도 – 뭔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혜숙선사와 구담공의 고사를 연상시키는 – 종교적인 가치 없이 설명하기 참 힘든 부분이다. 이런 자기 희생을 통한 감화와 리더십의 획득이야말로 종교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길리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항목에서 계속)
아무튼 이런 시각에서 보면 ‘설국열차’는 종교의 허구성과 위선을 정면으로 지적하는 영화가 된다. 윌포드가 주장하던 초월자의 시점이나, 길리엄의 희생이나, 결국은 지배자의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니까.
5. 길리엄의 배신
길리엄은 윌포드에 의해 파견된 언더커버 요원이다. 그의 역할은 일단 무질서가 지배하던 뒤칸 인간들 사이에 사랑과 인류애를 되찾게 하고, 일정 수준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윌포드와의 사전 협의에 따라 일정 수준의 희망을 지속적으로 부여한다.
즉 ‘언젠가는 혁명에 의해 우리도 앞칸을 차지할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윌포드는 뒷칸 승객들이 일정수 이상의 개체수를 보존하면서 소멸하지도 번성하지도 않는 수준으로 유지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위에서 말한 어린이나 바이올리니스트의 공급원으로 활용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 ‘설국열차’의 설명이다.
그러던 어느날, 길리엄은 윌포드를 배신한다. 그들에게 허용되었어야 했던 진출선을 넘어, 물 공급 칸을 넘어 진격한 것이다. 그리고 커티스에게 말한다. “윌포드를 만나면 말할 기회를 주지 말고 죽여” 라고. 이 말은 곧, 윌포드가 커티스를 만나면 ‘나와 길리엄은 본래 같은 편’이라는 말을 하고 설득에 나설 것임을 알기 때문에 한 얘기다. 그렇다면 길리엄은 왜 윌포드를 배신한 것일까.
사실 기존 사회의 질서 유지에 이바지하던 종교의 몇몇 지도자들이 체제 전복에 나섰던 전례는 적지 않다. 이른바 민중신학에 뛰어든 남미 카톨릭 신부들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6. 제3의 선택은 있나
윌포드의 ‘체제 유지를 위한 노력’에 설득되기 직전, 커티스는 그런 체제 유지가 어린이들의 희생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배신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대체 인류는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어린이들의 희생이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기차를 멈추고 절멸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합리적으로’ 어린이를 희생시키는 방안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즉 ‘인류의 소멸을 전제로한 인도주의의 실현’과 ‘소수의 희생을 통한 인류의 유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의미 있는 실천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실제 이런 상황이라면 과연 각자는 어떤 선택을 할지 매우 궁금하다만, ‘설국열차’는 여기서 제3의 길을 제시한다. 남궁민수(송강호)가 주장하는 ‘기차 밖에서의 삶’이다.
‘인도주의자’에겐 참 다행스러운 선택이지만, 선택지를 하나 더 늘려도 사실 선택은 어렵다. 1) 어린이들을 몇 희생시키더라도 인류 문명의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다 2) 어린이를 몇 희생시키느니, 인류 공멸이 더 도덕적으로 옳다 3) 둘 다 피하고 싶으니 기차를 세우고, 비록 가능성은 미지수지만, 기차 밖에서 새로운 문명을 세우는 쪽을 선택한다.
여러분의 선택은 어떻습니까?
7. 결말은 희망?
이 부분은 사실 좀 실망스럽다. 심하게 개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백곰이 – 비록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단 한마리의 백곰이라 해도 – 17년 동안 살아 있을 수 있다면 그건 17년 동안, 생태계의 최고 포식자인 백곰 한 마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존재했던 먹이들의 생태계가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해 백곰의 먹이인 바다표범이 있었다면, 바다표범을 먹여살리기 위한 물고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물고기가 있으려면 플랑크톤과 얼지 않은 바다가, 그리고 플랑크톤을 위해선 광합성을 위한 햇살이 있었을 거란 얘기다.
2013년 현재 인류의 과학 기술 수준으로 볼 때, 백곰이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의 생태계가 보존되어 있다면 인류가 절멸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하다. 100분1로 줄든, 1000분의 1로 줄든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
아무튼 다 그렇다 치고, 남궁민수가 생각한대로 기차 밖에서의 삶이 가능하다 칠 때, 그 조건은 ‘기차 안에 있는 물자와 에너지를 동원해 밖에서 살아남는 것’일 터. 영화의 결말처럼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리고, 소녀 티를 못 벗은 여자 하나와 어린이 하나가 달랑 살아남아서 눈밭 위에 에덴을 건설할 수 있을까. 아마도 백곰의 한끼 식사가 되는 것이 더 가능성 높은 결말은 아닐까.
문제의 백곰이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으로 보여지는 것이 영화의 의도였겠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과연 이것이 희망의 표상인가 하는 것에는 의문이 생긴다.
8. 설국열차는 성공했나.
영화를 본 수많은 사람들에게 끝없이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드는 데는 큰 성공을 거뒀다. 일단 나 자신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설국열차’는 대단히 매력적인 영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집에 가져갈 이야깃거리’를 기대하고 영화표를 산 건 아닐 거다. ‘마더’ 수준의 알듯 말듯한 수수께끼를 즐겼던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너무나 뻔한 알레고리와 다소 무리한 결말을 가진, 또 한 편의 디스토피아 영화로 느껴졌을 듯. 한편 ‘괴물’을 본 절대 다수의 관객들이 기대한 가족의 승리와 시원한 결말은 이 영화에 없었다.
생각할 거리를 잔뜩 제공했다는 점에선 환영할 만한 영화였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관객이 ‘설국열차’의 티켓을 사면서 그런 것을 기대할 지는 의문이다. 다른 한 쪽에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가 가진 미덕들 – 세계적인 명배우들의 호연, 각각의 기차 칸들이 가진 미장센의 미학, 자잘한 비유들이 가진 정답 찾기 놀이 – 를 이야기한다만,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위를 향해 그려진 ‘봉준호 기대 곡선’은 이번엔 약간 아래로 향했다고 말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