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말, 대한민국은 검증하지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국민들이 귀 기울이고 기자들이 열심히 분석했던 대통령의 연설문은 사실 대통령이 쓴 게 아니었다.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의사결정에 아무 권한도 없는 민간인이 개입했다. 5개월 동안 1,600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어야 했다.
수많은 결점을 안고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는 언론의 프레임(frame)이었다. 언론은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렸다. 언론이 보여준 박근혜는 내내 침묵하다가 중요한 순간에 한 마디 탁 던지는 무게감 있는 정치인이었다. 박근혜는 신뢰의 아이콘이었다. 야당과 박근혜 모두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공약으로 내건 상황에서 다수 유권자는 ‘신뢰의 아이콘’ 박근혜를 선택했다.
하지만 박근혜가 보여준 침묵의 정치는 사실 불통이었고, 말을 길게 할 능력이 없다는 반증이었다. 취임 후 1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했고 2014년 기자회견 때는 사전에 질문한 언론사와 질문지까지 정해놓고 짜고 치는 고스톱을 펼쳤다. 최순실 게이트로 대한민국이 뒤집어졌을 때도 녹화한 대국민 담화 영상을 내보내고 기자들의 질문 하나 받지 않았다. 애초에 기자들과 자유로운 질의응답을 할 능력이 안 되는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박근혜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루어진 선거인만큼 언제보다 후보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선거다. 하지만 가장 검증할 시간이 부족한 선거이기도 하다. 신간 『프레임 대 프레임』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됐다. 언론이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알 수 있다면, 그 그림들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다면 유권자가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질이 부족한 정치 시장 vs. 전투형 노무현
언론이 정치인에 대해 그리는 프레임은 제각각이다. 8명의 대선 주자 중 언론의 시각이 가장 엇갈리는 인물 중 한 명은 이재명 성남시장이다. 같은 인물을 묘사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성남시장으로 당선됐을 때만 해도 이재명은 공단에서 일한 노동자, 인권변호사라는 이력으로 인해 ‘아웃사이더’라 불렸다.
하지만 이재명은 취임하자마자 포퓰리스트라는 호칭을 얻는다. 성남시 모라토리엄(지급유예) 선언 때문이다. 이재명은 전임 시장이 진 빚을 천천히 갚겠다고 선언했다. 조선일보는 이재명에게 ‘정치적 목적’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일각에서는 이 시장의 ‘선언’에 다른 정치적인 목적이 깔려있지 않느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들 사업(이재명의 공약사업)에 쓰는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지급유예를 선언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 2010년 7월 13일 조선일보 기사
“성남시가 노렸던 목적은 달성되는 듯하다. 당초 법에도 없는 선언을 한 것은 전임 시장의 실정을 부각시키고 신임 시장이 자신의 사업을 벌일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쇼’라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2010년 7월 14일 조선일보 기사
정치인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게 뭐가 문제란 걸까? 전제는 ‘정치-행정 이분법’이다. 조선일보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상대로 ‘정치하는 시장은 나쁜 시장’ 프레임을 자주 사용한다. 지자체장들이 중앙 정부나 대통령과 각을 세울 때, 새로운 복지정책을 시도할 때마다 ‘대선 나가려고 시장직 이용해먹는다’고 공격한다. 정치와 행정을 이분법적으로 나눠놓은 채 지자체장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거나 정부와 각을 세우지 말고 행정적인 업무나 하라는 말이다.
조선일보가 이재명의 모라토리엄 선언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재명은 굴하지 않고 행정을 벗어나는 정치를 이어갔다. 공약 이행을 위해 필요한 예산안, 조례를 두고 시의회와 전쟁을 벌였다. 이재명은 자신의 복지공약을 추진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를 상대로 단식투쟁을 하고 국가위임사무까지 거부했다.
이재명이 정부, 시의회와 계속 싸우면 사람들은 의문을 품는다. ‘이재명은 왜 자꾸 싸우는 걸까?’ 조선일보의 답은 ‘이재명의 품성이 되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자연스레 싸움의 이유를 궁금해하는 대신 ‘저 사람 또 저러네’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조선일보는 이재명을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키는 정치인’으로 규정했다. ‘시정과 상관없는 싸움을 한다’는 비판은 덤이다.
