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포늪 그믐날 밤 산책
밤길을 걸었다. 우포늪에서였다. 우포늪 어떤 부분은 밤이 되면 칠흑같이 깜깜하다. 사람 불빛이 사방 어디에서도 새어나지 않는다. 5월 25일, 그믐날이었다. 날씨는 아침부터 청명해서 그야말로 구름 한 점 없었다.
술판을 접고 산책을 나선 것은 밤 10시 30분 즈음이었다. 벌레들 소리가 요란했고 나무들 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풀냄새가 짙었다. 7,000원을 주고 장만한 손전등은 조그마했다. 필요할 때만 최소 범위에서 밝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앞쪽에서 뒤쪽으로 별들이 총총했다. 그믐날이라 그런지 별들이 더 많고 더 밝았다. 밝은 별도 많았고 어두운 별도 많았다. 큰 별도 많았고 작은 별도 많았다.
옛날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믐날 밤하늘 같지는 않았다. 그때 까만 밤하늘은 정말 소금을 잔뜩 뿌려놓은 장판지 같았었지. 지금 장판지는 옛날 그대로지만 대신 드문드문 비어 있는 구석이 많다. 우포늪 깜깜한 구석에서 보아도 그렇다.
밤하늘에서 밤별은 빛나면서 흔들린다. 흔들리는 별은 어쩐지 곧 사라질 것 같다. 빛나는 별은 흔들리기 때문에 반짝인다. 반짝이는 별은 어서 오라는 손짓만 같다. 하지만 별이 있는 저 멀리는 가 닿을 수 없다.
별을 보면 때때로 아득해진다. 별은 어쩐지 그리워지고 애틋해지게 만든다. 그리움이나 애틋함은 그 자체로 무슨 위로가 되나 보다. 오랜만에 밤별을 실컷 보았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산책은 길지 않았다. 날이 쌀쌀했다. 조금 걸었는데 팔에 소름이 돋았다. 돌아오는데 바람이 머리를 헹구어 무척 시원했다.
2. 달빛에 가려진 별빛
방에 들어와 이튿날 새벽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달게 잘 잤다. 종일 걷느라 쌓인 노곤함 덕분이었다. 꿈을 꾸었나 보다. 별이 빛나지 않았다. 별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별이 있기는 한데 허여멀건 해서 좀체 구분되지 않았다.
달이 너무 밝았다. 보름달도 그런 보름달이 없었다. 두둥실 휘영청 떠올라 세상 만물을 비추었다. 그 때문에 별이 빛을 잃었다. 저기 어디쯤 분명히 있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쉬웠다. 별도 달과 더불어 같은 밤하늘에서 함께 빛나면 좋겠다. 내내 아쉬워하다가 눈을 뜨니 새벽 5시였다.
3. 평상에서 보았던 옛날 은하수
생각이 이어졌다. 어린 시절 여름 밤 풍경이다. 우리 집 마당에는 평상이 깔려 있었다. 마구간 앞에서는 모깃불이 타올랐다. 저녁 밥상을 물리면 매캐하고 쌉싸름한 모깃불이 좀 더 멀리 퍼졌다. 엄마 무릎을 베고 누우면 촘촘하게 별이 박힌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내 기억에서 중심은 은하수다. 나는 저게 뭐냐고 물었고 엄마는 은하수라고 일러주었다. 큰누나는 때때로 “푸른 하늘 으은하수 하얀 쪽배에~~” 노래를 불렀다. 잘 부르는 노래는 아니었어도 듣고 있노라면 아늑하고 은근한 느낌은 들었다.
은하수는 남북으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희부윰한 것이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밤하늘 까만 바탕색이 탈색되어서 저러나 생각도 들었다. 큰누나는 작은 별들이 수없이 겹쳐지고 모여서 은하수가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다른 별들은 소금 같았지만 은하수는 밀가루 같았다. 밀을 곱게 갈아 만든 지름 0.01mm도 안 되는 가루 알갱이였다.
은하수는 밤이 깊을수록 잘 보였다. 달이 어둡거나 없을수록 뚜렷하게 보였다. 보름달이 뜨거나 하면 은하수는 자기 존재를 달빛으로 가렸다. 하루 전 그믐날 밤 산책에서는 달이 없었는데도 은하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아무리 살펴도 보이지 않았다.
우포늪에서조차 은하수가 멸종된 것이다. 물론 광년(光年) 단위로 계산되는 저 아득한 멀리에는 은하수가 그대로 있을 것이다. 나는 은하수가 우리 밤하늘에 돌아오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멸종된 황새가 이웃 다른 나라에서 국경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날아 넘듯이.
4. 달은 좀 덜 밝아도 좋다
우포늪 밤하늘에 돌아올 은하수를 위하여 나는 달빛이 지나치게 밝지 않으면 좋겠다. 달빛이 너무 밝으면 은하수뿐 아니라 다른 별들까지 빛을 잃는다. 소금도 빛을 잃고 밀가루도 빛을 잃는다. 나는 달이 늘 밝거나 어둡지 않고 밝아짐과 어두워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무척 다행스럽다.
때로는 밤이 어두워져도 좋다. 때때로 밤에 길을 잃어도 괜찮다. 밤하늘에 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별들과 은하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야 우리가 알 수 있으니까. 어두워져 보아야 밝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있으니까.
지난 5월 10일은 둥근 달이 뜨는 보름날이었다. 그 날 보름달은 세상에 존재감 없이 흩뿌려져 있던 일반 백성들의 촛불이 은하수를 이루면서 태어났다. 그 날 보름달은 적지 않은 다른 별들이 선뜻 도움을 주었기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