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20일-사북노동항쟁 발발
1980년 오늘(4월 21일) 오후 2시께,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인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에서 탄광 노동자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70년대 정부의 노동3권 탄압 등으로 인한 기본권 제약에다 저임금과 어용노조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이후 유혈사태까지 초래한 이 ‘사북노동항쟁’은 회사와 유착된 어용노조의 지부장이 회사의 요구대로 소폭의 임금인상을 결정하자 분노한 노동자들이 지부장의 사퇴를 촉구하면서 시작되었다.
“노동귀족, 노조지부장은 물러나라!”
4월 19일, 30여 명의 노동자들은 노조 사무실을 방문하여 ‘노동귀족, 노조 지부장은 물러나라고 요구하고 지부장이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기에 이르렀다.
노동자 한 명이 연행되자 광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집회를 갖기로 하고 경찰에 집회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경찰이 약속한 집회를 불허하고 지부장이 행방을 감추자, 노조 사무실 앞에 모여든 노동자들의 항의는 시위로 발전했다.
오후 4시께가 되자 모인 노동자들은 2백여 명을 넘었다. 기동경찰까지 출동시킨 경찰은 불법집회라며 해산을 요구했지만 노동자들은 집회를 약속한 사북지서장에 대한 항의와 함께 지부장 면담을 강하게 요구했다.
노동자들의 강경한 태도에 겁을 집어먹은 경찰이 지프차를 돌리려고 하자 광부들이 약속을 지키라며 차를 가로막았다. 경찰은 그대로 차를 몰아 두 명의 광부가 차에 치여 중상을 입었다. 이 사고를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노동자들의 분노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광부들, 경찰의 폭력 앞에 폭발하다
진작부터 회사 측과 유착하여 노조활동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있었던 지역 경찰, 정보기관 등 공권력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신은 마침내 경찰의 폭력 앞에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21일 저녁부터 몽둥이와 곡괭이를 들고 모여든 광부들은 지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지부장 퇴진, 어용노조 타도를 외치며 경찰지서에 불을 지른 뒤부터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흥분한 노동자들은 회사 간부와 노조 지부장과 부지부장의 집으로 몰려가 집기를 부수거나 불태웠다. 어용노조가 시위의 불씨였다면 경찰의 부당하고 부적절한 대응은 시위를 폭발적으로 상승시킨 뇌관 구실을 한 셈이었다.
이제 사북에서는 경찰 공권력 대신 노동자들이 지역을 장악한 상황이 되었다. 22일 오전 9시께에는 노동자와 노동자의 부인까지 몰려와 지부장을 찾다가 지부장 대신 이웃집에 숨어 있던 지부장의 부인을 찾아냈다. 노동자들은 그를 광업소 게시판에 묶어놓고 구타했고 옷을 벗기는 등 린치를 가했다.
오전 10시께 강원도경 국장이 이끄는 4백여 명의 경찰 기동대가 출동했다. 노동자와 가족 4천여 명은 사북광업소 입구의 안경다리를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치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지부장만을 요구할 뿐이다. 경찰이 쓸데없이 개입하여 사건을 확대시키고 있다”고 사태의 본질을 환기했지만 이내 경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포탄과 최루탄까지 쏘면서 밀어붙이는 경찰들의 공격에 일시적으로 흩어졌지만 막장노동으로 단련된 광부들은 결사적인 대응에 나섰다. 노동자들이 돌을 던지며 저항한 3시간 동안의 충돌로 순경 1명이 죽고 70여 명이 부상했다. 안경다리 싸움에서 승리한 노동자들은 도망가는 경찰을 쫓아 공격에 나서면서 사북지서까지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오후 2시께에는 사북에서 공권력이 완전히 사라졌다. 노동자들은 철도와 도로 등 사북지역으로 진입하는 통로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역 주민 외의 외부인의 통행을 통제했다. 광산촌 사북은 노동자들의 손에 장악된 것이었다.
사북, 광부들에게 장악되다
군이 투입된다는 잘못된 정보가 퍼지면서 광부들은 예비군 무기고와 회사 화약고를 점거하여 비상사태에 대비했다. 화약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던 노동자들은 교대로 철야로 화약고를 관리했다고 한다.
