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경제학자를 미워하네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천하의 암군 역을 맡은 배우 잭 글리슨. 그는 시청자 모두의 혈압을 10mmHg쯤 높인 명연기로 ‘가장 짜증 나는 드라마 캐릭터’로 선정되었으며, 원작자로부터 “모두가 자네를 미워하네”라는 극찬(?)을 듣기도 했다. 이렇게 세간에는 시청자들에게 미움을 한 몸에 받음으로써 명연기를 증명하는 악역 전문 배우들이 있다.
어쩌면 경제학자도 비슷한 존재일지 모른다. 그들은 마치 사람들을 짜증 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찬 청사진을 그려 놓으면, 경제학자들은 먹물로 큰 가위표를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아.”
더 화가 나는 사실은 그들의 말이 대체로 맞다는 것이다. 훌륭한 경제학자들은 모두의 미움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훌륭한 경제학자임을 증명한다(?).
2017년은 불황에 대한 우려와 함께 다가왔다. 우리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경기 침체와 싸우고 있다. 새로운 희망이 될 줄 알았던 장미 대선은 분위기가 심상찮다. 경제학자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더 우울한 미래를 대비하라 말한다.
그 와중에 세계 경제의 파이는 계속해서 커질 것이라는 얘길 들으면 귀가 솔깃하다. 그 이야기를 한 것이 모두가 고유가 시대를 이야기할 때 저유가 시대가 도래할 가능성을 얘기한 인물이라면, 그리고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를 망치지 않을 것이라 말했던 전문가라면 더욱 그렇다. 희망찬 청사진 위에 큰 동그라미를 그려주는 경제 전문가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거대한 전환』은 바로 그런 책이다.
중국이 부상하면 누군가 가라앉는다?
중국의 부상으로 인한 세계 경제의 격변, 혹 천장에 부딪친 중국 경제의 침체는 경제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우울한 시나리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사실 중국이 부상할 것이며 경제 중심축이 신흥국들로 어느 정도 이동할 것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트럼프는 아예 자이-나(Ji-na)…, 아니, 중국이 일자리고 뭐고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있다며 미국인의 감정을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역이란 그런 것인가? 저자가 말하듯 ‘메이드 인 차이나’의 시대에서 ‘보우트 바이 차이나(bought by china, 중국의 구매)’의 시대로 시대가 옮겨가고 있다. 사드 설치로 인한 중국의 보복, 금한령 및 유커 관광 금지 조치는 그 정도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분명 국내 경기에 타격을 준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보우트 바이 차이나’의 시대가 오고 있단 반증이기도 하다.
중국은 다른 나라를 잡아먹는 게 아니라 신흥국 경제 성장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힘의 균형이 중국으로 다소간 이동한다 해서 다른 국가의 경제가 침체되진 않는다. 서구권도 마찬가지로 독일의 제조업, 영국의 금융 서비스 등이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고 수출될 것이다. 무역이란 원래 그런 게임이니까. 사람들은 무역을 누군가가 얻으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곤 하지만, 사실 가장 나쁜 시나리오 위에서조차 이는 양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 게임에 가깝다.
무역은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새로운 교역로가 등장할 것이며, 종래의 무역이 미국 등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면 이젠 ASEAN을 비롯한 지역 내 무역의 비중도 높아질 것이다. 유럽,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도 도시화가 진행되며 내수 증가로 무역이 증가하게 될 것이다.
한국 역시 중요한 플레이어다. 한국의 총수입과 총수출을 합치면 이미 GDP를 훌쩍 뛰어넘는다. 수출 집약형 경제 같은 말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무역이 우리 경제에 얼마나 거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4차 산업혁명과 디스토피아, 또는 유토피아
알파고 쇼크가 촉발시킨 인공지능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제4차 산업혁명(이 말 자체는 그저 마케팅 용어일 뿐이라는 비난 또한 받고 있다)이라 불리는 새로운 격변을 향한 기대와 우려로 이어졌다. 인공지능뿐이 아니다. “삼디” 프린터, 로봇공학, 신재생에너지와 온실가스 감축, 미세먼지 대책 등으로 대표되는 녹색 혁명(녹색성장이 생각나면 지는 거다), 나노기술과 바이오 기술 등이 완전히 새로운 산업 구조를 탄생시킬 것이다.
사람들은 이 4차 산업혁명이 촉발할 디스토피아에 대해 우려한다.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 발달로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며, 일각에서는 로봇을 도입할 경우 ‘로봇세’를 내야 한다는 의견까지 대두된다. 반대로 그동안 이뤄졌던 기술 발전과 혁명적 변화가 그러했듯 오히려 노동의 강도를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며 부자와 빈자의 격차를 줄이는 방향의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저자가 말하듯,
“어떤 기술이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창조적 천재성을 담보하고 있는지를 사전에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발명과 혁신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어났다. 1970-1980년대에 우리는 달나라로 수학여행을 가고 로봇이 청소를 해 주는(이건 어떤 의미에선 실현되긴 했다) 세상을 상상했다. ‘로보캅’ 같은 영화는 당시 우리가 상상하던 미래상이었다. 지금 와서 보니 다 헛된 상상이었다.
