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히트한 웹툰 <패션왕>을 분석하라니, 마치 싸이의 인기 비결을 음파를 분석해가며 심장 박동수와 견주던 언젠가의 YTN 뉴스 코너가 생각났습니다. 담배를 한 대(사실은 수 갑째) 태우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이 건은 진지하면 진지할수록 ‘병맛’ 코드를 벗어날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진지하게 써내려 가보겠습니다.
패션이란 무엇인가?
여러분들은 패션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국어사전에서 ‘패션’을 찾아보면 ‘특정한 시기에 유행하는 복식이나 두발의 일정한 형식’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정한 시기’를 ‘19세기’나 ‘조선시대’처럼 한정하지 않는다면, 보통은 현재 유행하는 스타일을 가리키는 말로 통하지요.
그래서 제 나름으로 ‘패션’이라는 말을 설명하라면 ‘현재 특정한 가치를 지니는 스타일(복식)’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때의 ‘특정한 가치’란 ‘현재’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모습’을 말하고요 이에 ‘트렌드’라는 개념을 조금 섞어놓은 설명임을 인정합니다.
클래식과 트렌드, 그리고 하이 트렌드
앞으로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개념 설명 좀 하려고요. 앞서 말한 ‘현재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모습’이란 그리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겠죠. 어느 날 갑자기 외계 생명체가 지구를 지배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복식이 등장하지 않는 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큰 흐름을 탑니다. 오늘날 우리가 입고 신는 것들은 모두 이 흐름 안에 위치하고 있어요. 이 흐름의 중심을 ‘클래식’이라 합니다.
이 클래식이란 것을 좀 더 현대적인 감각에 맞춰 새롭게 해석한 결과물이 ‘트렌드’가 되는 것이죠. 이는 전 세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하이 트렌드(High-Trend)’로 시간을 지나 점차 폭 넓은 대중 문화가 됩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브랜드들 혹은 동대문 디자이너들의 수고가 따릅니다. 이러한 과정은 패션의 ‘하향 전파이론’을 따릅니다. 개념을 말하는 중이기에 나이브하게 설명했지만, ‘패션’이나 ‘트렌드’에 관해서는 좀 더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패션왕’에는 패션이 없다
다시 돌아와 본론을 풀죠. 패션에 관한 앞선 설명과 같은 관점에서 웹툰 <패션왕>을 살펴보면 그리 흥미롭지 않습니다. <패션왕>은 패션을 소재로 삼은 기존의 영화, 드라마, 만화 등과는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보통 ‘패션’을 주요 소재로 삼는 이야기에는 화려함이 앞서기 마련이고 최신 트렌드가 등장하죠. 새롭고 진귀한 것에 좀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패션 산업의 특성을 반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나 드라마 <스타일>(은 좀 아닌가요ㅋ)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되실 겁니다.
그런데 <패션왕>은 아닙니다. 하이 트렌드(High-Trend)나 빈티지(Vintage) 스타일에 관한 개념을 얼추 드러내긴 했지만, 대개는 웃음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에요. 도리어 하이 트렌드 패션이나 빈티지 스타일과 같은 몇몇 현상들에 조소를 날려주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회를 거듭할수록 이러한 경향은 심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패션왕 오디션 편에 등장한 태극기를 단 이스트 팩을 보고는 더 이상 만화를 읽어 내려가고 싶지 않았어요. 이는 <패션왕>에 어울리는 스타일이라기보다 지나간 유행의 고증에 불과하니까요. 항상 새로운 스타일이 주목 받는 패션에서 이러한 고증은 한낱 웃음거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패션과 트렌드의 개념을 희화화 하는 이러한 모습들에 비춰볼 때 <패션왕>에는 ‘패션’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왕에는 패션이 있다!
평소의 제 태도라면 이 만화를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을 살아온 독자들의 향수를 자극해 순진한 공감이나 얻어보자고 한 약삭빠른 계산쯤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패션왕>은 의도의 여부와 상관없이 무척 적절한 타이밍을 자랑하니까요.그런데 이 글을 쓰며, 그리고 여러 번 고쳐 생각하며 얻은 결론은 ‘<패션왕>은 꽤나 괜찮은 패션 이야기구나!’하는 것입니다.
몇 번의 연재 지연과 그에 따른 사과를 거듭하면서 힘겹게 웹툰을 완결한 기안84 작가에게 하이 트렌드 따위는 관심사 안에 없었을지 모릅니다.다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평범한 고등학생인 ‘우기명’이 다른 친구들로부터 주목 받고, 살아가는 의미가 변화하는 과정이었을 겁니다. 가난한 것 외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기명에게 남들의 시선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겠죠. 하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인 ‘콘셉트’로 서서히 존재감을 얻기 시작합니다.
이쯤에서 기안84 작가와 기명은 “패션이란 ’돈 지랄’이 아니야!”라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콘셉트만 있다면 아주 작은 아이디어 하나 만으로도 스타일이 완성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져주는 거죠. 같은 맥락으로 만화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하나의 메시지는 스타일을 완성하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태도’라는 점입니다.
패션 산업 안에서 높은 가치를 지니는 최신 트렌드도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라는 것. 동시에 트렌드와 실제 우리 삶과의 연관성을 다소 회의적으로 바라보며 옷에 사람을 맞추는 일련의 현상들을 꼬집기도 합니다. <패션왕>을 필두로 이러한 메시지 전파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옷 입기가 어렵고 짜증나고 유난스러운 무언가로 여겨지는 일은 줄어들 것 같습니다.
병맛 아닌 패션왕도 응원한다
짧은 변을 늘어놓아 보자면 나름 집중해서 <패션왕>을 읽어본 사람으로서, 이 작품이 흔한 ‘병맛 만화’ 쯤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컸던 것 같습니다. 비록 완성도 면에서 논란이 있지만 ‘이렇게나?’ 싶을 정도로 여러 번 깊게 생각해야 하지만 ‘작품’이 될만한 메시지가 곳곳에 있으니까요. 기안84 작가의 앞으로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