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가장 큰 상처로 남는 것 중에 이산가족 문제는 떨쳐낼 수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이에 대한 많은 사연이 있지만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신기록 육상선수로 주목받았던 신금단 선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부녀의 이산가족 상봉은 10년이 넘는 이별 후에 주어진 10분간의 만남이었습니다.
신금단의 1964년 도쿄 올림픽
1964년 일본 도쿄에서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한국 선수단과 북한 선수단 모두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비교적 부담이 덜한 올림픽이었고, 그래서 기대도 더 높았습니다. 더구나 도쿄 올림픽은 아시아 최초의 올림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금단’ 선수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며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신금단은 북한의 여자 육상선수였습니다. 1963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가네포’에서 열린 ‘신생국 경기대회’에서 비공인이지만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기대를 받고 있던 선수였습니다. 이런 신금단 북한선수의 소식이 알려지자 남한에 있던 아버지가 그 소문을 듣고 대한올림픽위원회에 찾아가 호소를 했던 것입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이전에는 남한과 북한 모두 후진국으로서 메달 수상 가능성 자체가 무척 귀했습니다. 참고로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에서 첫 번째 금메달을 땄습니다. 은메달, 동메달도 1948년부터 1964년이 될 때까지 모두 3개에 불과했습니다. 이때는 동메달만 따도 국민들이 구경 나온 도로에서 카퍼레이드를 하던 때였습니다.
신금단 부녀의 상봉이 있기까지
1951년 1.4후퇴 때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남한에 내려와 있던 신금단의 아버지는 신문에서 딸의 소식을 보고 놀라고 말았습니다. 월남 당시 딸의 나이는 겨우 12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2년 만에 듣게 되는 딸의 소식인데, 그런 딸이 도쿄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북이 갈라서서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던 딸을 만나볼 기회였습니다.
북한은 1963년까지 남한의 방해로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IOC의 규정에 따라 1국가 원칙이 적용되어 남한만 올림픽 출전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1964년 도쿄 올림픽부터 정식으로 출전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니 신금단이 북한 올림픽 참가 사상 첫 대회 첫 금메달을 안겨 줄 것인지 북한에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남한 육상연맹에서 딸을 보기 위한 아버지의 애틋한 소식이 북한 육상관계자에게 전해졌습니다. 남북 당국은 비공개적이었지만 이들의 이산가족 상봉을 허락하였습니다. 1985년 첫 공식 이산가족 상봉을 가지기 이전 남북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이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성사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도쿄 올림픽에 참가하는 북한의 신금단 선수는 이미 공산국끼리 경쟁하는 ‘즈나멘스키 형제상’ 육상대회에서 2회 연속으로 1위를 하며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1963년 가네포 대회에서 200m, 400m, 800m 금메달을 목에 걸며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었으며, 여기에서 세계신기록을 두 개나 세웠숩니다. 그러나 카네포 대회는 IOC가 정치적 체육대회라고 지목하여 모든 기록이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신금단 부녀의 만남
13년 만에 딸을 만난다는 부푼 꿈을 안고 신금단의 아버지는 도쿄 올림픽 개최 도시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가네포 대회였습니다.
IOC의 제재방침에 따라 가네포 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의 올림픽 참가가 금지되었습니다. 북한 선수단은 항의하였고, 결국 올림픽을 보이콧하고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했습니다. 신금단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원래는 도쿄 올림픽이 끝난 후 만남을 가지기로 했었지만 갑작스런 북한 선수단 철수로 인하여 신금단 부녀의 이산가족 상봉은 무산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철수 전에라도 만남을 가지자는 얘기가 계속되었지만, 이번에는 장소 문제로 계속 미루어졌습니다.
전쟁을 치룬지 10년 남짓 된 남북의 입장 차이는 가족 간의 인도적 문제보다도 우선되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스로 철수 전 만남이 성사되었지만, 주어진 시간은 겨우 10분이었습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 개막 하루 전, 도쿄의 한 조선회관에서 드디어 신금단 부녀의 첫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습니다. 공식적인 만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잠깐 동안만 가능했습니다.
13년 만의 상봉에 두 부녀는 울음을 머금으며 이름을 부른 후 얼싸안았다고 합니다. 신금단 선수와 그 아버지는 가족의 안부를 전한 후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범벅이 되었습니다.
너무 오랜 이별 뒤의 짧은 만남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시간은 계속 흐르고 두 사람은 손을 꼬옥 쥘 뿐이었습니다. 감시를 하던 청년은 7분 남짓한 시간이 다 되자 가자고 재촉하였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신금단 선수를 데려오려고 남으로 오라는 말을 전하게 했지만, 딸은 거절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이렇게 헤어진 후 신금단 선수의 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딸을 더 보고 싶어서 우에노 역에까지 따라나섰고, 역장실에서 아주 짧은 만남은 한 번 더 이루어졌습니다.
이 일은 이산가족을 둔 사람들에게 무척 극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래서 그해 가수 황금심은 <눈물의 신금단>이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살펴봐야 할 이산가족의 한
이후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이루어지며 이산가족 상봉문제를 다시 협상했지만, 신금단 부녀의 상봉 이후 무려 21년 동안 단 한 건도 상봉이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신금단의 아버지는 딸을 다시 한번 더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다시 보지 못하고 1983년에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이후 이산가족 찾기 남북 접촉이 이루어져서 1985년이 되서야 실질적인 상봉이 가능해졌습니다. 신금단 선수는 북한에서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고 후배 육성에 전념했으며, 아직 북한에 생존해 있습니다.
탈북 새터민 이외에도 6.25전쟁 등을 통하여 이산가족으로 신청된 인구는 약 12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중 60% 가까이가 이미 운명을 달리했고, 아직 남은 인구도 6.25전쟁 때 무척 어린 나이였기에 실질적인 1세대 이산가족은 거의 사망한 상태입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온 국민의 마음을 울렸던 신금단 부녀의 한은 곧 실향민과 이산가족 전체의 한입니다. 이제라도 한동안 거의 잊혀졌던 이산가족의 아픔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다시 한번 더 내 일처럼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이들을 치유할만한 시간도 이제는 많지 않으니 말입니다.
원문: 키스세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