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심판 결론이 났다. 탄핵이라는 것은 국민이 선출한 최고 권력자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행위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이 국회와 사법부에 행정부의 독재를 막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이다. 민주주의를 처음 정치 체계로 받아들인 그리스의 아테네도 일종의 탄핵이라 할 수 있는 도편 추방제를 운용했는데, 아무리 정치력이 좋고 훌륭하더라도 아테네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인물이라면 추방할 수 있는 제도였다. 하지만 아테네의 도편 추방제도에 대해서는 ‘중우정치’의 대표적인 모습이라 비판을 받고 있는데, 여론을 조작해 경쟁자를 제거했던 여러 사례 때문이기도 하다.
아테네의 도편 추방제도 이후 근세 사회에 들어오며 의회 정치에서 탄핵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1373세기 영국의 ‘훌륭한 의회(Good Parliament)’가 에드워드 3세의 사후 섭정을 하고 있던 랭커스터 가문의 부패를 규탄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영국의 대외적 상황은 에드워트 3세가 병사한 후 프랑스에서 획득한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때 랭커스터 공의 정치적 조언자였던 윌리엄 라트머를 비롯한 사람들이 의회에 의해 탄핵당했다. 결과적으로 탄핵은 실패했지만 라트머를 비롯한 관리들이 재판에 회부되고 공직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탄핵은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민주주의와 의회주의 제도에서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독일, 불가리아, 브라질, 미국, 영국, 인도, 홍콩, 아일랜드, 이태리 등에서 탄핵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브라질의 호세프 대통령이 재정적자를 감추기 위해 국영은행 자금을 사용한 혐의로 탄핵당한바 있다.
하지만 근세 역사를 통틀어서 세계 역사에 가장 크게 탄핵이라는 단어를 기억하게 만든 사람은 아마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일 것이다. 1972년 대통령에 압도적인 표차로 재임되었음에 불구하고 물러나야 했던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 실질적으로 탄핵당하지 않았고, 처벌을 받지 않았음에도 탄핵이라는 단어에 가장 많이 연계되는 대통령. 리처드 닉슨과 그의 몰락을 불러온 워터게이트가 이번 논란의 역사 주인공이다.
1. 사건의 발단
1972년 6월 17일 민주당의 전국 위원회 사무실이 운영되는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호텔에 괴한들이 침입했다는 신고가 접수된다. 신고자는 호텔 경비원인 프랭크 윌스. 그는 저녁에 주차장에서 건물로 들어가는 출입구의 잠금장치가 테이프로 막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 그는 항상 그렇듯이 청소 직원들이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실시한 재순찰에서 동일한 테이프가 다시 발견되자 경찰에 신고했다. 청소업체 직원이 모두 철수한 뒤에도 테이프로 자물쇠를 막아 놓은 건 이상하다는 이유였다.
결국 긴급 출동한 경찰에 5명의 용의자가 민주당 전국 위원회 사무실에서 체포된다. 그들은 단순 강도를 주장했지만 경찰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장비들에서 도청 장비가 있는 것을 발견했고 사무실에서도 2개의 도청 장비(1개는 고장 나 있었다)를 발견한다. 5명은 모두 강도 미수와 불법 도청 혐의로 기소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이 발생할 당시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이 미국 정치 역사에 가장 큰 스캔들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화당 후보였던 리처드 닉슨은 여론 조사에서 이미 두 자릿수 이상의 차이로 민주당 후보보다 우세한 상황이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선거의 승리와 재선이 확실한 상황에서 무리해 민주당 선거 사무실을 도청할 이유는 없다고 믿었다.
2. 사건의 전개: 언론과 사법부의 반격
그럼에도 사건은 닉슨과 그 지지자들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일단 선거사무소를 도청하려고 했다는 사실로 연방수사국 FBI의 수사가 시작되고, 수 시간 만에 용의자 2명인 마르티네즈와 바커의 수첩과 주소록에서 하워드 헌트라는 이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워드 헌트는 전직 CIA 요원으로 대통령 재선 위원회의 자금 담당한 고든 리들리의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즉 대통령 재선 위원회와 불법 침입 및 도청 사건 간의 연계점이 드러난 것이었다.
대통령 재선 위원회의 의장이자 전 법무부 장관인 존 미첼은 사건과 위원회의 연관성을 강력 부인했다. 하지만 수사가 진행되는 중 1972년 8월 수사관들은 워터게이트 호텔 용의자 중 한 명의 계좌에서 2만 5,000달러의 수표를 발견하고, 이 수표가 대통령 재선 위원회에서 발행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의혹은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다.
이 무렵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는 이미 사건의 대통령 재선 위원회가 강력하게 연계되었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정보를 얻었고, 워싱턴 포스트의 초보 기자였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취재를 통해 이번 사건의 이면에 법무부와 CIA, FBI, 백악관까지 관련된 은폐 시도가 있다는 사실을 기사화한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뉴욕 타임스과 워싱턴 포스트의 취재 내용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박해 오고 있는 대통령 선거에 모든 관심을 기울일 때라 기사의 주목도가 높지는 않았다.
