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2차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반도의 찌질한 중년 아저씨다. 잘 다니던 공장을 때려치우고 사장 한 번 해보겠다고 나섰지만 직원보다 더 비참하게 살아가는 생계형 자영업자이기도 하다. 매달 돌아오는 결제일이 무서운 신세 길래, 누가 나한테 돈 빌려 준다면 발가락이라도 빨아줄 정도로 고맙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마음을 붙들며 살고 있다.
그래서 무슨 무슨 캐피탈에서 대출해 준다는 전화를 받으면 “나중에 전화하세요.”라고 끊어버린다. 그런 뒤 여지없이 ‘대출스팸’이라는 전화번호부에 입력을 한다. 니들의 전화번호 개수보다 스마트폰 메모리의 섹터 수가 많다는 것을 알기에.
센 놈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서비스 교육을 아주 빡세게 받은 듯한 직원이 무려 ‘신한은행’이라는 제1금융권의 이름을 들이대며 대출해 주겠다고 나에게 전화를 했다. 자신은 신한은행 스마트금융센터 소속으로서 비대면(非對面) 영업에 집중하는 팀이라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들어가면 대부분 영업점으로 배치를 받는데, 우리나라 시장은 은행이 더 이상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에 기존 은행들끼리 고객 빼앗기 경쟁이 무척 치열하다. 그래서 직원들 전화 받는 교육을 아주 빡세게 시킨다. 심지어 모니터링 요원이 고객을 가장해 전화를 걸어 친절도 여부를 점검하기까지 한다.
그런 서비스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젊은 친구가 친절하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대출해 주겠다고 꼬시니 혹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그래서 이 찌질이 중년 아저씨는 그쪽이 요구하는 서류를 그쪽 팩스로 전달했다. 그랬더니 스마트하게도 20분 만에 대출 가승인 문자가 왔다. 오홋. 이 찌질이에게도 빛이 비치는구나.
사기에도 ‘밀당’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되면 재미가 없지. 본심사를 통과해야 한다고 심사팀에서 전화할 테니 꼭 받으라고 하더라. 그렇지. 신한은행 쯤 되면 당연히 시스템이 있겠지. 20분 뒤 심사팀 누구라며 전화가 왔다. 본인 확인, 대화 내용은 녹취된다며 아주 은행원다운 말투로 말한 뒤, 나는 신용이 부족하니 추가 조치를 취하면 가능하다고 반려 처리 했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 대출을 권유했던 직원과 다시 통화를 해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했지. 그랬더니 그 직원은 아직 통보를 못 받았다며 확인 후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더라. 오 이 친절하고 체계적인 일처리여. 그런 뒤 전화가 와서 “될 줄 알았는데 무척 죄송하다. 그러나 대출이 거부된 것이 아니라 반려된 것이니 추가 조치를 취하면 100% 대출이 되며 이자율까지 낮아진다.
그 방법은 보증인을 세우거나 신한은행 자회사에서 발행하는 보증증권을 발급받으면 된다. 그리고 발급하는 데 드는 보증료는 대출승인이 나는 즉시 당일 전액 환불된다. 약간 편법이지만 실제로 고객들이 이렇게 해서 받고 있다.”고 했다. 그때… 가젤의 생존본능이 발동했다.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치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숨어 있는 사자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있을 것이라고 느끼는 가젤의 본능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 친구한테 말했다. 보증증권료를 마련하려면 어디서 돈을 받아와야 한다. 그러니 내일 오전에 일을 처리하도록 하자. 그 뒤 나는 약속되었던 모임에 참석하려고 사무실을 나섰다.
모임에 가는 버스 안에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뭐, 그 보증증권료 350만원만 마련하면 2,500만원이 생기는데, 그리고 그 보증료도 당일 전액 환불해 준다고 하는데. 뭐 어디서 잠시 빌려도 되고, 거래처에서 미리 땡겨와도 되고. 뭐 그러면 되지 않아? 아니야. 아니야. 그렇게 당일 환불해 준다면 대출금에서 깐 뒤 나중에 돌려받으면 되잖아. 신한은행쯤이나 되는 회사가 그런 것도 못해? 지들이 대출 실적을 올리려 한다면 자체적으로 돈을 마련해 놓아서 이런 경우를 커버할 수도 있지 않겠어?
예의까지 갖춘 친절한 유령의 사기극 전말
결국 나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기가 싫었고, 그런 편법을 써서 한다는 게 왠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편법은 힘 있는 자들이 하면 별 문제없이 넘어가지만 힘없는 자들이 시도하면 오히려 채한다. 그렇게 결심한 뒤 이번에는 그간의 과정을 다시 되돌려 하나둘씩 뜯어보았다. 마치 어렸을 때 라디오를 뜯었던 것처럼.
