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누구나 예기치 않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우리는 무심코 남의 물건을 동의 없이 가질 수 있고, 누군가를 속이고 위협하거나 때려서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런 행위의 결과가 곧 절도, 사기, 상해, 살인이라는 형사 범죄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시민은 일생 동안 그런 상황과 무관하게 살아간다. 감옥이나 법원은 말할 것도 없고 파출소에조차 한번 불려가는 일도 없다. 누구나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긴 하지만 누구나 무엇을 훔치고, 누군가를 속이거나 때리고 죽이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법과 정의’에 대한 ‘로망’과 현실
모두에게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은 누구나 그런 상황에 휩쓸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유명한 헐리우드 영화 ‘도망자(The Fugitive)’의 주인공 리차드 킴블은 우연히 아내를 죽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경찰의 추적에 쫓기는 도망자가 된다. 진범이 밝혀지면서 주인공의 누명이 풀리는 해피엔드로 맺는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마음을 졸이며 주인공을 좇던 관객들은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특별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그것은 한편으론 소시민이 가진 ‘법과 정의’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법은 진실의 편이면서 그걸 통하여 정의를 실현한다는 ‘순진한 로망’ 말이다.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누명을 벗고 마침내 진범을 찾게 되는 결말에서 받는 심리적 보상 때문이다. 또 영화가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는 한편으론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시련이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믿음에 대한 확인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말, 그런 상황이 나와는 무관하기만 한 걸까. 대체로 사람들이 자신과 무관한 특정 범죄 혐의를 받게 될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제로에 가까운 그 확률이 내 삶에 적용되는 순간 그것은 내 삶을 깡그리 망가뜨린다. 그때 법은 더 이상 정의도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때로 진실조차 훼손해 버리기도 한다.
박상규와 박준영이 쓴 『지연된 정의』(후마니타스, 2016)는 그런 서민의 삶이 어떻게 법과 정의를 만나는지를 민낯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책은 우연히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만들어져 형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돈도 빽도 없는 사회적 약자’, 서민들이 재심을 통하여 진실을 인정받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고 있는가’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르포르타주다.
우연히 살인의 현장 가까이 있었거나 주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혐의를 받고 결국 범인이 되어야 했던 이들은 지적 장애가 있거나 가난한 청년(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이고, 15세 소년(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이거나 고졸의 미혼여성(친부 살해 완도 무기수 김신혜)이었다. 이들은 애당초 보호자나 변호인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지만 아무도 이들을 믿어주지 않았다.
책의 제목은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法諺)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수사과정에서 가혹 행위에 따른 허위자백으로 범인이 되어야 했던 이들은 진범이 나타났는데도 풀려나지 못했다.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수사하여 기소하거나 심판한 이들이 진실을 외면했고 결국 ‘정의’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1999)’의 범인으로 기소되어 복역(3년 6개월~5년 6개월)한 세 청년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은 것은 2016년 10월이었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2000)’의 범인으로 10년의 징역을 살고 나와야 했던 청년이 재심으로 죄를 벗게 된 것도 2016년이었다. 무고한 청년들의 삶에서 16-17년 동안 정의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서민에게 가해지는 ‘인권유린’은 경시된다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라는 이 책의 부제는 여기서 다루어지는 사건들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억울한 형을 살았던 이들은 제대로 방어권을 행사하지도 못했고 국가기관이 자신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자 자신의 권리를 쉽사리 포기해 버렸다. 이들이 억울한 징역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무도 이들의 진실을 귀담아듣지 않아서였다.
이 사법적 ‘정의의 지연’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달려든 이는 고명한 법조인이 아니라 ‘돈 안 되는 재심’만 다루다 ‘파산 지경에 이른 변호사’ 박준영이었다. 가난한 변호사를 도와 재심의 과정을 르포로 엮은이는 10년간 다닌 언론사를 그만두고 ‘서울 사대문 안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듣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살아 있는 기사를 쓰겠다’고 결심한 ‘백수’ 박상규였다.
사건은 예민한 시국사건도 정치적 현안과 관련된 것도 아니었다. 사회적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러한 사건의 재심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수사기관은 사건 해결 압박 때문에, 사법부는 ‘법적 안정성’을 이유로 재심에 인색하다. 여론도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저자는 이런 사회 일반의 문제를 에두르지 않고 지적한다.
