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고 산다.”
이는 우리 근대사의 상처를 환기해 주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우리 사회의 속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 해묵은 상처를 헤집는 현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의 대부분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오르면 친일 부역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을 만큼.
정치인들 가운데서도 친일파 출신의 선친이나 조부 덕분에 논란이 된 이들도 적지 않다. 가까이는 2015년, 선친인 김용주 전 전남방직 회장의 평전을 냈다가 해묵은 친일 논란에 휩싸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현 바른정당)가 있다.
기득권층의 연원, 친일 부역의 역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밝힌 김용주의 친일 행적에 따르면 그는 경상북도 도회의원으로서 출정 황군에 대한 감사 전보 발송을 제안한 이다. 그는 조선 청년들에게 징병제 참가를 독려하는 광고를 냈고 친일단체 간부로서 일제 식민 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또 그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위한 신사 건립 등을 주장했고 대구국체명징관 등에 기부금을 헌납하고 군용기 등 헌납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관련 자료가 드러나지 않아서 다행히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불명예는 피했다.
김무성 의원은 부친이 ‘애국적 삶’을 살았다고 강변했지만 현역 국회의원 가운데 공개적으로 조부의 친일 행위를 공개 사죄한 이도 있다. 중추원 참의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조부 홍종철의 친일행위를 사죄한 더불어민주당 홍영표(인천 부평을) 의원이다.
자유한국당 윤상현 의원의 ‘가계’
같은 인천에 지역구(남 을)를 둔 자유한국당의 윤상현 의원의 가계도 흥미롭다. 민족문제연구소 회보인 《민족사랑》 2월호에는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쓴 친일파 열전으로 ‘조선인 최초의 종로경찰서장·황해도경찰부장, 윤종화’를 다룬 “일사순국(一死殉國)의 뜻을 뼈에 새겨 최선”이 실렸다.
기사의 제목에도 있듯 윤종화(尹鍾華, 창씨명 이사카 카즈오(伊坂和夫), 1908~?)는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경찰서장에 오른 이다. 충남 청양 출신으로 고등문관시험(지금의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입신출세의 사다리를 타고 오른 그는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친일파였다.
일제강점기의 고등고시는 ‘머리 좋고 출세욕에 불타는 식민지 청년에게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입신양명의 사다리’였다. 윤종화는 ‘친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한 이 길에 매달린 ‘식민지의 머리 좋은 청년’이었다.
공주고보를 나와 일본에서 규슈(九州)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한 윤종화는 1934년 10월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1937년 경상남도 창녕군수로 부임했다. 1930년대 후반, 전시총동원체제가 수립되면서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한 식민지의 자원과 인력 수탈에 진력했다. 식민지 지방 관료 윤종화가 징병과 징용, 여성들에 대한 인신 수탈 등 자신에게 부여된 일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음은 물론이다.
그의 충성에 일제는 승급(昇級)이라는 대가로 응답했다. 1939년 이후 그는 승급을 거듭했고, 김해군수로 재직하면서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용물자 조달 공출, 국방헌금 모금, 국채소화(國債消化)와 저축 장려 등의 업무를 수행하여 “지나사변공적조서”에도 이름을 올렸다.
1940년 7월 윤종화는 경찰 고등관으로 옮겨 조선인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위 직인 경시(警視, 오늘날의 총경)가 되었다. 일제하 35년간 조선인으로서 경시에 임명된 자는 스무 명이 채 안 되었다고 하니 그의 출세는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다.
윤종화가 조선인 최초로 경성부 종로경찰서 서장에 임명된 것은 1943년 9월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절의 공안 1번지였던 이 경찰서에 부임하면서 그는 사자후를 내뿜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종로는 반도의 중추지대이고 반도인 중상층 계급이 많은 곳으로 반도 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활동가로 필승체제가 서 있지 않으면 병참기지 반도의 사명을 다하기 어려울 줄 안다. 경찰관은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계몽과 지도를 하여야 할 것을 확신한다. 나는 우선 결전 하 긴급 문제인 방공태세와 근로체제 정비 또는 생산력 확충 등 필승의 온갖 시책의 추진력이 되어 책임을 다하여 나가려 한다.
- 《매일신보》 1943년 10월 1일자
최초 경찰서장, 도 경찰부장 윤종화, 그의 후예들
윤종화는 이듬해인 1944년 11월 고등관 4등의 사무관으로 승진해 황해도 경찰부 경찰부장으로 옮겨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조선인 최초의 경찰서장에 이어 조선인 최초의 도 경찰부장이 된 것이다. 조선인 경찰로 이르기 힘든 최고위직까지 올랐지만 그의 관운은 거기까지였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면서 그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체포되어 평양 삼합리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는 1946년 중국의 훈춘(琿春)과 러시아의 그로데코보로 이송되었다가 같은 해 9월 하바로프스크로 다시 이송되었으나 그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49년 8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는 윤종화를 소재 불명으로 기소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라진 이후에도 칠원 윤씨 윤종화의 집안은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갔다. 그의 아들 윤석순(尹碩淳, 1937년생)은 5·16 쿠데타 후 김종필이 만든 중앙정보부에서 1961년 창립 때부터 1981년까지 20년 동안 근무했다. 1981년에는 신군부가 주도한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해 사무차장이 되었고 11대엔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윤종화의 형은 윤종옥(尹鍾玉)이다. 윤종화가 누린 권력에 비기면 윤종옥은 1935년에 청양군 청장면협의회원을 지낸 시골 유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윤종옥은 청남의용소방대장, 청남면장, 청남우체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비록 ‘면 차원’이지만 ‘권세와 관복(官福)’을 이어갔다.
윤종옥의 아들 윤광순(尹珖淳, 1934년생)은 공군 대령으로 예편한 후 한국투자신탁 부사장, 사장을 역임했다. 그리그 그 아들, 곧 윤종옥의 손자가 바로 자유한국당의 윤상현(尹相現, 1962년생) 의원이다. 그는 새누리당 시절, 박근혜를 ‘누나’로 부르는 몇 안 되는 ‘친박 중의 친박’으로 정계를 휘저었다.
그는 탄핵 이후 당원권 1년 정지의 징계를 받았지만 파면되어 자택으로 돌아간 박근혜를 보좌하기로 했다고 한다. 조원진, 이우현 의원과 함께 정무를 보좌하기로 했다는데 글쎄, 자연인 박근혜에게 ‘웬 정무’가 있을는지.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후과들
박한용 실장은 “친일과 독재로 이어질수록 출세가 보장되는 이 나라, 정말 자괴감이 들 뿐이다.”라고 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대한민국엔 당연히 연좌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조부 윤종옥이나 종조부 윤종화의 친일행위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물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을 끝낸 광복 이후 우리는 식민지 시기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잘못 꿰어진 역사 탓에 친일 부역 세력의 후손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기득권 계층으로 온존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 역사 교과서’를 통해 이승만과 박정희의 친일, 독재 체제를 복권하고자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