“적어도 이 시장 정도의 공인이라면 진영 논리나 이분법을 넘어 사회 통합까지 생각해야 할 책임이 있다. 너와 나를 아우르는 진정한 대화의 장을 위해서라도 냉정과 절제의 매너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 2015년 2월 25일 조선일보 칼럼
“이 시장은 그간 성남 시정과는 전혀 관계없는 정치 현안들에 대한 발언을 쉼 없이 쏟아내고, 개인적인 의견을 달아 논란을 일으켜왔다. 100만 성남시의 시정을 책임진 공인이 정치평론가가 본업인 양 행동하는 것은 문제다.”
- 2016년 2월 2일 조선일보 기사
반면 한겨레가 그린 프레임은 ‘소통하는 시장’ ‘시민친화적인 시장’ 이재명이었다. 조선일보가 문제 삼은 모라토리엄 선언조차 한겨레가 보기엔 시민에게 득이 되는 시정이었다.
“성남시의 이런 발표(모라토리엄)는 재정 상황을 무시한 자치단체장들의 치적 쌓기용 ‘묻지마’식 개발이 얼마나 무모한지 일깨웠다. 특히 지방채 발행을 독려하며 예산 조기집행 등의 정책으로 일관한 이명박 정부의 그릇된 정책이 지방정부에 독이 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2010년 8월 13일 한겨레 기사
이재명의 별명은 ‘전투형 노무현’이다. 이 별명을 얻기까지 노무현이 갖고 있던 ‘소통하는 서민 정치인’ 프레임이 이재명에게도 필요했다. 필요한 게 하나 더 있다. 야권 지지층이 기억하는 노무현은 ‘기득권층에 맞선’ 서민 대통령이다. 마찬가지로 이재명이 전투형 노무현이 되려면 반드시 기득권층으로 규정된 적들이 필요하다. 그 적은 ‘이재명의 복지를 반대하는 박근혜 정부’다. 한겨레가 이재명의 적, 박근혜 정부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한 이유다.
“경기도 성남시가 7월 시행을 추진해온 ‘무상 공공산후조리원’ 설치·운영사업에 제동이 걸렸다. 보건복지부가 성남시의 ‘무상 산후조리 지원’ 제도에 ‘불수용’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 2015년 6월 23일 기사
“경기도 성남시의 역점 사업인 ‘무상 교복’ 지원 조례가 시의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그러나 성남시의 공공복지 정책에 제동을 걸어온 보건복지부가 이를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 2015년 9월 21일 기사
포퓰리스트 vs. 진짜 보수
이재명이 전국구 정치인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청년배당’이었다. 이재명이 2016년부터 도입한 청년배당 정책은 일종의 기본소득으로 재산이나 소득에 관계없이 신청만 하면 해당 연령의 청년들에게 일정 금액을 나눠주는 복지정책이다.
이재명을 포퓰리스트로 보는 조선일보에게 청년배당은 ‘포퓰리즘의 끝판왕’이었다. 청년배당을 실시한 이후 몇몇 인터넷 게시판에 이 상품권을 액면가의 70~80% 가격에 현금으로 거래하겠다는 글이 올라오는 일이 있었다. 조선일보는 이를 두고 ‘최악의 포퓰리즘’이 낳은 사태라고 비판했다.
“그 돈이라도 받아 쓰기 위해 다른 지역의 청년들이 무더기로 성남시로 거주지를 이전할 가능성은 없는지 더 따져봐야 한다. 이 경우 성남은 ‘청년 실업자의 천국’으로 소문이 나면서 이 정책을 끝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세금을 사용해 유권자를 매수하는 행위는 유권자들이 투표로 철퇴를 내리지 않으면 근절되지 않는다.”
- 2015년 1월 5일 조선일보 사설
“청년 지원이라는 애초 취지가 선심성 현금 살포로 변질되고 ‘상품권 깡’ 업체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 애초에 우려했던 대로 청년층의 도덕적 해이를 낳은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됐다.”
- 2016년 1월 22일 조선일보 기사
조선일보와 함께 대표적인 보수언론으로 꼽히는 중앙일보는 어땠을까? 청년배당에 비판적인 논조였지만, 조선일보처럼 ‘최악의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지자체가 이들(청년)의 좌절감에 관심을 갖고 정책을 개발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은근슬쩍 치켜세우기도 했다. 의도는 이해하지만 청년배당 말고 다른 방법을 쓰라는 말이었다.
