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쓴 글에서 밝혔듯 나는 요즘 서울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직접 가보는 대신 인터넷을 통해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방식으로 전시의 일부나마 더듬거리며 들여다보고 있다. 필요하면 아이에게 부탁하여 현장에서 판매하는 자료집이나 전단을 대신 구해달라고 하기도 한다.
서울시청 시민청 갤러리에서 4월 18일부터 30일까지 진행된 (사)남도전통문화연구소의 한창기 20주기 추모 전시회 《뿌리깊은 나무의 미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서울로 가는 대신 아이에게 그 전시회에 가 보라고 했고, 아이는 5월 초 귀향길에 전시회 안내 전단(팸플릿) 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한창기, 품격 높은 한국어 사용자
전시회를 둘러보고 아이는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전송해 왔다. 나는 그걸로 이 전시회의 모습을 대충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아이는 꽤 꼼꼼히 전시물을 들여다보았던 모양이다.
“《뿌리깊은 나무》 창간사를 봤는데요. 아, 옛날 글 같지 않게 매우 세련된 글이던데요.”
“그렇지. 그는 글쟁이 가운데서 아주 품격 높은 한국어를 쓴 사람이야.”
글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한창기(1936~1997)를 사실 잘 알지 못한다.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서 그를 처음 만났고 거기 실린 글을 통해서 그가 예사롭지 않은 우리말 감각을 가진 인물이라는 걸 알았다(그의 생각과 글은 『뿌리깊은 나무의 생각』(휴머니스트, 2007)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다다.
《뿌리깊은 나무》가 창간된 것은 1976년이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태째 백수로 지내고 있었다. 어디서 그 월간지를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나는 그 책에 흠씬 빠졌다. 그러나 이듬해 입대하여 만기 제대를 했던 1980년에 이 잡지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아들아이가 예사롭지 않다고 한 창간사의 내용은 지금 읽어봐도 한창기의 문화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명문이다. 그의 ‘토박이 문화론’은 달리 말하면 ‘한국인의 주체적 문화의식’과 이어지는 한창기의 일관된 문화관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다음 연구에서 잘 짚어지고 있다.
문예지는 아니었지만 1976년 3월호로 창간된 종합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의 의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편집 겸 발행인은 한창기, 편집장은 윤구병에 이어 김형윤이 맡았다. 종합월간지 중 한국 최초로 순 한글 가로쓰기를 했고 전문 미술인이 편집에 참여하였다.
“우리의 살갗에 맞닿지 않은 고급문화의 그늘에서 시들지도 않고 이 시대를 휩쓰는 대중문화에 치이지도 않으면서, 변화가 주는 진보와 조화롭게 만나야만” 될 토박이 문화론을 주장한 한창기의 창간사 그대로 이 잡지는 《창작과 비평》과 《문학과 지성》과 같은 날 등록이 취소되는 비운을 맞이할 때까지 전통문화의 복원과 창조적 변형에 주력하였다.
《뿌리깊은 나무》는 한국인의 주체적 문화의식을 일깨우는 교육, 문학, 문화, 예술에 관한 글과 사진을 매호 알차게 실었다. 고정란을 확보한 기획기사로는 ‘이 땅의 이 사람들’, ‘숨어 사는 외톨박이’, ‘이것도 문제다’, ‘털어놓고 하는 말’, ‘민중의 유산’, ‘예술비평’ 등이 있었고, 매주 1번씩 판소리 감상회를 열기도 했다.
어려운 한자어나 외래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쓴 것과 일본어와 서양어의 구조로 오염된 많은 구문을 우리말의 얼개로 바꾸려고 한 노력은 양대 계간지의 편집진이 서양 문학 전공자들이어서 간과한 부분이기에 특히 높이 평가할 만했다.
- 이승하, 「한국 문예지 연구ㅡ《창작과 비평》에서 《문예중앙》까지ㅡ제3공화국 시대 문예지의 역할」
한창기가 시작한 펴낸 새로운 잡지는 여러 면에서 유달랐다. 종합월간지 가운데 처음으로 순 한글 가로쓰기를 했는데 가로쓰기 일간지가 나온 게 12년 후인 1988년(《한겨레신문》)이었으니 그만큼 《뿌리깊은 나무》는 앞서간 정기간행물이었다.
