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간 치앙마이 열흘, 씨엠립과 싱가폴을 거쳐 발리 열흘, 이렇게 여행 다녀온 후기입니다. 이제 거의 한 달 전이지만 여행 중 거의 모든 하루의 순간순간이 아직도 꽤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집중하면 이렇게 기억이 더 오래 남는 걸까요.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고 여유가 생기면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뚜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한국에서도 그런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걸 계속 연습해보고 있어요! 너무 무리하는 것 역시 안 좋다는 생각으로 최근 며칠은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지만ㅎㅎㅎ
배낭 메고 요리조리 잘 돌아다니고 왔습니다. 한 달이 훌쩍 갔네요. 여행을 다니면서 최대로 행복했어요. ‘오늘 하루를 최대로 잘 보내겠다!’ 이런 마음이 매일같이 자동적으로 세팅되었던 것 같아요. 고작 한 달 나가 있었는데 처음 해본 것도 많고, 재미있었던 순간도, 감동 받은 순간도 많습니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은 오롯이 제 시간의 주인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이번 트립 중 새로 발견한 내 모습과 처음 해본 일 몇 가지, 그리고 하이라이트를 생각나는 대로 써보자면.
혼자 여행을 하며 발견한 내 모습
1. 나는 생각보다 부지런하다.
너무 부지런해진 나 자신이 생소할 정도로.
- 화산 트랙킹 하겠다고 새벽 1:30에 기상
- 요가 하겠다고 새벽 6:30에 기상
- 서핑하려고 새벽 6:20에 기상
억지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신나는 마음으로 벌떡벌떡 눈이 떠졌다. 치앙마이에서는 좋은 공간이 많아서 그런지 글을 거의 하루에 한 편씩 썼다. 발리에서는 너무 열심히 노느라 잘 못 썼지만.
2. 나는 생각보다 더 씩씩했다.
여행하다 돌발 순간(스쿠터 타다 야밤에 어두컴컴한 산속에서 길 잃었을 때, 서핑하다 다치고 피가 났을 때 등)이 찾아오면 나는 생각보다 침착하고 담담했다. 겁이 나기 전에 문제를 빨리 해결하자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생각해보면 겁이 고개를 내밀려고 할 때 ‘아냐, 너 거기 잠깐만 있어 봐’ 하고 겁이 밖으로 못 나오게 밀어 넣었다. 이런 일 이후에는 ‘그래, 더 이상 너무 무모하게 그러진 말자 혜윤아’ 하고 내 자신을 좀 타이르기도 했다.
3. 나는 생각보다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다시 깨달았을 뿐인 것 같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란 걸. 여유로운 시간이 많아지자 하고 싶은 일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매우 만족하게 되면서 자꾸만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 해본 일
혼자 배낭을 메고 동남아로 제대로 배낭여행 한 달 떠난 것부터가 처음이었지만.
1. 스쿠터 타기
빠이에서 첫 스쿠터! 빠이의 차 없는 시골길을 스쿠터로 달릴 때 기분 짱 좋았다. 거의 3시간은 연습하고 탔고, 무조건 안전이 최우선이고 왕초보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달렸으나… 빠이 캐넌에서 노을 지는 거 보고 돌아오는 길에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캄캄해진 길을 하이빔 키고 운전해서 돌아옴. ㅠㅠ
돌아오는 길에 길 개들이 멍멍 짖으면서 내 스쿠터를 쫓아와서 본의 아니게 스피드를 내야 했던 사건도 있었고(왜 내 스쿠터만 따라오니 얘들아ㅠㅠ), 잘못된 길을 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좀 당황한 나머지 스쿠터를 돌리다가 울타리에 살짝 박기도. 허허…
30분이면 도착하는 호스텔에 거의 1시간 반 걸려서 도착.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조심조심하면서 잘 살아서 돌아옴. 더 이상 너무 무모한 짓은 하지 말자고 되뇌었다.
2. 태국 음식 요리해 먹기
쏨땀, 코코넛 밀크수프, 팟타이, 파나낭커리, 망고와 스티키라이스. 이 5가지 음식을 해 먹었다.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짱맛. 제일 맛있었다. 고수를 완전 사랑하는 나에게 태국 음식은 사랑이다.
