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부대라고 하면 일면 멋있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국전쟁 중의 특수부대는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중 북한 침투까지 했던 네코부대는 6006부대 소속의 첩보부대로, 부대 특성상 역사에서마저 지워졌습니다.
한국전쟁 중 6006부대
특수부대, 첩보부대라고 하면 특별한 훈련을 받고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 멋진 활약을 하는 영화 장면 같은 것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의 첩보부대는 체계적이지 못한 부대원들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희생을 무릅썼던 특수부대였습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만들어지지 못한 것은 갑작스러운 전쟁 등의 혼란한 역사 때문입니다.
흔히 알고 있는 한국전쟁 때의 특수부대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에도 나왔던 켈로부대가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아니고 레오파트부대, 동키부대 등 KLO의 지원을 받는 부대들을 말하는 명칭입니다. 그 외에도 반공을 목적으로 청년들끼리 조직한 무력투쟁 단체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네코부대는 미국 공군 6006부대의 지원을 받는 첩보부대였습니다. 한국군이 주력이었지만 미 공군에 소속되어 있었죠.
6006부대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진 후 북한에서 특수임무를 시행하기 위해서 편성된 부대입니다. 미 공군소속이기 때문에 한국의 내막을 잘 알기 위해서는 한국인 군인들이 필요했고, 특히 이북을 잘 아는 북한 출신의 부대원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네코부대원들은 북한에서 월남한 부대원들이 많았고, 20특무전대 같은 한국군과의 합동작전도 있었습니다. 지휘는 부대장 도널드 니콜스가 내렸습니다.
네코부대 명칭의 유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도적 역할을 한 부대장 니콜스의 약칭이 “닉”이었는데, 이것을 한국인들이 잘못 알아듣고 네코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설은 6006부대가 첩보부대인만큼 부대장이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행동해 고양이 같다는 의미에서 일본어 고양이를 뜻하는 “네코”를 붙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의미로든 니콜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006부대 산하 네코부대 활약상
네코부대의 활약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최신형 탱크와 전투기의 정보를 알아온 등의 첩보활동입니다. 첩보부대는 아군에게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관건으로, 실제 네코부대의 활약으로 인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은 주력 무기인 T-34탱크를 이용한 절대 우위의 전쟁이었습니다. 이에 미군은 1950년 7월에 F-51D기 10대를 대구기지에 급히 보냈습니다.
F-51D는 T-34탱크에 로켓탄으로 공격을 가했으나 전면 장갑이 워낙 뛰어나서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6006부대의 네코부대와 한국공군의 20특무전대에는 이것을 해결할 첩보활동을 하라는 특수임무가 떨어졌습니다. 이들은 경북 경산군 적진 깊숙이 침투해서 탱크 부품과 매뉴얼 등을 탈취해 왔습니다.
이를 토대로 긴급 분석작업에 들어간 UN군은 T-34 탱크에게는 네이팜이 최적의 공격방법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작전으로 인해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전투인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특수임무는 최신예 전투기인 미그-15기에 대한 6006부대의 첩보작전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동안 UN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닐 때가 있었습니다. 1950년 11월, 압록강 진격작전에서 갑자기 나타난 소련제 미그-15기 때문에 쇼크를 받게 된 것입니다.
미국은 이때의 쌍방 피해율이 1:1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소련과 중공의 기록에 의하면 미공군기의 피해율이 3배를 넘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매우 심각해진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미그-15기는 한국전쟁 당시 최신예 전투기로서 미 공군의 제공권 장악에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이때 네코부대의 특수임무가 진행되었습니다. 1950년 4월, 니콜스와 한국 병사들은 6006부대의 지시로 평안남도의 청천강 인근에 은밀히 침투했습니다. 네코부대원들은 여기에서 미그-15기의 엔진 등에 사용되는 부품과 각종 장비를 떼어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도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총격전으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윤봉의 이등중사, 윤일균 대위는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품을 가지고 오기 위해 버티다가 전사했습니다. 수많은 희생 끝에 UN군은 한국전쟁 휴전까지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종전 후의 안타까운 일화들
네코부대의 활약은 매우 뛰어났지만 그 뒤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도 있습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을 맺자 육군 소속의 첩보부대인 켈로부대가 해체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8240유격백마부대 등이 6006부대로 옮겨 왔습니다. 이들은 휴전 이후에도 특수임무를 받고 북한 침투작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네코부대와 켈로부대원 중에는 북한 출신의 월남 용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족을 구출해 오는 작전도 있었습니다. 또한 국군포로, 공작원, 북한기관원 출신 등 12명을 데리고 귀환하는 침투작전에도 참가했습니다.
김일성은 이들을 배반자라고 부르며 특히 미워했습니다. 전쟁 후 1967년 일반 선박이 북한에 납북된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선원은 모두 송환되었으나 켈로부대의 선박대장이자 네코부대에서도 활약했던 최원모는 과거 부대원이었던 사실이 드러나서 송환되지 못하고 북에 남게 됩니다. 그는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죄목으로 사형당했습니다. 그만큼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북한 첩보활동을 지휘했던 네코부대 부대장 니콜스는 북한과 소련에 의해 암살 현상금이 걸렸으며 실제로 3번이나 암살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비밀을 유지했음에도 그의 한국인 부인과 아들은 위치가 발각되어 끝내 암살당합니다.
니콜스와 연관된 사람들의 피해도 컸습니다. 니콜스의 공작과장이었던 김인호의 모친은 북한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있다가 사망했고, 니콜스의 정보원이었던 강창옥, 최명신 등 또한 공개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휴전 후인 1957년까지도 북한 첩보활동을 벌였던 6006부대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부대장 니콜스는 CIA의 정책에 따라 멕시코에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니콜스는 이름까지 가명으로 바꾸고 신분을 세탁한 채 과거를 말할 수 없는 처지로 살았습니다.
한국에서도 네코부대원이나 켈로부대원들의 대우는 특별하지 못했습니다. 일반부대로 편입되거나 해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입니다. 이들은 비정규군 신분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의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며 원통해 하고 있습니다.
원문: 키스세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