1970년대의 순 한글 가로쓰기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
전문 미술인이 편집에 참여한 그의 잡지들은 유려한 편집과 예사롭지 않은 사진 등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매끄러운 아트지를 쓴 책은 두께에 비겨 상당히 무거웠다. 이사를 다니다가 정기 구독했던 《샘이깊은물》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한창기의 삶’에서 보듯 그는 독특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법대를 갔지만 법률가 대신 장사꾼을 선택했고, 미군에게 비행기 표와 영어 성경을 팔다가 마침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세계에서 가장 잘 파는 세일즈맨이 되었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커 코리아의 사장 자리에 올랐다.
브리태니커 본사에 한국에서 번 돈을 한국을 위해 쓰라고 강권하여 창간한 것이 월간 잡지 《뿌리깊은 나무》였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서 전통문화의 복원과 창조적 변형을 기저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이분법을 넘는 새로운 공간으로서 토박이 문화론을 펼쳤다.
《뿌리깊은 나무》는 한국인의 주체적 문화의식을 일깨우는 데 주력했다. 특히 어려운 한자어나 외래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 쓴 것과 일본어와 서양어의 구조로 오염된 많은 구문을 우리말로 바꾸어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를 ‘한국어를 통찰한 언어학자’라고 기리는 이유다.
《뿌리깊은 나무》나 《샘이깊은물》을 읽으면서 경이롭게 느꼈던 문체는 바로 우리말을 제대로 쓰는 데서 오는 언어의 품격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직접 쓴 글은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본문 가운데 끼어 있는 사고나 광고에서도 한자어를 군더더기 없는 우리말로 풀어쓰면서도 만만찮은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의 문체는 창간사에서 아주 잘 드러났다.
‘잘 사는’ 것은 넉넉한 살림뿐만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도 누리고 사는 것이겠습니다. ‘어제’까지의 우리가 안정은 있었으되 가난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물질 가치로는 더 가멸되 인정이 모자랍니다. 곧, 우리가 누리거나 겪어온 변화는 우리에게 없던 것을 가져다주고 우리에게 있었던 것을 빼앗아 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사는’ 일은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뿐만이 아니라 억울함과 무서움에서도 벗어나는 일입니다.
- 《뿌리깊은 나무》 창간사, 「도랑을 파기도 하고 보를 막기도 하고」
그에게서 3인칭 대명사 ‘그이’를 배웠다
한창기의 잡지를 통해서 배우고 익혀서 내가 지금도 쓰고 있는 게 3인칭 대명사 ‘그이’다. 영어가 들어오면서 이른바 3인칭 대명사는 남성·여성을 가려 쓰이기 시작했다. ‘히(he)’와 ‘쉬(she)’를 직역한 듯한 ‘그’와 ‘그녀’를 우리는 지금도 무심히 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잡지는 이 입에 붙지 않는 대명사 대신 ‘그이’를 썼다. 그와 그녀는 당연히 남녀를 구분해 쓰는 것이었지만(원래 ‘그’에는 성 구분이 없다) ‘그이’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쓰는 것이었다. 그나 그녀 대신 쓰는 ‘그이’는 낯선 번역 투의 문장과 달리 예의가 갖추어지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은 우리 어머니 세대가 쓰는 말이었다. 우리가 ‘사람’이라 쓸 자리에 어머니는 의존명사 ‘이’를 편안하게 쓰셨다. 그것은 “저기 가는 이가 그이냐? 네가 말하는 이가 저이냐?”와 같이 어머니의 말씀에 살아 있는 말이었다. 나는 지금 글뿐 아니라 말로도 ‘그이’를 더러 쓰는 버릇을 들이고 있다.
한창기는 70년대만 해도 낡은 예술로 여겨지던 ‘판소리’를 우리 고유한 전통음악으로 되살려냈고 케케묵은 전시대의 유물 취급을 받던 놋그릇과 백자를 일상의 생활도구로 다시 불러냈다. 그것은 그가 주창했던 전통문화를 복원하는 일의 하나가 되었다.
