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소개했던 글 ‘세계경제사 –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임금이 상승하고 일자리가 늘어난 이유는?’에서 동양에 비해 서유럽, 특히 영국 런던의 실질소득이 높았던 것이 산업혁명 발생의 이유였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 논리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산업혁명 이전 시절, 대부분의 나라에서 자본은 희소하고 대신 노동력은 풍부했다.
- 따라서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기계를 투입하느니 남아도는 인력을 활용하려는 방향으로 생각한다.
- 그런데 서유럽, 특히 영국은 지속적인 실질임금의 상승이 나타났다.
- 이 결과 영국에서는 어떻게 하면 인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 결국 풍부한 석탄 자원이라는 ‘복권’과 인간의 아이디어가 만나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특히 2번의 현상을 두고 바로 ‘근면혁명‘이라고 지칭합니다(이에 대해서는 일전에 제가 소개했던 책 『근세 일본의 경제발전과 근면혁명』에 잘 나와 있으니 참고하심 감사하겠습니다).
아래의 그림은 산업혁명 직전(1725년) 세계 주요 도시 근로자들의 생활 수준을 보여줍니다. 영국 런던 근로자들은 최저생계비에 비해 거의 4배에 이르는 실질임금을 받고 있는 반면 증국 베이징 근로자들의 실질소득은 최저생계비의 1.2배 전후에 불과했습니다. 영국 런던의 근로자들은 임금으로 생계를 꾸린 후 저축도 가능했고 또 아이들도 교육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베이징의 근로자들은 최저생계비 수준의 실질임금을 받는 데 불과했기에 불가능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어떻게 영국은 ‘맬서스 함정’ 속에서 실질임금이 지속적으로 상승했는가? 맬서스 함정이란 ‘소득의 증가 없이 지속적으로 생활수준이 정체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맬서스 함정을 다룬 흥미로운 책, 『맬서스, 산업혁명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세계』 24-32쪽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겠습니다.
1800년경 사람들이나 기원전 10만 년 전의 고대 인류나 사는 형편에 큰 차이가 없었다. 사실 세계 전체를 놓고 볼 때 1800년경 사람들 대다수가 고대 인류보다 더 가난하게 살았다. (……) 생활의 질을 가늠할 수 있는 기타 여러 가지 기준을 살펴보아도 고대인에 비해 확실하게 나아진 구석을 찾아보기 어렵다. 평균 수명을 살펴보면,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던 석기시대인의 평균 수명이 30세였던 데 비해 1800년경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35세로 그다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또 신장은 영양 상태나 어린이의 질병 노출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다. 그런데 석기시대인이 1800년경 사람들에 비해 신장이 더 컸다.
(……) 기술적 진보의 속도가 ‘맬서스 트랩’의 핵심이다. 기술적 진보가 누적되어 결과적으로 이것이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더라도 진보의 속도가 너무 더디면 물질생활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 맬서스 경제의 범위 내에 있는 기술적 진보는 인구 증가라는 복병의 방해를 받게 된다. (……) 이 모형은 1800년 이전의 세계 경제를 모든 동물 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연 경제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본다. 이 수준에서는 인간과 동물 세계를 구분할 수 있는 뚜렷한 요인이 없다.
위의 그림은 이상과 같은 ‘맬서스 트랩’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13세기 말 유럽에 발생한 흑사병으로 영국 인구가 600만 명에서 200만 명 수준으로 급감했을 때(1450년) 1인당 소득은 오히려 급격히 증가해 1860년보다 높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다시 인구가 늘어나는데, 1인당 소득은 1450년대에 비해 낮지만 그래도 계속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영국은 1600년대를 전후해서 인구증가 속에서 실질소득이 감소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양쯔 강 하류, 간토 평야 등 다른 지역과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영국은 실질임금이 비싸고, 다른 지역은 실질임금이 쌌습니다. 그래서 노동력을 절약하는 방향으로 기술 진보가 영국에서만 발생했습니다. 어떤 이유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크게 세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첫 번째 제도학파는 영국의 우월한 제도에 주목합니다. 더글라스 노스 교수는 영국의 ‘명예혁명”이 새로운 국면으로 이행을 촉발했다고 봅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더글러스 노스와 배리 웨인게스트는 1989년 Journal of Economic History에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이 장기경제 성장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들은 이 논문에서 명예혁명이 영국 정부의 자의적인 재산권 강탈을 막음으로써 장기적인 투자 활동을 촉진했다는 경로를 제시합니다.