사북 지역의 항쟁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언론에는 이에 대한 보도가 일체 없었다. 사건이 외부에 알려질 경우 민심이 들끓을 것을 우려한 군부독재의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항쟁이 종결될 무렵에야 언론은 항쟁의 경과를 보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보도는 항쟁의 본질보다는 노조파벌 싸움이나 불순분자의 난동 따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무지렁이들의 폭동’이거나 ‘술 취한 광부들의 무법천지’ 등으로 몰고 가려는 신군부의 노골적인 개입에 따라 언론은 노동자와 경찰과의 투석전, 노조지부장 부인의 린치사건을 전면에 내세웠다. 노동자들이 화약고와 무기고를 탈취한 것으로 왜곡 보도하면서 광부들을 사주를 받거나 불순한 의도를 지닌 폭도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21일 밤에서 22일 오전 사이에 벌어진 여러 차례 습격은 회사와 공권력, 어용노조와 관련된 장소에 국한되었다. 보도처럼 시장이나 민가에 대한 무차별적 습격은 거의 없었으나 당시 기사들은 대체로 아래와 같이 부정적인 것이었다.
“술을 마시고 과격해진 이들의 난동에 광부가족까지 합세, 한때 7천명까지 늘어났던 난동 군중들은 출동한 경찰관과 투석전으로 맞서 경찰관 1명이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던 중 숨졌고”
– <광부 3천5백여 명 집단난동> (경향신문,1980. 4. 24.)
“광부들은 술에 취한 채 사북에서 외곽으로 통하는 육로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교통을 차단, 사북파출소 광업소사무실 등을 파괴하는 등 사북일원의 행정을 마비시키고 거리를 휩쓸면서 무차별 폭력행사를 하는 바람에 사북읍 일대는 나흘째 고립상태”
– <광부 700여 명 유혈난동>, (동아일보, 1980.4.24)
“평화로웠던 광산촌이 광부들의 난동으로 하루아침에 공포의 거리로 변했다. 연4일째 폭도로 변한 광부들에 의해 점거된 사북읍은 상가가 철시하고 주민들이 문을 걸어 잠근 가운데 술냄새를 풍기며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 광부들만 오가는 죽음의 거리였다”
– <무법 휩쓴 공포의 탄광촌>, (조선일보, 1980.4.24)
4월 22일 15시께부터 노동자와 주민대표로 구성된 시위대 측 협상단과 회사와 경찰 지휘부, 광산노조로 구성된 ‘대책본부’ 간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이견이 커 진전이 없었지만 4월 24일, 노동자 대표들과 정부 당국과의 협상 끝에 극적 타결이 이루어졌다.
- 최종 합의된 11개 항은 다음과 같다.
- 이재기는 이미 사퇴했음.
- 부상자 치료비 및 보상금 일체는 회사에서 책임진다.
- 피해 주택 복구비도 회사에서 전액 부담한다.
- 하청업자 종업원의 임금인상도 최대한 보장토록 노력한다.
- 신용조합 운영에 있어서 부실한 원금에 대하여는 회사에서 지급한다.
- 79년도 징계로 인한 상여금 삭감분은 즉시 회사에서 지급한다.
- 이번 사태로 쉰 4일간에 대하여는 휴업수당을 지급한다.
- 현재 250% 상여금을 400%까지 인상하여 분기별로 지급한다.
- 1~2월 임금인상 소급분 20%는 5월 말까지 지급하고 탄가 인상시 재조정
- 경찰당국은 이번 사태 수습에 절대로 실력행사를 하지 않기로 한다.
- 금번 사태에 대한 문제는 회사와 당국이 최대의 노력으로 원만히 해결되도록 한다.
– 광산노조, <사북사태 발생에 대한 진상> 중에서
나흘간 항쟁, 극적 타결, 그 이후
사북항쟁은 노조 지부장 사퇴, 사태 수습에 경찰의 실력행사 배제 등 11개 사항을 합의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는 도시를 장악하면서 나흘간 치열하게 전개된 사북항쟁은 자본과 권력의 지속적인 억압과 착취에 맞서 생존권을 지키고자 한 탄광 노동자들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다음 달인 5월에 항쟁을 지도한 노동자들에게는 신군부의 끔찍한 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엄사령부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은 200여 명의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하여 가혹 행위를 자행하였다. 검찰은 31명을 구속 기소하고 50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81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했다.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1980년 4월 24일 사태가 해결되고 5월 6일 오후 6시 당시 읍장이 회의를 한다고 해서 읍사무소에 참석했다. 읍장이 인사말을 하는 순간 문이 열리며 수십 명의 계엄군이 총칼을 앞세워 ‘불법집회로 모두 체포한다’고 연행해 갔다.
당시 주모자로 100여 명이 계엄군에게 붙잡혀가 남녀를 불문하고 쉬는 시간도 없이 물고문과 폭행을 당했다. 옆방에서 나는 비명 소리를 매일 밤 듣다 보니 모두 죽음을 생각해야 했다.
