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 사회는 오히려 ‘메갈’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우리가 최근 생경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 이미 누군가가 비슷한 방식으로 겪었다는 사실을 이 책은 말해준다. 가령 “페미니스트들은 성평등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남성들을 괴롭히며 한없이 편하게 살려고만 한다”는 이야기는 ‘한남충’만이 아니라 페미니즘을 싫어하는 서구 남성들도 비슷하게 내뱉어 왔다.
미디어가 수많은 페미니스트의 말 중 가장 과격한 것, 이를테면 “느그 아버지도 한남충 새끼다” 같은 말만 선별해 내보내거나 단순히 ‘남혐 vs. 여혐’ 같은 일종의 성별 갈등으로만 피상적으로 보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보수적인 대중매체는 끊임없이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남성혐오자로 묘사했다. 페미니즘 운동 내에 반남성 분파나 그런 정서가 보인다 싶으면 페미니즘에 흠집을 내기 위해 대중매체는 그 사실을 집중 조명했다.
- 162쪽
벨 훅스의 설명에 따르면 가부장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자극적인 말들을 필요로 했다. 이례적인 사례를 수집해 ‘이것이 페미니즘이다’라고 전시를 하면 대중들은 페미니즘을 과격하며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는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례적이며 자극적인 목소리는 페미니즘 전체의 목소리가 아니며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그것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만 미디어는 그런 목소리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는 결코 남성을 배제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페미니즘은 ‘더치페이’ 가지고 고통 받는 당신도 구원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런 목소리는 보통 삭제된다. 결국 페미니즘은 자극적인 언어와 불편한 이미지만을 남긴 채 대중에게 전달되며 이로써 힘을 잃게 된다.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 된 셈이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에 반대한다. 남성의 특권을 벗어던지고 페미니즘 정치를 기꺼이 포용한 남성은 투쟁의 소중한 동료이지 페미니즘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다. 페미니즘 운동은 연령과 여남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성차별주의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해야 진보한다.
- 45쪽, 259쪽
미디어의 악의적 왜곡을 비판하면서도 벨 훅스는 페미니즘 운동이 나아가야 할 시사점을 분명히 한다. 페미니즘 운동은 결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성차별적 세상에서 억압받는 우리 모두가 수혜자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남성들도 이 운동에 동참할 것을 피력한다.
페미니즘, 성별 간 대결을 넘어
벨 훅스는 페미니즘이 그저 ‘여-남 간의 대결’에만 머무는 것을 경계한다. 가부장제 권력이 여전히 힘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남성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여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는 궁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부장제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은 남성뿐만이 아니다. 가령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라면 아이에게 조금 더 성평등한 교육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이가 가부장적 질서에서 손해를 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싱글맘은 오히려 더 강한 가부장적 교육을 주입시킨다는 이야기다.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아이를 향한 부모의 폭력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런 형태의 폭력은 가해자가 여성인 경우도 많은데 이는 그 여성이 더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양육에 관해 가부장제 권력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그 권력을 아이를 향해 휘두르는 것에 가깝다. 즉 그 같은 폭력은 여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가부장제 폭력이다.
그래서 벨 훅스는 페미니즘이 남성의 여성을 향한 폭력만 조명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가정폭력부터 시작해서 데이트폭력, 공권력의 개인을 향한 폭력까지. 가부장제 질서하에서 이뤄지는 모든 폭력을 비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부장제하에서 자행되는 다양한 폭력 가운데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가장 끔찍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이런 유형의 폭력에만 집중한다면 페미니즘 운동을 더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당수의 가부장제 폭력이 성차별주의에 찌든 여남이 아동에게 휘두르는 폭력이라는 현실을 은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151쪽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벌이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도 벨 훅스는 경계한다. ‘우리는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인 게이를 혐오하고 폭언을 퍼붓겠다’는 선언은 이성애자 남성에게 허락된 타자 혐오의 권리를 우리에게도 달라는 것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벨 훅스는 그러한 행위들이 오히려 가부장제 체제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페미니즘에서 소외된 여성들
벨 훅스는 어떤 페미니즘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해방이 아닌 ‘남성과 동등한 권력’을 얻는 것에만 천착한다고 지적한다. 가령 고학력 여성들이 유리천장지수를 내세우며 직장 내 승진 문제를 이야기하거나, 육아 등의 문제 때문에 자신의 경력이 단절되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다.
전업주부로서 가정에 예속되는 문제는 (…) 실제로는 소수의 고학력자 백인 여성들의 위기였을 뿐이다.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던 여성 노동자들 중 다수에게 전업주부가 될 권리는 오히려 ‘해방’처럼 보였을 것이다.