3. 코끼리 씻겨주기
하루는 컨저브 내추럴 포레스트(Conserve Natural Forests, CNF)라는 NGO 단체를 방문해 코끼리들과 놀아주었다. 코끼리들이 돌아다니는 대로 따라가고 밥 주고 씻겨주는데, 가까이서 보는 코끼리는 정말 신비로웠다. 눈이 예뻤고 피부의 감촉은 지구 같았다. 너무 멋진 동물.
CNF는 숲을 보존하고 나무 심는 일을 하는 단체다. 이들이 소유한 거대한 땅 위를 코끼리 두 마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다른 곳과는 달리 코끼리를 야생에 놓아주는 것을 목적으로 임신한 코끼리들이 아기를 낳고 야생에 적응할 때까지 코끼리를 돌본다.
이곳의 코끼리 두 마리는 구출돼서 빠이로 오기 전까지 치앙마이에서 3살 때부터 매일 8시간씩 사람을 등을 태우고 일했고 많은 시간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코끼리 학대도 동반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 코끼리를 타는 것은 코끼리를 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배웠다.
4. 발리에서 서핑 배우기
너무 타보고 싶었기에 전날까지도 한참 이미지 트레이닝했다. 서핑 타는 첫날, 발리는 파도가 착해서 그런지 첫 시도에 일어날 수 있었고 신이 나서 계속 팝업을 연습했으나… 잘 타고 나오는 길, 해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물도 매우 얕은 곳에서 잠시 래시가드를 매만지는 사이 파도에 휩쓸린 보드에 얼굴을 부딪쳤다.
처음 든 생각은 어이없게도 ‘아 나 다치기 싫은데, 더 타고 싶은데’였고 입에서 피가 나는 걸 본 이후에야 ‘헐, 많이 다친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만다행으로, 정말 너무나 다행이도 입술 안쪽만 좀 깊게 상처가 났고 지금은 잘 아물고 있다. 그렇게 나의 첫 서핑은 아쉽게도 하루로 끝났다는 이야기.
생각해보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이쯤 해서 너무, 너무, 너무 다행. 이날은 아파서 아무것도 못했다. 뭘 해도 건강이 최고임을 깨달은 날. 정말 얕은 곳일지라도 방심하면 안 되고, 꼭 보드를 잘 관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도 서핑은 정말 재미있다.
5. 새벽에 화산 트랙킹
1-2시간 눈 붙이고 새벽 1시 반에 우붓 숙소에서 출발. 거의 밤을 새우고 화산 올라가는 게 생각보다 빡셌다. 처음엔 ‘아 이거 쉽네 뭐’ 했는데 마지막에 정상에 오를 때는 나도 모르게 계속 “얼마나 남았어요?”라고 물어봤다. 꽤 가파르고, 어두워서 손전등 없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고, 모래라서 미끄럽고, 바위도 많고 돌도 많아서 내 짧은 다리로 헥헥 대면서 올라야 했다.
그래도 아무런 조명도 없는 캄캄한 밤에 쏟아지는 별 아래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산을 오를 수 있다는 점. 킨타마니 화산 위에서 바라본 일출은 말이 필요 없는 그림 그 자체였다. 살아오면서 본 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떠오르던 에어벌룬들을 봤을 때와 쌍벽을 이룬다.
운이 좋게도 날씨가 너무나 좋아서 360도로 모든 곳이 다 보였다. 크레이터도 한 바퀴 돌아 내려갔는데 옆에서 영국인 친구가 반지의 제왕 OST를 계속 휘파람으로 흥얼거렸다.
함께 산을 오른 두 명의 친구는 디지털노마드들이었다. 이들은 ‘나 디지털노마드 해야지!’ 이런 생각을 한 뒤 그런 삶을 살게 된 건 아니고, 그냥 런던에서 다니고 있던 회사가 원격 근무를 도입하기 시작해 회사의 60-70%가 재택근무나 원격근무를 하게 되면서 2-3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이런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킨타마니 화산 정상에서 본 일출은 아무리 감탄을 해도 모자라다. 마을을 감싼 안개와 저 멀리 겹쳐 보이는 두 개의 산, 그 사이의 바다와 내 주변의 원숭이들과 킨타마니 산 그 자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지구는 정말 아름다운 별이야.
도시별 하이라이트
1. 치앙마이
자신의 패션 브랜드를 만드는 언니를 따라 언니의 일상을 엿본 것이 하이라이트! 애초 치앙마이의 디지털노마드들이 궁금했으나… 좋은 카페, 좋은 공간이 너무 많고 언니의 곁에서 본 아티스트 커뮤니티가 너무 재미있어서 코워킹스페이스 캠프는 딱 한 번 가보고 말았다.