한국 사회에서 형사 사법 피해와 관련해 진보와 보수, 좌우 진영의 공통점 중 하나는 지적장애인, 저학력자, 가난한 사람의 삶과 인권유린 현장의 구체적 사례를 무겁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 323쪽
삼례 사건과 익산 사건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법원이 재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과 사실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범인을 조작했다는 걸 눈치채고 이를 괴로워했던 사건 피해자(삼례 사건)가 있었고, 진범이 따로 있다는 확신으로 사건을 추적하다 한직으로 밀려난 형사반장(익산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법의 진실과 정의를 되찾아 주는 데 가장 큰 힘을 보탠 이는 재심 전문 변호사 박준영이었다. 그가 비장애인도 읽기 힘든 재심 청구서를 지적 장애가 있는 친구들에게 건네는 것을 나무라는 박상규에게 그는 이렇게 되받는다.
“재심 청구 당사자인데, 당연히 줘야죠! 지적 장애가 있다고 절차를 안 지키거나 설명을 생략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해야죠. 가난한 지적장애인이라고 무시하고 인간 취급도 안 해서 이 사달이 난 거 아닙니까!”
- 110쪽
인간에 대한 존중이 승리하다
그는 그렇게 ‘국가가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이들을 ‘사람으로 대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 박 변호사의 변론은 거기서 출발하고, 다시 거기로 향했다. 박 변호사는 그걸로 싸웠고, 그걸로 이겼다”(114쪽)는 박상규의 견해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온 변론은 사람들의 마음의 현을 흔들었을 것이다.
헌법이 정한 바대로, 이 사건 피고인들이 존엄한 인간으로 대우를 받았나요? 행복추구권은 보장받았나요? 이들이 법 앞에 평등했나요? 오히려 역차별을 받지는 않았나요? 국가는 장애가 있거나 미성년자였던 이들, 그리고 이들의 가정을 어떻게 보호했나요? 이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 검사, 그리고 재판을 했던 판사는 이들에게 봉사자였나요? 이들에 대한 책임을 진 사실이 있나요?
- 119쪽, 박준영의 ‘삼례 나라슈퍼 강도 치사 사건의 최종 변론’ 중에서
이 같은 신념과 열정이 ‘다음’ 스토리펀딩 기획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를 통하여 시민 1만 7,000여 명이 참여해 5억 6,790만 원을 모은 원동력임을 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 2월 개봉된,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김태윤 감독의 영화 ‘재심’은 누적 관객이 240만 명을 넘었다.
그러나 파산 변호사와 백수 기자가 갈 길은 아직 멀다. 2015년 2월에 청구된 완도 무기수 김신혜에 대한 재심은 같은 해 11월, 광주지법에서 복역 중인 무기수 재심으로는 한국 사법 역사에서 처음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지난 2월 11일, 광주고법은 검찰의 항고를 기각했고 이튿날 검찰은 다시 재항고함으로써 재심 개시 여부는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2000년 사건 발생 후 체포되어 2001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김신혜는 17년째 복역 중이다. 스물셋 처녀는 불혹을 넘긴 중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옥중의 김신혜 앞에서 멈춘 정의는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무기수 김신혜 앞에서 멈춘 정의, 문제는 시스템이다
억울하게 갇혀 징역을 살고 전과자가 된 사람이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이 책에 등장한 사건의 피해자들은 그나마 운이 좋아서 형기를 채운 뒤에도 재심을 통해 자신의 진실과 무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도 얻지 못한 채 형을 살거나 살았던 사람은 또 얼마나 될 것인가 말이다.
삶이 그러하듯 무릇 정의는 언제나 그리 고상하게 실현되지 않는다. 때로 그 실현 과정에서 인간의 선악과 미추를 드러내기도 하고 세상의 구조나 체제가 모두의 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하기도 하는 까닭이다. 『지연된 정의』가 전하는 사법적 정의에 대한 이야기는 한편으론 안도로, 다른 한편으론 짙은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법적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소수의 ‘선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편적 ‘법률 구조(救助) 시스템’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를 직접적으로 확인해 주기 때문이다.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은 때로 정의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고 한 조지 워커샴의 지적이 가리키는 것도 같은 지점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