군화발로 걷어차는 것은 예사고 몽둥이와 총으로 내려치고 타올을 얼굴에 씌우고 고춧가루를 넣은 주전자로 물고문을 했다. 이 때문에 몇 사람은 출소 뒤 요절하기도 했고 수십 명은 아직도 그 후유증에 고생하고 있다. 구속영장은 체포 14일 만인 5월 20일 발부됐다.
– 2016.12. 8. 인터뷰에서 이원갑
이후 이원갑 등 7명은 실형을 선고받고 21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2005년 항쟁 주도한 이원갑과 신경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고 2008년 4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에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계엄 당국이 과도한 공권력으로 노사정 합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지역공동체를 파괴하고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국가는 당시 연행·구금된 관련자와 가족들에게 인권침해와 가혹 행위에 대해 사과하라.
서울고법의 재심에서 재판부는 항쟁을 주도한 이원갑·신경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들이 불법집회를 열지도 광부들을 선동하지도 않았고 경찰과 군 검찰이 20여 일간 불법 구금하고 물고문과 구타로 받아낸 허위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가 영업을 시작한 것은 1963년이었다. 1974년 석탄 100만 톤을 생산하고 1978년 국내 석탄 생산량 1위에 오르기까지 사북광업소는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다. ‘개들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 시절이었다.
2004년, 사북광업소 문을 닫다
그러나 사북광업소는 1989년 석탄합리화 정책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2004년, 45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리하여 동원탄좌 사북광업소는 정선군 석탄산업의 막을 내리게 한 마지막 탄전이 되었다. 사북광업소 자리에는 사북석탄유물보존관이 들어서 과거의 삶과 영광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사북노동항쟁은 성격은 황인오가 쓴 <사북사태 진상보고서> 맺음 부분에서 잘 드러나 있다. ‘사북의 광산 노동자들은 그 집단성과 주민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80년대 노동 현장을 예언한 것이었다’는 그의 결론은 이후 전개된 노동 운동을 새삼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사북의 광산 노동자들과 주민항쟁은 당시 언론에서 ‘막무가내의 지옥거리’라고 지적한 것처럼 무분별한 난동이 아니었다. 또한 회사 측이나 정부의 발표처럼 노조의 주도권을 둘러싼 노조파벌싸움에 기인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언론과 사회 일각에서는 항쟁과정 중 광부들과 주민들의 폭력을 이유로 들어 ‘난동’으로 지적하였으나 이들 광부들의 폭력은 난동시 나타나는 무차별적인 폭력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광부들의 폭력은 그동안 그들의 분노를 극도로 조장시켜왔던 대상, 즉 어용노조 간부들과 회사간부들의 사택, 어용노조의 상징격인 조합 사무실과 광업소 사무실, 그리고 이재기 씨의 부인 등에 국한되었던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 광부들과 주민들은 그 누구의 통제에도 따르지 않던 상황에서 노동자들과 자주 접촉이 있는 광업소장 등에 대해서는 예우를 갖추었고, 무기고를 스스로 지키는 한편, 순찰대를 조직하여 치안유지에 힘썼던 것이다.
또 사북항쟁의 원인을 전적으로 노조 내 파벌 싸움에 기인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 처사에 불과하다. 고립무원의 탄광지대에서 회사의절대적 횡포 등 산적한 노동문제로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광부들이 유일하게 기대를 걸 수 있는 곳은 노동조합뿐이었다. 노조의 민주화와 정상화는 생존을 위한 광산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요구였다.
4월 21일부터 4일 간에 걸쳤던 사북 광산노동자들과 주민들의 대규모 항쟁은 그들의 삶과 생활을 위협하고 있던 노동조건의 개선, 최저 생활비 보장, 직업병 등에 대한 구제책 마련, 노조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의 실현 등을 보지 못한 채 일시적인 사건수습 차원에서 끝을 맺었다. 이것은 광산 노동자들이 미조직된 상태에서 외부의 절대적인 물리적 힘 앞에서 그들의 요구를 계속적으로 관철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산노동자들의 목숨과 맞바꾸고 있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살인적 임금구조가 개선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생존 요구인 노동조합의 민주화와 이를 위한 제도적 개선 및 노동정책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사북항쟁은 계속될 노동자항쟁의 서막에 불과할 것이다. 사북의 광산 노동자들은 그 집단성과 주민들과의 연대성 속에서 80년대 노동 현장을 예언한 것이었다.
– 황인오, <사북사태 진상보고서> 맺음 부분에서(조세희 <침묵의 뿌리>에서 재인용)
출처: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