명예혁명 이전 영국 왕실은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올린다거나, 돈을 받고 특허권이나 귀족 작위를 마구 발행합니다. 혹은 은행가들에게 돈을 빌려놓고 갚지 않는 일을 반복합니다. 청교도 혁명은 왕실의 자의적인 재산권 침해에 대한 대응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정복고 이후 새로 들어온 왕조는 이러한 문제를 시정하기는커녕 더 심하게 재산권을 침해합니다. 결국 1688년 명예혁명으로 두 번째로 왕을 내쫓은 뒤 영국 의회는 네덜란드에서 왕을 “수입”합니다. 그리고 왕에게 더 이상 재산권을 자의적으로 침해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습니다.
노스와 웨인게스트가 강조하는 것은 두 번에 걸친 혁명으로 인해 영국 왕실은 의회의 위협, 즉 재산권을 위협할 경우 왕을 내쫓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을 만한 위협(Credible Threat)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국에서는 왕실이 더 이상 자의적으로 국회의 동의 없이 국민의 재산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중단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장기투자와 관련된 영역에서 큰 영향을 미칩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위 그래프에서 보다시피 영국 국채 이자율은 명예혁명 이후 큰 폭으로 하락합니다. 왕이 돈을 빌려놓고 갚지 않을 위험이 사라지며 그만큼 리스크 프리미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영국이 1700년대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던 이유가 바로 ‘저금리’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연승행진’은 또 다른 복권 당첨으로 이어집니다.
반면 포메란츠 교수를 비롯한 이른바 캘리포니아 학파는 제도적 변화보다는 북아메리카의 존재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킵니다(Great Divergence).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덕분에 북아메리카에 광대한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었고, 이 덕분에 두 가지의 핵심적인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이 돌파한 첫 번째 난관은 바로 ‘인구압 완화’입니다. 생활 수준이 1600년대부터 개선됨에 따라 많은 아이가 태어났지만 이 아이들은 해군과 식민지 개척에 활용함으로써 영국 내의 인구압이 낮았습니다. 이게 결국 실질임금의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위 그래프는 지난 500년 동안의 에너지 가격 추이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국의 나무 가격(붉은 선) 추이입니다. 1500년부터 시작되는 초기에는 1.0 파운드에서 시작됩니다. 연료로 사용되는 목재의 가격이 이렇게 쌌던 것은 일단 영국 인구가 흑사병 영향으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죠.
흑사병이 절정에 도달했던 1350년경 영국의 인구는 300만 명 대로 떨어졌고, 이렇게 인구가 줄어들면 당연히 생산성이 낮은 토지에 대한 경작이 줄어들며 자연스럽게 삼림이 늘어납니다. 인구가 줄어드니 목탄(木炭)에 대한 수요가 줄어 목재 가격이 안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격의 하양 안정 흐름이 1550년을 전후해서 비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인구증가 때문이죠.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숲이 줄고 경지 면적이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개척된 토지는 두 가지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나는 생산성의 하락, 다른 하나는 삼림의 파괴에 따른 후유증. 전자는 금방 이해됩니다. 농사짓기 좋은 토지는 이미 다 경작되었으니 이제 남은 토지는 토질이 안 좋거나 배수 및 수조 등에 문제가 있는 곳일 겁니다. 후자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북한을 보면 딱 답이 나오죠. 개성공단 다녀온 분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북한의 산들이 민둥산이라는 것입니다. 숲의 ‘물 보존’ 효과가 사라짐에 따라 북한은 만성적인 홍수와 가뭄을 겪고 있죠. 즉 1990년대부터 시작된 만성적인 북한의 식량난은 숲의 파괴에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위 그래프의 1800년대 부분입니다. 급등하던 목재 가격이 급락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인구도 증가하고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함대 건설에 필요한 목재 수요가 늘어났는데 왜 목재 가격이 급락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북아메리카의 광대한 삼림을 벌채해 영국으로 파는 ‘비즈니스’가 활성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국이 ‘명예혁명’ 이후 건설한 대함대가 이런 비즈니스의 안전성을 더욱 높인 요인이었을 것입니다.
대함대의 건설에 못지않게 중요한 영국 실질임금 상승 요인은 바로 ‘최저생계비의 감소‘에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산업혁명 이전 유럽 경제의 상황을 다룬 책 『근대유럽의 형성: 16-18세기』를 인용해보겠습니다.
이 당시(15-16세기)에는 유럽 전체 인구의 90% 정도가 농민이었다. 따라서 근대 유럽은 대부분 농촌 세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먼 지역으로의 여행이 성지 순례와 같이 아주 예외적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 사람들에게 마을 공동체는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소우주였다. 이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은 자급자족적인 생존경제의 차원에서 이뤄져서, 물질적 기반의 대부분이 시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오늘날 우리의 일상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은 당연히 농업이었다. 유럽의 농업은 빵을 만들 수 있는 곡물인 밀과 호밀 위주였고, 여기에 보리, 귀리, 메밀 같은 작물과 채소류가 더해졌다. 그리고 신대륙 발견 이후 옥수수와 감자라는 아주 중요한 보충작물이 추가되었다.
