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 7일은 유명 안과 의사이자 한글운동가 공병우(公炳禹, 1906-1995) 박사가 노환으로 타계한 날이다. 향년 89세. 안과의사로 특이하게 한글 전용 운동과 한글 기계화와 전산화에 크게 이바지한 공병우는 유언도 남달랐다.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
장례 후 유족들은 후진들의 의학 교육에 도움을 주라는 유지에 따라 그의 시신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해부학 실습을 위해 기증하였다. 그는 죽어서도 자신의 몸을 후학들의 공부를 위해서 내놓은 것이었다.
평안북도 벽동의 유복한 집안에서 팔삭둥이로 태어난 공병우는 스무 살에 조선 의사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의사가 되었다. 1936년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아 이태 뒤인 1938년 공안과 의원을 열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안과 전문 의원이었다.
그는 “눈병을 고치는 일이나 연구는 외국인이 해줄 수 있지만 한글 과학화는 한국인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병원 운영을 아들에게 맡기고 50년 넘게 한글 과학화에 매진했다. 한글도 로마자처럼 소리글자이니 타자기로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영문 타자기를 사다가 분해하여 연구한 끝에 1949년 공병우 타자기를 개발했다.
한글 타자기 개발 등 한글 과학화에 헌신한 삶
한글 초·중·종성으로 글자를 조합하는 창제 원리에 따른 세벌식 타자기는 1949년에 전국과학전람회에 출품되어 국회의장상을 수상했다. 이 타자기는 정부에서 공문서 작성에 쓰게 되면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공병우 타자기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과 뒤이은 전두환 정권이 각각 일방적으로 다른 글자판 표준을 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는 네벌식 글자판이 타자기 표준으로, 1983년에는 두벌식 자판이 컴퓨터 표준으로 채택된 것이다.
공병우는 이를 바로잡으려고 정권과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수모까지 당해야 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공병우는 미국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에 힘을 보태면서도 컴퓨터용 한글문서편집기를 연구했다.
1988년에 귀국한 공병우는 한글문화원을 만들었다. 80대 고령이었지만 그는 재야에서 실력을 떨치던 젊은 프로그래머였던 강태진, 정내권, 이찬진, 안대혁 등과 교류하며 이들을 지원했다. 이들은 한글문화원에서의 인연으로 뒷날 한글과컴퓨터를 창업했고, 1989년 국산 워드프로세서인 아래아 한글을 개발했다.
한글문화원과 세벌식 자판
뒷날 ‘아래아한글’의 개발을 함께한 박흥호와 함께 세벌식 자판 배열을 완성하고 세벌식 입력기 소프트웨어를 만든 것도 한글문화원에서였다. 그는 군사정권에서 세벌식 자판과 조합형 코드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 IT) 표준으로 정착되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공병우는 과학적으로 한글을 모두 표현하지 못하는 완성형 코드를 비판하고 조합형 코드를 지지하였다. 한글문화원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이 만든 한글과컴퓨터의 아래아 한글은 유일하게 조합형 코드에 기반을 둔 문서편집기였다.
공병우는 한글의 창제원리에 맞지 않는 네모 글자꼴의 한글 글꼴의 획일화도 비판하였다. 그는 이른바 ‘빨랫줄 글꼴’이라 불리는 ‘공병우한글’인 ‘공한체’를 만들었다. 네모꼴을 벗어난 형태의 공한체는 글자 높이가 다른 것이 특징으로 한글의 특징을 살린 글꼴이었다. 공한체는 교육에 효과적이며 가독성이 좋고 기계화가 용이해서 시각문화를 다양하게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1990년대에도 그는 한글과학화와 발전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한글문화원은 80년대 중반부터 매킨토시 컴퓨터를 직접 활용하여 직결식 한글 세벌식 글자꼴을 개발하였다. 그는 세벌식이 가장 빠르고 편리하게 한글을 기계와 컴퓨터에 입력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1990년대 PC통신에 세벌식의 우수성에 대해 글을 올리고, 키보드에 붙이는 세벌식 자판 딱지를 무료로 보내주는 일을 계속했다. 글자판이 두벌식으로 굳어지면서 모든 키보드도 두벌식 자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세벌식을 익히려면 반드시 필요한 딱지였다. 1988년에 나도 워드프로세서에 이 딱지를 붙이고 세벌식에 입문했다.
그는 “한글 전용의 빠른 길은 일반인이 즐겨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한글 과학화를 통한 길뿐이다”는 신념으로 한글기계화뿐 아니라 한글전용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한글학회 이사, 한글기계화연구소장, 한글문화원장을 지냈고, 한글 전용 공로로 1968년 문화공보부장관상, 1974년 외솔문화상을 수상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더 과학적이고, 더 빠르고, 더 외우기 쉬운’ 자판 연구에 매진했던 공병우의 ‘세벌식’ 자판의 장점은 따로 덧붙이지 않는다. 비교 우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두벌식 자판을 쓰고 있다. 윈도우, 리눅스, 매킨토시 등 많은 컴퓨터 운영체제에서 세벌식 자판을 지원하지만 국가 표준 규격으로 세벌식이 채택되지 않아서다.
이루지 못한 ‘세벌식’ 신념
공병우는 세벌식 타자기와 세벌식 자판뿐 아니라 1960년대부터 장애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시각장애자 재활을 위한 기관 설립, 수화학교 지원, 점자 타자기 개발, 한 손으로 찍는 워드프로세스 등을 개발하였다.
공병우는 1989년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를 펴냈다. 머리말에서 그는 ‘자서전을 쓰는 까닭 네 가지’를 밝히는데 그 가운데 첫째가 ‘세벌식’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첫째는, 누리에서 가장 과학적인 한글을 500여 년 동안 줄곧 천대만 해 온 우리 민족이 이제부터라도 한글만 쓰면서 한글 기계화의 입력과 출력을 세벌식으로 꾀하여야 겨레의 문화를 빠른 속도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민족 앞에 유언처럼 선포하고 싶은 것이요.
그러나 평생의 소원이었던 과학적인 세벌식 글자판 통일을 보지 못한 채 그는 눈을 감았다. 과학기술처에서 정한 비과학적인 표준판을 폐지하라는 한글 기계의 글자판 싸움을 수십 년 동안 펼쳐온 그에게 정부는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러나 ‘세벌식 한글 타자기 발명가’ ‘한글쓰기 무른모를 직결 방식으로 개발한 이’, 그리고 ‘세벌식 자판 통일을 완성한 연구가’(자서전 ‘머리말’ 중에서) 공병우가 진실로 원했던 것은 훈장이 아니라 과학적인 ‘세벌식 글자판’ 통일임을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