반면 우리는 2007년에 아이폰 같은 물건이 등장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손에 컴퓨터를 들고 다닐 거란 얘긴 있었지만 이렇게 작고 얇으며 직관적인 UI를 가진 물건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옛날까지 갈 것도 없다. 2007년 아이폰이 발표될 당시의 사람들, 심지어 IT 전문 기자들조차 ‘터치스크린 아이팟(애플의 MP3 플레이어)’이란 설명에 감동했지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혁신적인 통신 기기’란 설명에는 심드렁했다. 지금 아이폰의 가장 큰 가치는 MP3 재생 따위가 아니다.
미래에 대비하는 건 물론 중요하다. 어떤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지 우리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이 디스토피아를 불러올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우리는 미래를 모른다. 과거의 우리가 현재를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다시, 중요한 건 정치다
변화는 수많은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앞서 이야기한 4차 산업혁명도 개중 하나다. 중산층은 증가할 것이며 이는 자연히 수요를 증가시킬 것이다. 특히 신흥국 전반에서 중산층이 증가하며 가처분소득을 지출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이는 경제 성장뿐 아니라 양극화 감소의 원동력이 된다.
도시화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효과다. 신도시, 녹색 도시와 같이 도시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도시는 더욱이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인구가 밀집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고, 서비스를 더욱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료 서비스를 생각해보라. 응급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대형 병원이 필요하고, 대형 병원은 도시급이 아니면 애당초 유지될 수가 없다. 도시에선 비슷한 기술을 요하는 산업이 모여 클러스터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그 변화만으로 경제 성장을 추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경우든지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야 한단 말이다.
도시 하면 생각나는 슬럼화 같은 문제는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서울이야 그나마 덜한 편이지만 그럼에도 빌라, 다세대주택이 밀집된 주택가는 주민 편의시설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그런 면에서는 ‘도시재생 뉴딜 사업’ 같은 것이 한 대책이 될 만하다. 시장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정치가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역할이지만 엄연히 시장이 할 수 없는 역할이 있다. 그 부분을 공공이 채워줘야 한다.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선거를 통해 4년, 또는 5년 정도의 짧은 주기로 국민들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이상 정치인들은 필연적으로 단기적 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장기적 관점과 전문적 지식을 가진 테크노크라트와 전문가가 정책의 중심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거기에만 의지하면 보수적인 정책으로 기껏해야 현상 유지에 그칠 공산도 크다.
특히나 금융위기는 정치인들의 도덕, 경제적 권위를 추락시켰다. 좋은 예로 힐러리 클린턴은 부패한 월가와 워싱턴 정가의 대변인으로 여겨졌고 낙선했다. 문제는 대중이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기득권 중의 기득권이자 오로지 기성 질서의 파괴 외에는 그 어떤 철학도 없는 것 같은 도널드 트럼프였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장미 대선’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카카오톡을 통해 가짜 뉴스는 실로 무분별하게 유통되고 있고, 언론은 이상할 정도로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기성 정치인은 ‘빨갱이’ 또는 ‘패권세력’으로 몰리고, 대신 정치 혐오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인이 부상한다.
정치는 중요하다. 잘못된 정책은 얼마든지 번영의 기회를 망칠 수 있다. 획일적인 환율, 금리 정책, 안일한 통화정책이 대규모의 경제 불황과 ‘검은 수요일’을 낳았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제적, 기술적, 군사적 힘뿐 아니라 케이팝과 싸이를 비롯한 문화적 역량 및 문화적 매력 또한 소프트 파워로서 번영의 열쇠가 될 수 있다. 모두 정치의 영역이기도 하다.
낙관과 위로
『거대한 전환』의 원제는 ‘경제학의 위로(The Consolations of Economics)’다. 둘 다 좋은 제목이다. 책은 ‘거대한 전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낙담과 비관론 대신 우리의 경제는 성장할 것이라는 낙관과 위로를 통해서 말이다.
책은 몇 번이나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의 말을 반복한다.
“보이지 않는 손과 보이는 손이 둘 다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손은 이미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 시장이다. 부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보이지 않는 손은 지금도 잘 작동하고 있다. 아니, 이 손은 애당초 보이지 않기에 사실 잘 작동하든 작동하지 않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는 우리에게 보이는 손을 잘 관리해야 한다. 책은 도덕과 윤리라고 얘기하지만 어쩌면 정책이라 말할 수도 있고, 문화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미래에 대해 몇 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한 뒤 실현 가능성이 각기 50%, 35%, 15%라고 말하자 다들 50%짜리 시나리오에만 집중하더라고. 하지만 이미 트럼프가 당선되었고 브렉시트도 일어났다. 우리는 나머지 50%에 대한 방파제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
세계 경제는 계속 성장할 것이다. 그 낙관론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성장세는 일관되지 않다. 떠오르는 순간이 있을 것이고, 가라앉을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득 보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손해를 보이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낙관론에 위로받기에 앞서 충분한 대비책을 세워두어야 한다. 일단은 당장 한 달 후의 장미 대선부터.
어떻게 방파제를 세울 것이냐고? 그건 책을 읽어보시라. 이거 이 책 읽어보시라고 쓴 글임. 스포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