《뿌리깊은 나무》는 전통문화와 예술을 옹호하고 유신 독재에 질식하던 인권과 민주주의를 환기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민중’의 정체성을 밝히고 ‘민중문화’의 개념을 바로 세운 공도 빼놓을 수 없다. 《뿌리깊은 나무》가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된 것은 이 잡지가 나름의 방식으로 정권에 맞섰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지성을 깔보지 않으려 애쓴’ 여성지 《샘이깊은물》
뿌리깊은나무 출판사가 《뿌리깊은 나무》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여성지 《샘이깊은물》을 창간한 것은 내가 초임 발령을 받은 1984년이었다. 유명 일간지들이 다투어 여성지를 내던 ‘여성지 시대’에 나온 이 잡지는 “여자의 지성을 깔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무책임한 바람기나 허영기를 팔지 않고도 대중이 오히려 흥미 있어 하고 비판 정신이 깃들인 여성지”(편집장 설호정)였다.
여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뿌리깊은 나무》에 대한 갈증을 아내에게 《샘이깊은물》 정기 구독으로 받아주는 것으로 달랬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샘이깊은물》을 정기적으로 받아본 기간은 1년이었던 것 같다. 버는 돈은 적고 쓸 데는 많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 여학교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고등학교 한 해 선배가 찾아왔는데 그는 당시만 해도 ‘월부 책 장사’로 불린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의 세일즈맨이었다. 그가 장황한 안내와 함께 그가 어느 다방에서 내 앞에 펼쳐 놓은 상품이 『한국의 발견』이었다. ‘남한 땅 곳곳을 발로 누벼 기록한 종합 인문지리지’라 홍보했던 이 11권짜리 책을 나는 할부로 샀다. 선배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의 권유도 권유지만 책의 장정과 만듦새에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며칠 후 책과 함께 『판소리 다섯 마당』 사설집이 덤으로 왔다. 그때 뿌리깊은나무 출판사가 발행한 같은 이름의 음반은 상당한 고가여서 사설집을 읽는 것으로 미련을 달랬던 것 같다. 뒤에 ‘민중이 구술한 내용을 기록하여 우리말과 문화의 원형을 담아낸’ 민중 자서전 시리즈(전 20권)가 나왔을 때 나는 『장돌뱅이 돈이 왜 구린지 알어?』를 사서 읽었다.
그리고 80년대 교육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샘이깊은물》과 멀어졌다. 그러나 《샘이깊은물》은 계속 발간되었고, 정기구독자가 수만 명을 헤아린 단연코 뛰어난 여성지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한창기는 1995년 간암 진단을 받아 투병하다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계속 나오던 월간 《샘이깊은물》은 2001년 11월, 창간 17주년 기념호를 끝으로 휴간에 들어간 뒤 오늘까지 복간되지 못하고 있다.
‘뿌리깊은 나무 문화운동’의 제안
이번 전시회는 남도전통문화연구소의 한광석 대표가 주최했다. 그는 한창기의 조카로 유명한 쪽염색의 ‘명장’이다. 전통문화를 살려내려 애썼던 한창기의 뜻을 기리기 위한 행사의 주최자로서 그는 과부족이 없는 이인 것이다.
이번 전시회를 열면서 주최 측과 문화계 인사들은 ‘뿌리깊은 나무 문화운동’을 제안했다. 한창기의 뜻을 이어 ‘반말 없는 사회’ ‘교육과정 개편을 요구하는 정책 제안 시민운동’ ‘우리 문화를 통한 치유사업의 활성화 운동’ 등을 펴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창기는 ‘아무개 씨’나 ‘아무개 귀하’라 불러야 잘 부르는 것인 줄 알았던 시대에 ‘아무개 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다. 그가 쓴 ‘님’은 이제 많은 이들이 일상 속에서 쓰는 말이 되었으니 그 이바지도 적지 않은 셈이다.
여러 차례 이사하면서 부득이 책을 적지 않게 버려야 했다. 《샘이깊은물》도 그렇게 버린 잡지 가운데 하나였다. 새삼 한창기를 기억하게 되면서 그때 그 잡지를 보관하고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얼핏 하다가 만다. 어떤 방식으로든 한창기의 뜻이 운동과 실천으로 되살아나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