나아가 중앙일보는 ‘보수의 무능’을 문제 삼았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2016년 1월 25일 “포퓰리즘은 악마의 속삭임이자 달콤한 독약”이라며 청년배당을 비판했다. 중앙일보는 이에 대해 문제 해결 능력이 없는 보수 진영도 문제라고 반박했다.
“거기까지였다. 정치적 비판은 있었지만 실질적 대안이나 해결방안은 빠졌다. 사실 정부와 여당도 청년배당과 비슷한 무상복지 정책인 ‘기초노령연금’이 문제 된 적이 있다. 처음엔 연금을 ‘모두에게 지급한다’고 했으나 시행착오를 거쳐 ‘무조건 퍼주기는 안 된다’는 결론을 이미 얻었다. 그런데 청년배당을 놓고 소모적 논란을 되풀이하고 있다. 공허한 정치 공방은 무책임한 처사다.”
- 2016년 1월 27일 중앙일보 칼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이런 미묘한 차이는 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도 반복됐다. 이재명이 최순실 게이트 국면을 거쳐 유력한 대선 주자로 떠오르자 조선일보는 야권이 이재명화 되어 가고 있다고 탄식한다.
“성남의 트럼프로 불릴 만큼 강도 높은 발언을 해온 이 시장이 상승세를 타자 다른 야권 주자들까지 이런 효과를 노리고 강성 경쟁을 하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 2016년 11월 19일 조선일보 기사
“광화문 집회에 백만 명 가까이 모인 이후 야당 정치인들 사이엔 촛불 민심에 편승하려는 경쟁이 한창이다. 박원순·이재명 두 시장이 특히 두드러진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친 발언과 ‘촛불’을 의식하는 행동들을 하고 있다.”
- 2016년 11월 23일 조선일보 사설
반면 중앙일보는 이재명이 새로운 정치 구도를 만들어내고 있다며 치켜세운다. 이재명이 야권을 왼쪽으로 이끌고 있다는 조선일보의 주장을 반박하며 이재명을 포퓰리스트로 볼 수 없다는 말까지 한다.
“박근혜 지지층이었던 영남 유권자들이나 반기문 지지층에서 이재명을 지지하는 이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재명은 문재인이나 민주당의 확장이 아니라 여야를 포괄한 기성 정치권 전반에 신물 난 민심의 표출이다. 물론 이재명은 포퓰리스트적인 성향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시장으로서 그가 보여준 실적은 확실히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이다.”
- 2016년 12월 12일 중앙일보 칼럼
“내가 진짜 보수”라는 이재명의 다소 충격적인 발언도 중앙일보 인터뷰 도중에 나왔다. 이재명은 2016년 12월 20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새누리당은 보수를 가장한 부정부패 집단이다. 진짜 보수는 나다. 내가 새누리당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이 발언을 그냥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재명의 ‘진짜 보수’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이재명 보수론의 키워드는 법치다. 그는 복지 전략의 근거를 헌법에서 끌어낸다. 이재명이 가짜 보수를 조롱한 곳에서 유승민이 서민 경제론을 펼치면 불이 붙을 수 있다. 그래야 촛불의 국민 에너지가 정치개혁을 넘어 사회경제 혁신으로 나아가지 않겠나.”
- 2017년 1월 1일 중앙일보 칼럼
두 보수언론은 왜 이재명을 다른 프레임에 집어넣은 걸까? ‘이념 보수’ 조선일보는 보수를 위협하는 진보 이재명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실용 보수’ 중앙일보는 이재명조차 보수의 개혁에 활용하려 한다.
유권자가 프레임 전쟁의 변수가 되자
이재명을 둘러싼 프레임 전쟁은 『프레임 대 프레임』에 등장하는 한 사례일 뿐이다. 나는 『프레임 대 프레임』에서 이재명을 포함해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희정 충남도지사,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 등 대선 주자 8명을 둘러싼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의 프레임 전쟁을 재구성했다.
8명의 주자 중에는 대선을 포기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 박원순 서울시장도 포함돼 있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들까지 프레임 전쟁의 주인공으로 포함시킨 이유는 이들을 통해 정치인이 언론의 프레임에 걸려 무너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프레임 전쟁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언론이 유권자를 속이는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유권자가 프레임 전쟁의 변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자가 “그런 거 유권자들한테 안 통해요”라는 핑계를 댈 수 있어야 한다. 그 핑계의 힘이 강력해질수록, 프레임 전쟁의 질은 미래와 비전, 정책 등 생산적인 수준으로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조기 대선을 앞두고 프레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