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ㅇㅇ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라는 표현, 종종 들어보셨죠. 사람마다 자기 인생에 영향을 준 책이나 영화, 노래가 하나쯤은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요, 오늘 소개하는 책 3권이 작지만 제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대한 저의 시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적었습니다. 책을 읽고 제 생각이 바뀌는 데에는 8시간이 걸렸습니다.
페미니즘, 어렵다
저는 여자가 아닙니다. 페미니즘? 어려웠습니다. SNS를 통해 여성 혐오, 성차별 관련 기사나 에세이를 종종 읽었지만,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2년 전부터 페미니즘 관련 도서가 많이 보였고, 페미니즘 추천도서 목록을 다룬 기사는 많았습니다.
서점에 가서 자주 접한 제목의 책을 펼쳤습니다. 처음 접하는 용어들은 낯설고 어려웠습니다. 성차별, 여성 혐오의 무게를 여자처럼 느낄 수 없었고 당장 큰 관심을 둘 주제는 아니라고, 그래도 현실은 예전보다는 나아지고 있다고, 철저히 여자가 아닌 입장에서만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이해가 쉬웠던 책 몇 권을 서점 모바일 앱 보관함에 저장하고, 페미니즘을 조금씩 잊었습니다.
2년 뒤 2017년 3월, 동료가 책 한 권을 빌려줬고, 그 이후로 페미니즘에 관한 3권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네 번째 책을 읽고 있습니다. 첫 번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지금도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2년 전과 비슷하게 느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첫 번째 책은 어렵지 않았고 쉽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읽으며 막연했던 페미니즘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고,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는데요. 저처럼 페미니즘을 어렵거나 막연하게만 느끼셨던 분이 있다면, 페미니즘의 문턱을 낮춰준 책 3권과 읽었던 순서를 제안해봅니다.
첫 번째 책, 『82년생, 김지영』
첫 번째 책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인 동시에 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에서 여자가 살아가는 여성혐오, 성차별의 실제 통계를 김지영이라는 30대 중반 여성과 주변 여성의 삶으로 이야기합니다. ‘여성경력단절’, ‘여성임금차별’, ‘여성에게 강요, 당연시 되는 모성애’ 등 다양한 형태의 젠더 문제가 읽기 쉽도록 쓰였습니다.
특이한 점은 여성혐오, 성차별 문제를 담담하고 차분하게 서술한 형식이었는데요. 한 여성이 겪는 어려움과 감정을 천천히 이야기하는 말투는 소설에서 나오는 문제에 대해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마련해줬습니다(실제로 작가는 남성 독자들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젠더 문제에 공감할 수 있도록 남성이 직접 가해자로 묘사되는 극적인 내용도 초고에서 뺐다고 합니다).
200페이지가 안 되고, 어려운 한자어나 전문 용어가 없어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쉬운 어휘로 쓰인 책의 내용은 무겁습니다. 뒤로 갈수록 주인공 김지영 씨의 경험과 어려움에 조금이나마 공감이 되어 빠르게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책은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을 알아가야 한다고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담담한 말투로 전해지는 생생한 경험으로, 성별과 나이를 불문한 독자가 젠더 문제의 아픔을 ‘공감하고 스스로 페미니즘을 알아가고 싶게끔 만드는’ 책입니다.
두 번째 책, 『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
두 번째 책『꽃이 아니다, 우리는 목소리다』는 대한민국 사회에 스며든 여성혐오와 성차별의 모습을 관련 통계 자료, 피해자 인터뷰, 작가의 경험과 생각을 통해 말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 ‘여자에게 강요되는 ‘여자다움’의 모습’, ‘노동임금 성차별’, ‘데이트 폭력과 살인’, ‘가부장적 사회 구조와 문화의 현실’, ‘최근 들어 활발해지는 페미니즘 운동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책을 읽고서, 그동안 잘 이해되지 않고, 와 닿지 않았던, ‘여성혐오(Misogyny)’라는 단어가 명확해졌습니다. 저도 삶의 곳곳에서 여성혐오를 해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작년 국정농단 사태 때 친구들과 대화하며, 박근혜 씨를 ‘집에서 드라마나 보는 효자동 박 씨 아주머니’라고 불렀는데요.
이러한 표현도 여성을 한 사람으로서의 주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 여성이라는 젠더 안에 가두는 여성혐오적인 행동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사람의 존재를 여성이라는 젠더 안에 가둘 때 궁극적으로는 남성도 피해자가 된다는 점도 배웠습니다.
우리가 듣지 않았던 수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담긴 책입니다. 구체적인 여성혐오, 성차별 사례에 대해 알 수 있었는데요, 책은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여러 도서도 소개합니다. 성별을 불문하고 자신도 모르게 해온 여성혐오에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도록 돕는 책입니다.
세 번째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보셨을 수도 있는,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TED 강연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We should all be feminists>를 정리한 글입니다. 강연을 정리한 글 외에 작가 주변인을 주인공으로 한 구체적인 여성혐오의 이야기, 작가 인터뷰도 책에 담겨있습니다.
책에 나온 나이지리아와 미국의 성차별, 여성혐오는 앞의 두 책에서 읽은 한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차별은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이라는 점을 알게 해준 책입니다. 젠더 문제를 보편적인 사회 문제로 인식하고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응해야 하며, 구체적으로는 개인을 존중하고 여성이 겪는 다양한 어려움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는 ‘자신은 성차별을 하지 않는다’ 하고 말하는 소위 ‘괜찮은 남자’들 조차도 젠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을 꼬집습니다. 괜찮은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지 명쾌히, 친절히 알려주는 책입니다.
페미니즘, 쉽게, 조금은 더 쉽게
3권의 책을 읽은 지금, 페미니즘은 쉬워졌을까요? 아니요, 지금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제와 다르게 조금씩 바뀌어갑니다.
3권의 책을 읽으며 페미니즘에 마음이 열리고 조금씩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회의 약자가 ‘내 가족이고, 친구’이며, 나 또한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페미니즘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쁘다”라는 말이 ‘남자가 여자를 평가하고, ‘아름다움’으로 여성을 통제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난 후로는 “예쁘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 멈칫하게 됩니다. 혹시 “예쁘다”라고 말하는 게 여성혐오가 되는 상황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대신 ‘잘 어울린다’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합니다.
여성은 인구의 반을 넘습니다. 반이 넘지만 약자입니다. 약자에게 씌인 사회적 통념은 두텁습니다. 여성으로 구분된 약자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약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언어를 배우는 방법입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배워도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발음과 억양이 어색하고, 어제 배운 단어가 오늘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론 이해가 안 되고 어렵지만,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가 매일 조금씩 배워야 할 새로운 언어라고 봅니다.
자, 이제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부터 ‘쉽게’, 첫 번째 책을 펴는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글을 읽는 속도가 굉장히 느린 저는 8시간이 걸렸으니, 여러분은 훨씬 쉽고 빠르게 페미니즘과 친해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럼 모두 파이팅입니다!
*오늘 소개한 책 3권 외에도 좋은 페미니즘 관련 도서는 많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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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간 페미니즘 도서 목록 보러가기
참고 자료:
TBS x 팟빵 <이게 뭐라고> 48화 대한민국 여성의 삶, 조남주 작가
원문: 슬로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