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런 관점에서는 대형 단설 유치원 신설은 자제하고, (환호) 지금 현재 사립유치원 운영에 대해서는 독립 운영 보장하고 (환호), 시설 특성과 그에 따른 운영 인정할 겁니다! (환호)”
너무 티가 나잖아
지난 4월 11일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사립유치원 유아 교육자 대회에서 발언한 영상이다. 사건 이후 자녀들을 유치원에 보내는 학부모들의 분노가 터져 나왔다.
공립 단설 유치원 신설을 막겠다는 입장이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안 후보는 왜 하필이면 그 자리에서 이런 발언을 한 것일까? 사립유치원 단체가 대표적인 이익집단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최순실도 유치원 부원장이었는데…)
1. 어린이집은 치킨집보다 많다: ‘국가가 허락한’ 영유아 기관 민영화
한국에서 유독 인기가 좋은 자영업체는 치킨 전문점이다.[i] YTN의 기사에 따르면 2013년 기준 국내 치킨 전문점은 맥도날드보다 많았다. 퇴직 세대의 ‘생계형 창업’으로 풀이된다. 인구 1,400명당 치킨집에 하나씩 있는 꼴이다. 선거철에는 ‘치킨집 사장님’ 표만 해도 충분한 집단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그 치킨 사장님보다 많은 집단이 있다. 바로 ‘보육시설 원장님’이다. 전국의 어린이집은 4만여 곳을 훌쩍 넘고, 유치원 역시 2015년 기준으로 9천 곳에 육박한다.
2012년 ‘무상보육’과 ‘누리 예산’, 어린이집의 경우 비록 2013년 4만3770곳을 정점으로 ‘어린이집 폭력사태’로 인한 가정 육아 증가와 경영난 속에 감소 추세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4만 선을 웃돌고 있다. [ii] [iii]
영유아의 교육/보육 시설은 지난 20년간 ‘블루오션’이었다. 어린이집은 1995년의 9,000여 곳에서 18년간 4.7배 증가했고, 2009년의 3만 5,000여 곳에 비해서도 20% 증가했다. 치킨집이 당장 살길이 막막한 (남성) 퇴직자들의 창업이었다면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경력 단절 여성 등이 뛰어들기 쉬운 창업처였던 셈이다.
한국의 복지국가 발전 경로는 다른 나라와 매우 달랐다. 성경륭의 연구[iv]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복지 확대는 정당 간 선거경쟁이 증폭되면서 진행된 특이한 사례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문재인 후보 간에 벌어졌던 복지 공방을 기억해보자.
지금 아이를 보육시설에 보내고 있는 부모 세대의 유년기를 되돌아보면 놀라운 변화다.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만 해도 육아는 전적으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몫이었고, 유치원은 물론 어린이집을 다닌 경우도 많지 않았던 세대다. 그런 보육 수요를 충당하던 가정 양육이 상당 부분 영유아 시설에 공이 넘겨졌다.
IMF와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해체에 따라 복지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나, 중앙과 지방을 막론한 정부의 복지 지출이 상당히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요는 충분히 만족되지 못했다.
그 빈자리를 급하게 매운 것이 바로 민간 부문의 복지다. 한마디로 복지가 ‘민영화’ 된 것이다. 영유아 시설의 경우 불과 5%만이 공립이고, 95%가 사립이다.
2. ‘젊은 회사원’이 어떻게 ‘중년 사장님’이 되는가
유치원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모자란 상황에서, 단설 공립 유치원 신설을 자제하겠다는 안철수 후보의 입장은 안일하다.
복지 수요자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건 물론이며, 낮은 출산율과 여성의 경력단절, OECD 최악의 가사분담률과 같은 한국의 사회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한 머릿수를 자랑하는 ‘원장님’들에게는 이런 공약은 다른 공약으로 들릴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에 기반한 계급 정체성 정치”는 어렵다. 자영업자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트럭/건설차량 운전자나 학습지 선생님, 요쿠르트 판매원처럼 개인 사업자로 분류되어 노동자성을 인정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비슷한 상황이 노인 복지에서도 벌어질 조짐이 있다. 이미 2013년 전국의 사회복지사 수는 60만을 넘겼으며, 이 가운데 ‘센터’를 창업할 수 있는 1급 취득자는 10만을 넘었다.
[v] 이들은 잠재적으로 분명히 사회복지 노동자지만, 동시에 센터를 창업하면 ‘사장님’이 될 수 있다. 이들의 상당수는 40대 이상이며, 특히 1급으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2급 자격증은 50대 이상 취득자가 20대 보다 근소하게 더 많다.)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신중산층'(화이트칼라) 야권 지지는 매우 두껍지만, 퇴직 후에는 살아남기 위해서 ‘사장님’의 길을 선택한다. 여기에 창업을 고려하고 있는 ‘잠재적 사장님’까지 따지면 계급성은 크게 옅어진다. 50대 구간에서 급격하게 일어나는 지지정당의 변화도 이런 변화와 큰 관련성이 있다. 한국 사회의 고령화를 고려하면 무시할 수 없는 변화다.
3. ‘학부모’를 버리고 ‘원장님’을 선택한 안철수
트위터에서 안철수의 단설 유치원 자제 공약에 대한 반응은 특정 세대/계급을 과대 대표할 수 있다. ‘학부모가 많은지, 유치원 원장이 더 많은지 두고 보자.’는 식이다. 물론, 유치원/어린이집 학부모가 수는 훨씬 더 많다. 하지만 급격하게 지지율이 상승한 안철수 후보에게는 다를 수 있다.