- 99쪽
물론 앞서의 것들이 문제가 아니란 말은 아니다. 다만 벨 훅스는 교육받고 어느 정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특권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이 체감하는 문제만을 주요 화두로 내세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이럴 때마다 주류 미디어는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를 확보한 이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으며 그 ‘특권 페미니스트’들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의 양상을 보이면 이들은 곧 페미니즘 운동에 거리를 두게 되곤 했다는 것이다.
즉 ‘남성과 동등한 권력’을 얻는 데 성공한 페미니스트들이 질 낮은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며 가사노동도 병행해야 하는 다수의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을 저자는 비판한다.
계급권력을 가진 여성들이 기회주의적으로 페미니즘을 이용하고 한편으로 페미니즘 정치의 기반을 약화시켜 궁극적으로 그들을 다시 종속시킬 가부장제의 유지를 도왔다면 그들은 페미니즘만 배신한 게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배신한 셈이다.
- 108쪽
하지만 나는 벨 훅스의 이같은 지적이 아직 한국에는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은 유리천장 지수 같은 가시적인 인덱스가 최악인 나라이며 아무리 계급적으로 높은 위치에 속한 여성이라도 그들이 저자가 지적할 만큼의 ‘남성 권력’을 이양받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저자의 말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놀라우리만큼 현재 우리가 겪는 상황과 비슷한 모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주장하는 페미니즘이 여남동수내각이나 유리천장지수 완화 정도만을 두고 ‘이로서 완성되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 목소리 밖에 있던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은 여전히 요원한 것이 되며 대다수의 여성들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도, 자신이 어떤 처지에 처해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권계급 출신에게 일자리란 높은 임금의 직업을 의미했다. 일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대다수 여성의 삶과 무관했다.
- 124쪽
백 가지 페미니즘이 아닌 백 명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위하여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백 명의 페미니스트가 있으면 백 가지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그런 말은 한국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백 가지 페미니즘’ 같은 발언에 대해 벨 훅스는 페미니즘에 분명한 원칙이 있으며 설령 자기가 그것을 실천할 수 없다고 해서 ‘또 다른 페미니즘’을 주장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이들은 페미니스트가 임신중단에 반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릇된 주장이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기본 원칙이다.
- 256쪽
그러니까 벨 훅스의 주장은 단순히 ‘어떤 남성에게서 당신을 구한다’는 게 아니다. ‘남성들을 쳐부수자’는 더더욱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양태로 억압을 받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성별이나 연령이나 계급을 떠나 그 가부장제 자체에 대해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각자가 겪은 문화나 가정환경 등으로 경험한 성차별은 각자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개별 사례들은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사회구조로 수렴되고 우리는 ‘자매애’로써 이같은 차별에 같이 대응해야 한다고 벨 훅스는 주장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섭식장애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성형수술을 여성할례와 연결 지으면 (…) 여성혐오가 여기에서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
- 118쪽
벨 훅스의 이 책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모두’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어떤 여성’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난한 여성, 히잡을 쓴 여성, 어린 여성을 포함한 모든 여성. 심지어 가부장제 사회에서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모든 남성까지도 페미니즘 운동의 수혜자가 될 것이며 따라서 동참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흐름에 반대하는 자, 자신을 가부장적 권력의 한구석에 두고자 하는 자는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반(反)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어떤 ‘주장’ 대신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에 대해서 강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페미니즘을 오해하고 있는, 혹은 전용(轉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좋은 ‘입문서’이다. 실제로 분량도 적다. 서너 시간만 투자하면 다 읽을 수 있고 하루에 15분씩 3주면 완독할 수 있다.
아울러 남성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나는 솔직히 ‘오유’발 여성혐오가 보기 더 안쓰럽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가치 앞에서 차마 ‘페미니즘’의 원론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는 대신에 온갖 부정적인 가치를 덧입히며 ‘그런 페미니즘은 할 수 없고 대신 이퀄리즘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 책은 당신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퀄리즘’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벨 훅스는 책 이 책 전반에 걸쳐, 아니 자기 삶 전반에서 걸쳐 ‘남성들의 가부장 권력을 여성들도 공유하는 식의 페미니즘’을 반대해왔다. 당신의 이해와도 겹치지 않은가? 성별 같은 것에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 바로 벨 훅스가 그러한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을 한 번 읽자. 그리고 이퀄리즘인지 뭔지, 그래 그거라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