빼먹을 수 없는 순간은 화요일 밤 노스게이트에서 펼쳐진 즉흥 잼의 마법. 이너프포라이프의 공간과 음악. 베어풋(barefoot) 피자랑 파스타 또 먹고 싶다.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바빴던 언니의 일상에 함께하며 같은 시장을 가도 ‘옷’과 ‘패션’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언니의 생각을 듣는 것만으로도 새롭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좋았던 공간 천지라. 너무 많아서 두 번에 걸쳐 정리해두었다.
2. 빠이
왜 유토빠이라고 하는지 알겠더라. 진정한 히피들의 성지! 키워드는 스쿠터와 코끼리다. 우연히 만난 친구의 친구들, 매일 아침 글쓰기 좋았던 호스텔과 내가 만났던 재미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3. 씨엠립
아무런 관광도 하지 않고 3일 동안 현지인처럼 지내다가 왔다. 도착한 날 폭우가 쏟아져서 전기가 끊기기도 했지만 보석 같은 기억이 많이 생긴 3일. 톨라의 식구들과 물총 싸움도 하고, 시장도 가고, 수영장도 가고, 마을을 돌아다니고. 야밤에 집 앞에 노래를 틀어 놓고 벌어진 어느 대가족의 댄스파티에 끼기도 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축제에 껴서 아이들과 춤을 추기도 하고.
나중에는 톨라의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이웃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고 눈인사를 건넬 때는 진짜 현지인이 된 기분이라 새삼 즐거웠다. 씨엠립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눈망울과 웃음, 가장 순수한 형태의 행복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톨라와 함께 나눈 이야기들은……. 나에게 앙코르와트보다 소중한 곳.
4. 싱가포르
이곳에서 일하는 좋아하는 친구를 보러 간 목적이 컸다. 도착한 날은 씨엠립에서의 나의 하루들과 너무나 격차가 커서 적응이 안 됐다. 구경할 때는 가든 바이 더 베이(Gardens by the bay)에 매료되었다.
어렸을 적 이후로 처음 방문한 싱가포르는 도시 전체가 약간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이 자연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만든 유토피아처럼. 유토피아 책을 읽어보면 유토피아는 사실 완벽해 보이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규율과 압박의 지배를 받는 디스토피아란 의미도 유추해낼 수 있는데, 그런 것까지도 살짝 비슷한 의미로.
5. 발리
우붓은 4박을 예약했는데 너무 좋아서 꾸따에서 서핑한 3일을 포함해 총 일주일을 머물렀다. 발리는 정말 ‘신들의 섬’. 특히 우붓을 포함해 어딜 가나 신성한 느낌이 가득했고, 이끼 낀 동물 동상과 돌이 여기저기 있어서 섬 전체가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같았다. 볼 게 너무 넘치는 발리. 열흘 가지고는 모자랐어. 또 가야지.
특별히 기억나는 건 단연 바투르 새벽 트랙킹 후 본 일출. 혼자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가랑비 맞으며 걸었던 끝이 안 보이는 자띠루이(Jatiluwih) 라이스필드. 우붓에서 초록초록 풀들 보면서 명상하고 요가하기.
밤에 킨타마니 가는 버스 기다리면서 산타나와 나눈 이야기. 닫혀 있는 산타나의 갤러리에 방문한 것(박물관 수준으로 많았던 소장품!), 산타나가 매일 아침 해준 밥, 공사 중인 건물 위로 올라가 시켜 먹은 우마 피자와 빈탕, 노을. 그리고 꾸따에서 서핑하다 다친 것.
마지막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발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 두 달 전 씨엠립 호스텔에서 만나 함께 놀았던 캐나다인 친구를 마주쳤다. 진짜 이게 무슨 우연! 세상이 이렇게 좁다.
여행 후 바뀐 게 있다면
대단한 건 없고 한 달이었지만 놀기를 잘했다는 생각. 나와 조금 더 친해진 느낌. 그리고 그냥 해보고 싶은 게 생긴 상태. 여행 중에 떠올렸던 해보고 싶은 일이 나만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이어지게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분이 공감해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하고 신기하다. 앞으로도 여행 계획이 잡혀있다. 또 어떤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두근거린다.
원문: 정혜윤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