먼저 그 친구가 보내 주었던 재직증명서를 확인했다. 뭔가 구렸다. 다음날 신한은행 대표전화로 연락해서 문의한 결과 해당 직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령이었던 것이다. 아주 친절한 유령.
그 다음, 보증증권을 발급해 준다는 회사를 찾아봤다. 신한은행 자회사라고 하는 ‘신한아이엔에스’는 주소와 전화번호도 없나? 계약서에 주소와 전화번호도 없다는 게 말이 돼? 확인해 볼 수단마저 없다니 이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마이너스 대출이 뭐 이리 이자가 싸? 연 5.6%. 만약 보증증권으로 하면 연 4.7%. 연 4%대 이자율은 보금자리론 같은 정부 정책 자금이나 가능하지 일반 은행의 신용대출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율이다. 마지막으로, 보증증권이라면 이 프로젝트는 위험해서 아무도 안 받아주는데 내가 보증을 서 줄 테니 그 대가로 나한테 보증료를 내라는 것으로서, 보증의 대가로 받는 보증료는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 보증료를 전액 당일 환불해 준다고. 그렇게 환불 처리 해주면 보증증권회사는 뭘 먹고 사는 거지. 말이 안 되잖아.
결국 사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다음날 그 친구는 여지없이 전화를 했고, 나는 고맙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물론 서로 아주 나이스한 어투로 말이다. 재직증명서가 이상하다니, 계약서가 이상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아주 나이스하게 전화를 끊었다. 감사하다는 말도 빼지 않으면서. 겉치레는 세상의 윤활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있다면 사기일 것이다
나는 사기당하지 않았다. 그 친구가 나를 노렸던 것은 그 보증증권료 350만원이었다. 그거 받고 튈 작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해는 분명 있었다. 신분증을 새로 교체해야 했으며, 계좌 비밀번호를 바꿔야 했다. 그거 하느라 걸렸던 내 귀한 2시간은 어디서 보상받을까.
나는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았다. 고발장을 쓰고, 경찰서에 가서 접수하는 것보다 이렇게 글을 써서 알리는 게 세상에 더 효과적일 것이다. 더구나 피해 금액도 발생하지 않았으니 경찰도 어떻게 하기 난감할 것이다.
이 모든 소란이 끝난 뒤, 나는 당하지 않았다는 안도감보다 꿀꿀한 기분이 더욱 크게 들었다. 나한테 350만원을 털어가려고 그 친구는 최소 다섯 번 이상 전화를 했다. 팩스까지 보내는 수고도 잊지 않았다. 그 친구한테 나는 350만 원짜리였던 것이다. 사기를 치려면 통 크게 몇 억 털어먹을 생각을 해야지, 고작 350만원 가지고 그랬냐. 반도의 찌질한 중년 아저씨는 다시 한 번 좌절했다.
반도의 찌질한 아저씨들이여, 정신 차리자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크게 두 차례의 베이비붐을 겪었다. 58년 개띠로 대표되는 베이비붐 세대가 첫 번째이며, 1970년 전후에 태어난 세대가 두 번째이다. 첫 번째 베이비붐 세대는 지금 은퇴해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이들은 복 받은 세대이다. 이분들도 젊었을 때 가난과 독재를 겪어 어려웠지만, 연 10% 가까이 성장하던 경제에서는 그 파도에 올라타 있기만 해도 돈을 만질 수 있고, 회사에서도 무난하게 승진할 수 있었다. 각하가 중소기업에 가도 좋다고 말한 이유가 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베이비붐 세대는 약간 다르다. 이들도 역시 복 받은 세대는 맞다. 해외여행 자유화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만끽했으니까. 그리고 힘들기는 했지만 요즘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취직했다. 비록 회사에 들어가던 1997년에 IMF 구제금융을 맞아 제대로 데긴 했지만, 그래도 그땐 사회 초년생이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다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이들은 학교가 부족해 한 반에 60명 가까이 공부하고, 거기에 어떤 지역은 2부제 수업을 할 정도로 숫자가 많다. 당연히 1990년, 1991년 학력고사는 사상 최대 경쟁률이 나왔다.
그런 두 번째 베이비붐 세대가 이제 하나둘씩 회사에서 밀려나 자영업의 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그 세대가 이제 올라갈 자리를 두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 있다. 조만간 그 결전의 루저는 나올 것이고, 싫든 좋든 자기 사업을 해야 할 것이다. 그 구질구질한 전투에 먼저 나온 사람이 바로 나다. 반도의 찌질한 중년 아저씨들여. 그대들은 나처럼 찌질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런 찌질한 중년 아저씨를 노리는 대출사기단이 많을 것이니, 정신 바짝 차리자. 친구들아. 흑.
알림) 나는 이 글에서 신한은행을 비난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분명하게 밝혀 둔다. 나는 신한은행의 고객이기도 하다. 신한은행도 이름을 사칭당했으니 피해자이다. 사기 피해가 발생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실명을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