밀과 호밀 농사의 가장 큰 단점은 지력 고갈이 심하다는 점이다. 아시아의 벼나 아메리카 대륙의 옥수수와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이 이것이다. 아시아의 벼농사 경우, 몇십 년 동안 같은 땅에서 계속 농사를 짓고 더구나 2모작이나 3모작까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16세기 이후 아시아에 찾아온 유럽 여행자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같은 땅에 연이어 농사를 짓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삼포농법 같이 교대로 땅을 휴경하는 농법이 유행했던 게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양에 비해 인구가 적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50-51쪽에서 조금 더 인용해보겠습니다.
곡물 생산에 삶의 거의 모든 것이 걸려 있던 이 사회의 사람들에게 농업 생산성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수준과 비교하면 이 시대의 농업 생산성은 가소롭다고 할 정도로 낮은 형편이었다(아래의 ‘표 1’ 참조). 수확량 대 파종량의 비율을 보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4:1에서 6:1에 불과했다. 낟알 4알을 거둘 경우 다음번 농사에 쓸 종자를 따로 보관해야 하므로 실제 빵을 만들 수 있는 낟알은 3알에 불과하다.
만일 흉년이 들어서 이 비율이 3:1 이하로 떨어지면 기근이 시작된다. 또 만일 2:1 정도의 비율이 2-3년 연속되면 아사자가 나오게 된다. 반대로 18세기 일부 선진 지역에서 이 비율이 10:1 이상으로 상승한 것은 ‘농업혁명’에 해당했다. 모든 것이 바로 이 수확량 대 파종량의 비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시무시하죠? 아래의 ‘표 1’은 유럽의 농업 생산성이 얼마나 처참한 수준이었는지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즉 인구가 아무리 천천히 증가해도 유럽의 농업생산력으로는 그 인구를 부양할 방법이 없는 상태였던 겁니다. 그런데 아래의 ‘표 1’에도 나와 있듯 1500-1820년 사이 영국과 네덜란드 등 선진지역에서는 이 비율에 극적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4:1에서 7:1로의 변화가 그것입니다.
<표 1> 유럽의 곡물 수확
A. 1200-1249년 이전 곡물 수확 비율 3: 1에서 3.7:1 I. 영국 1200-1249년 3.7 II. 프랑스 1200년 이전 3 B. 1200-1820년 곡물 수확 비율 4:1에서 4.7:1 I. 영국 1250-1499년 4.7 II. 프랑스 1300-1499년 4.3 III. 독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1500-1699년 4.2 IV. 동부유럽 1550-1820년 4.1 C. 1500-1820년 곡물 수확 비율 6.3:1에서 7:1 I. 영국, 네덜란드 1500-1700년 7 II.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1500-1820년 6.3 III. 독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1700-1820년 6.4 D. 1750-1820년 곡물 수확 비율 10:1 이상 I.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1750-1820년 10.6
어떻게 이런 생산성의 혁신이 나타났을까요? 그 비결은 바로 휴경 토지에 다양한 곡물을 재배한 데 있습니다(53쪽).
네덜란드 사람들이 부족한 식량을 모두 (동부 유럽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클로버, 순무 등의 사료 작물을 휴경지에 재배함으로써 지력을 회복하면서도 가축의 수를 크게 늘릴 방법을 발견했다. 이 농법이 영국에 전해지고 그것이 더욱 발전해 영국 농업혁명의 기초가 되는 이른바 ‘요크셔 농법’의 기반이 되었다.
이런 농업의 발전이 농촌 세계, 더 나아가서 영국 사회 일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길게 보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이뤄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쳤어야 하는 농업혁명이 이미 오래전부터 착실하게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농업 혁명은 영국 경제에 두 가지 장점을 줍니다. 첫 번째, 자본을 만들어 줍니다. 농촌이 부유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기계장비에 투자할 여력이 생기는 겁니다. 두 번째, 최저생계비를 떨어뜨리게 되어 실질임금을 인상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물론 이상의 3가지 요인만으로 영국의 실질임금 상승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동양에 비해 영국인들이 아이를 적게 낳았거나, 혹은 잦은 전쟁으로 젊은 사람들의 사망률이 높았던 것 등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아직 3가지 요인 이외에 다른 요인을 잘 설명하고 또 통계로 입증한 책이나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이 정도로 정리할까 합니다.
원문: 시장을 보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