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괴물 백과 사전” 작업을 하다가 놀랍게 여긴 일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의외로 조선 시대 설화 중에 ‘구미호’ 이야기가 잘 없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한국 괴물’하면 도깨비와 함께 구미호가 거의 자동적으로 튀어나올 만한 것이 현대 대중 문화판입니다만, 저는 ‘구미호’가 한국의 전설에 자리 잡은 것은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18세기 이전에 기록된 한국의 설화, 전설 중에 구미호에 대한 것이 제대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을 찾지 못했습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구미호’를 아예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구미호는 본래 중국 고전에 언급되는 괴물이고, 중국에서는 신비로운 술수를 부리는 괴물로서 여러 전설이나 설화를 기록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고전을 익힌 조선 시대 사람들도 ‘구미호’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사스러운 것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그것은 구미호 같은 짓입니다.”이라는 식의 말을 썼던 사례는 보입니다. 이런 것은 “조선왕조실록” 등에 가끔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막상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등장하는 설화나 전설은 18세기 말까지도 한국에서 나타나지 않는 듯하며, 심지어 19세기에도 찾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16~17세기의 “잠곡유고”에 실린 “늙은 여우”라는 시를 보면, 전설로 들은 변신하는 여우에 관한 이야기와 중국 고전에 나오는 ‘구미호’를 아예 분리해서 서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좀 범위를 넓혀 보자면, 조선 시대 말에 나온 아예 작정하고 지어낸 소설 속 괴물 묘사 중에 ‘구미호’가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은 몇 번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연대가 별로 오래된 일은 아닌 듯합니다.
현대에 이르러 구미호 이야기가 이처럼 많이 퍼진 이유로, 저는 19세기 이후 출판문화의 발달과 중국 소설이 유입된 영향, 특히 일제 강점기의 일본 설화 영향, 그리고 현대 대중매체의 영향이 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중국, 일본에서는 우리나라보다는 구미호 이야기가 많았고,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이야기가 중국, 특히 일제강점기 일본과 교류가 확대되면서 점점 우리나라로 퍼져 왔고, 다른 신비한 여우 이야기들을 대체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구미호는 꼬리가 아홉 개가 있다는 시각적인 심상이 강렬했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던 것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출판이 발달하면서 인쇄된 이야기가 널리 퍼지는 상황이 되자, “여우” 보다야 ‘구미호’라고 하는 특별한 이름을 붙여 말하는 것이 이야기 하기도 더 쉽기도 하니 말입니다.
게다가 현대의 대중 서적, 라디오, TV, 영화에서 ‘구미호’를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로 만들어서 퍼뜨리면서 현대에는 더욱더 익숙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때문에 현대의 자료인 “한국구비문학대계” 등에 실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를 조사한 것을 보면 신비한 여우에 대한 이야기는 구미호 이야기가 대단히 많아졌습니다. 옛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야기에서 원래 구미호라는 말은 없는 이야기인 것도 슬그머니 구미호가 나타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구미호 대신에 흰 여우?
18세기 이전의 설화 속에 구미호 이야기가 없다고 해도, 그저 요사스러운 여우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습니다. 이런 이야기 속의 여우는 꼬리가 몇 개라든가 하는 특별한 겉모습의 특징 없이 그냥 보통 여우인 경우가 제일 많다고 느꼈습니다. 그냥 여우가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에 대한 사례로는, 진짜 여우 목격담은 아닙니다만, “삼국사기”의 온달 열전에서, 고구려의 바보 온달이 처음 공주를 만났을 때 현실을 믿지 못하고 “여우가 아닐까”라고 의심하는 장면이 거의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기록일 것입니다.
중국 고전에서는 여우가 나이가 많이 들어 백 살이 되거나 천 살이 되면 신선이 된다거나 하늘로 올라간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정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설화로 조선 시대 이전에 기록된 것에서는 이런 이야기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늙은 여우로 묘사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을 뿐, 그저 어떤 신기한 여우가 있고 그것이 왜인지 요사스러운 신비한 일을 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성호사설”의 ‘호매’ 항목을 보면 100년 묵은 여우는 음란한 여자, 또는 미녀로 변할 수 있고, 사람으로 변할 때는 사람의 해골을 얼굴에 덮어쓴다는 말을 중국 기록에서 저자인 성호 이익이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을 주위 사람들이 꽤 알고 있었다는 듯한 설명이 있습니다. 중국 기록의 여우 이야기가 퍼진 것은 그 정도 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냥 여우 말고 겉모습이 특별한 여우를 한번 찾아본다면 제 생각에 사례가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바로 “흰 여우”입니다. 흰 여우가 사람 흉내를 내며 정승처럼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백제를 배경으로해서부터 등장하는 오래된 이야기이고, 조선 후기 “한죽당섭필”에는 술 취한 흰 여우를 협박해서 전우치가 신비한 술법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 외에도 현대에까지 이어진 신비한 여우 이야기에도 흰 여우가 나오는 경우는 적지는 않으니, 좀 더 꾸준히 이어진 오래된 느낌이 도는 여우 이야기로는 흰 여우 이야기가 제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구미호는 일제 잔재니까 쓰지 말고 흰 여우만 쓰자”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미호’는 한국 설화로 일찍 정착되지는 못했지만, 그 자체는 중국 고전에서 건너와서 우리나라에도 예로부터 잘 알려져 있었고 조선 말기에 소설로 나타난 사례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와 현대 이후 인기를 얻게 되었다 해도, 이미 그 자체로 수십 년 이상 널리 파고든 이야기니 만큼 함부로 무시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흰 여우 이야기 등에 비해 ‘구미호’가 그 유행의 역사는 좀 더 얕은 것 아닌가 싶다는 것입니다.