먼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학부모 세대 내에서도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DC 인사이드의 주식갤러리에는 하루 뒤 안철수 후보의 공약에 우호적인 분석 글이 올라왔다.
[vi] 서울대학교 커뮤니티인 ‘스누라이프’에서 옮겨온 이 글은 4월 13일에 있었던 대선후보 TV 토론회에서 안철수 후보가 주장한 맥락과 일치한다. 당장 단설 유치원을 건립하기에 예산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는 논리다. 이런 주장들이 등을 돌린 유권자를 설득하기엔 역부족이겠지만, 더 이상의 이탈을 방지하기엔 충분한 방어 논리다.
가장 우려되는 상황은 이 공약이 적어도 영유아기관의 경영자들에게 후보가 자신들의 편이라는 확실한 신호를 주었을 때다. 세대별 지지성향이 크게 갈리는 지금의 대선 상황에서, 안철수 후보에게 젊은 부모세대는 자신에게 덜 선호적인 유권자 집단이다.
적극적으로 문재인 후보와 보육 정책 경쟁을 벌인다고 한들 차별성 있는 지지를 받기 힘들다. 반면 사립 영유아 기관의 경영자들에게는 이런 발언만으로도 확고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 상대의 지지기반을 공략하기보다는 자기 지지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쉬운 일이다.
이런 여러 정황을 고려하면, 안철수 후보의 ‘나쁜’ 공약이 선거에서는 지지기반을 결집시키는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안철수 후보의 이런 행보가 지난 총선 국민의 당 비례대표 후보였던 최도자 전 한국어린이집 총연합회 부회장과 연계되었음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는 자사의 4월 2주차 주중 동향[vii]에서 유치원 발언과 안철수 후보 지지율의 등락을 연계시켜 분석했지만, 이틀간의 오차범위 내의 변화를 두고 발언과 지지율의 유의미한 인과관계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은 2014년 지방선거를 보육교사 공무원화 공약을 둘러싸고 팽팽한 설전을 벌인 경기도 지사 선거를 연상시킨다. 글쓴이 본인은 이 과정에서 대단히 충격적인 경험을 했다.
항상 야권에 우호적이었던 지인 한 명이 지방선거에서는 정색하며 남경필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었다. 그 지인의 어머니는 경력단절 이후 사립학교 교사였던 경험을 살려 유치원 원장이 되었다.
그 후 “정부의 개입이 너무 심해서” 수익이 나지 않는 유치원을 그만두고 영어유치원을 차릴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 영어유치원은 유아 교육기관으로 분류되지 않는 사설 교육기관이다. ‘유치원 평준화’에 대항하는 흐름인 셈이다) 출구 조사 결과와 달리 남경필 현 지사는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혹자는 ‘유치원 원장이 지역 유지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총선/지방선거와 대선은 다르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서울 근교와 교외 지역의 표심이 판이했던 2012년 대선 결과를 되돌아보면, 과연 이런 흐름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4. ‘좋은 공약’이 ‘불리한 공약’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이 글은 공익적으로는 ‘나쁜 공약’이 선거에서는 유리한 공약이 될 수 있다는 현실에 대한 설명이다. 여러 이유로 문재인 후보의 우위는 선거 종반까지 유지될 가능성이 크지만, 문제는 집권 이후에 있다.
지난 20여 년간 민간에 넘겨진 아동 복지를 국영화, 최소한 공영화 시키는 과정은 단단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저항은 세대대결, 계급대결의 이름으로 나타날지 모른다.
그 저항을 단순히 극복되어야 할 ‘기득권’과 ‘부역자’의 저항이라고 절하한다면, 새 정부는 10년 전 겪었던 고립을 되풀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좋은 공약’이 ‘불리한 공약’이 되지 않기 위해 더 세심하고 준비된 복지 정책이 필요하다. 악마는 언제나 디테일에 있는 법이다.
[i] YTN을 재인용하면, 통계청 조사 결과 “2013년 기준, 가맹점으로 등록된 국내 치킨 전문점 수는 2만 2천500여 곳으로 편의점 2만 5천여 곳 다음으로 많”다. KB 경영연구소의 2013년 자료에서는, “국내 치킨 전문점 수는 10년간 연평균 9.5%씩 늘어나 3만 6천 곳에 달”해, “맥도날드의 전 세계 매장 수 3만 5천여 개보다 많”았다.
<‘우후죽순’ 치킨집, 전 세계 맥도날드 매장보다 많아>, YTN, 2015년 10월 5일.
[ii] < 올해만 어린이집 764곳 폐업 속출>, 조선일보, 2015년 7월 10일,
[iii] < 역행하는 유치원 정책… 公立 가기 더 힘들어진다>, 조선일보, 2015년 9월 20일
[iv] 성경륭.2014.”한국 복지국가 발전의 정치적 기제에 관한 연구: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비교”. 『한국사회학』.48(1):71-132
[v] 사회복지사 자격증 발급현황, 한국사회복지사협회, 2013년 9월 10일
[vi] [주념, 스압] 안철수 유치원 공약 냉철한 분석(feat.서울대), DC인사이드주식갤러리, 2017년 4월12일,
[vii]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대표 이택수)가 MBN·매일경제 의뢰로 2017년 4월 10일(월)부터 12일(수)까지 3일 동안 전국 15,518명에게 통화를 시도해 최종 1,525명(무선 90 : 유선 10 비율)이 응답을 완료한 2017년 4월 2주차 주중집계 여야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이다. 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