한국 옛 기록 속 신비한 여우가 가진 재주는?
한국 설화 속에서 이런 이상한 여우들이 보여 주는 신비한 재주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꼽아 본다면, 단연 사람으로 변신한다거나, 사람 모습을 만들어 낸다거나, 환각을 보여 주는 부류가 가장 많습니다.
“깊은 산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길래, 남자가 따라가 보니 산속에 어찌 된 일인지 궁궐 같은 집이 있고 온갖 음식과 자신을 좋아하는 미녀들이 있어서 하룻밤 거하게 놀았는데, 아침에 술이 깨고 보니 바위 위에서 낙엽을 덮고 누워 손에는 안주랍시고 나무 열매와 죽은 개구리 따위를 들고 있다더라”
하는 것이 전형적인 여우에 홀린 이야기 형태겠습니다.
단순히 미녀로만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려사”에 실린 태조 왕건의 할머니, 원창왕후의 이야기를 보면, 늙은 여우가 “치성광여래상(熾盛光如來像)”라는 불교의 신령스러운 것으로 변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그럴듯해서,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조차도 망설인다는 겁니다.
여우가 부리는 재주 중에 다채로운 것으로는 “어우야담”에 실린 현재의 “남태령”인 여우고개 이야기를 꼽을 만합니다. 이 이야기는 게으른 사람에게 소머리 모양의 가면을 씌웠더니 진짜 소로 변신하게 되어 버려서 그 사람이 고통스럽게 살게 된다는 동화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직접 여우가 대놓고 등장하지는 않고, 그저 “여우고개”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람이 나옵니다만, 신비한 여우의 재주로 충분히 볼만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이야기를 꾸며 상상해 본다면, 여러 가지 모양의 가면을 준비해 두고, 그 가면에 따라 가면을 쓴 사람을 그것으로 변신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여우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우야담”의 이야기 속에서는 여우가 주인공에게 고난을 주기 위해 소로 변신시켰습니다. 하지만 상상하기에 따라서는 박쥐 가면을 씌워 박쥐로 변신시켜 날아가게 해 준다든가, 위험한 상황에서 잘 싸우게 하기 위해 호랑이 가면을 씌워 호랑이로 변신시키는 이야기도 꾸며 볼 수 있을 겁니다.
앞서 말한 “한죽당섭필”의 전우치 이야기에서는 여우가 이런 부류의 여러 신비한 술법을 써 둔 책을 갖고 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한편 그에 비해, 현대에 채록된 여우 이야기, 구미호 이야기에 자주 나오는 “여우 구슬” 이야기나 사람 간을 100개 먹는 이야기 등이 기록으로 나타나는 것은 18세기 이전 기록에서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가 들어온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일 겁니다.
반대로 재주 부리는 여우의 약점을 떠올려 본다면, 이런 여우는 스스로 변신을 해도 그 본 모습이 여우이므로 사람으로 변신한 상태에서도 사냥개를 무서워한다거나 시체나 생고기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상의 소재를 활용해서 흰 여우로 새로 이야기를 만들어 본다면, 저는 어떤 신입사원이 있는데 유난히 육회를 좋아하고, 개를 심하게 무서워하며, 아주 아주 잘생긴 사람이고, 일도 엄청나게 잘하고, 얼굴이 하얗고, 이 사람이 변신한 흰 여우인지 아닌지 주변 사람들이 의심스러워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혹은 현대 한국은 깊은 산 속이라도 흰 여우로 살기는 어려운 곳이니 본 모습일 때는 적당히 섞여들기 좋은 동물원 등지에서 살면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는 흰 여우 이야기도 재밌겠다고 생각합니다. 흰색이 드러나면 너무 티가 날 테니 염색약을 구해서 바른다든가 하는 내용이 들어가면 즐겁지 않겠습니까? 혹은 옛날이야기 속에서 허구한 날 요물로만 묘사되는 것에 억울해하는 흰 여우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이야기도 상상해 봅니다.
한편 한국어 사전에는 나이가 많은 신비한 여우를 “매구”라고 한다는 설명이 실려 있고, 인터넷을 통해 “매구”가 한국의 신비한 여우라는 식의 이야기가 말이 많이 퍼져 있습니다. 저는 “매구”라는 것은 여우와 직접 관계없이 그냥 요사스러운 짓을 하는 사악한 귀신 같은 것을 두루 일컫는 통칭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귀”나 귀신을 묻는다는 “매귀”가 변해서 된 말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별도의 글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원문: 곽재식의 옛날 이야기 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