여기에 닉슨 행정부는 1969년부터 FBI를 이용해 언론사들의 기자들을 도청하고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에는 세무 조사를 강행하는 등 비판적 언론에 대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 닉슨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언론들은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 그리고 이후 타임 지까지 여론을 호도하는 거짓 기사, 사실관계를 왜곡한 기사들을 만들고 있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렇게 대통령 선거에 모든 이슈가 파묻히는 과정을 거치면서 닉스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표 차이로 대통령에 재선되고, 워터게이트와 연관된 사실들도 체포된 사람들과 기소된 사람들이 처벌되는 것으로 끝나는가 했다. 하지만 1973년 1월 미국 연방 지방 법원에서 진행된 사건에서 모든 주류 언론의 이목을 끌게 된다. 당시 사건에 기소된 4명의 침입자들은 모두 유죄를 인정했고 헌트 역시 유죄를 인정했다. 여기에 다른 두명의 용의자, 존 멕코어와 고든 리들리는 무죄를 주장했다.
그런데 사건의 심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재판을 담당한 시리카 판사가 이 사건에 배후에 권력 기관의 관여가 있다고 의심하게 된 것이다. 심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리카 판사는 용의자들에게 백악관이 이 사건에 관여한 바가 있는지를 직접 물어보고, 최종적으로 “누가 이 강도 용의자들의 변호사 비용을 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용의자도 변호사들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시리카 판사의 이 질문은 모든 주요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됨과 동시에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추가적인 언론 조사가 필요함을 인지하게 된다.
1973년 1월 20일 대통령직에 취임한 닉슨은 자신의 백악관 비서진들과 연쇄 회동을 통해 워터게이트 사건이 더 이상 자신의 대통령직 수행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 그는 이 책임을 자신의 백악관 법무 담당인 존 딘에게 부여하고, 백악관에서 나가는 모든 정보를 통제하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이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할 것을 명령했다.
한편 같은 달 30일에 진행된 워터게이트 사건 최종 판결에서 무죄를 주장한 2명의 용의자 존 멕코어와 고든 리들리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하지만 재판을 담당한 시리카 판사는 다시 한번 사건에 배후에 권력기관, 특히 백악관이 관여되어 있음을 강력하게 의심하면서 “본 사건의 판결을 통해 어떠한 실체적인 진실도 밝혀지지 못했다”라고 말함과 동시에 미국 의회의 조사를 요청한다.
3. 의회 청문회, 그리고 대통령의 비밀 대화
1973년 2월 7일 시리카 판사의 강력한 요청과 언론의 의혹 제기로 시작된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미 상원 조사 위원회가 구성된다. 이들은 닉슨 대통령의 선거 기간 불법적인 행위가 있었는지 조사하고, 이와 같은 사실들을 대통령이 지시했는지, 또는 은폐를 지시했는지 여부를 밝혀내고자 했다. 3월 23일 최종 판결문을 읽는 자리에서 시리카 판사는 무죄를 주장했던 용의자 존 메코어의 자필 편지를 공개한다.
“이번 사건 용의자들은 정치적 압력에 의해 유죄를 인정하거나 침묵을 강요받았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백이었으며, 백악관에는 결정적인 치명타였다.
3월 28일 닉슨은 법무부 장관인 리처드 클라인디엔스트에게 백악관 직원이나 자신 모두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얘기했지만 사건 은폐 조작의 책임을 지고 있던 존 딘은 점점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4월 15일 리처드 닉슨은 존 딘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조사를 받은 수사관들과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딘이 모든 은폐 공작의 중심에 있다고 뒤집어씌우기 위한 미팅을 가진다. 이 미팅에서 존 딘은 자신과 대통령의 대화가 녹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다른 비서진인 봅 홀드먼과 존 얼릭먼이 물러나긴 하지만 모든 사건 은폐의 주범으로 자신이 지목될 것이라는 사실을 닉슨과의 대화에서 인지하게 된다.
4월 17일 존 딘은 법무부의 조사관들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닉슨에게 공개하고, 홀드먼과 얼릭먼 역시 조사 대상에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4월 30일이 되자 닉슨에게는 다른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존 딘은 은폐 시도가 있었음을 시인하고 최소한의 진실을 밝힌 뒤 사과함으로써 대통령직을 유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는 이미 거부된 상태. 닉슨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그는 자신의 최측근인 홀릭먼과 얼릭먼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관된 바가 있다고 발표하고 그들을 해고한다.
사건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닉슨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홀드먼과 얼릭먼은 닉슨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그를 보좌해온 측근들이고 워터게이트 사건이 커지지 않도록 최전방에서 언론과 국회 법무부를 상대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물러나자 닉슨이 이 모든 일을 직접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와 함께 닉슨은 새롭게 임명된 법무부 장관인 엘리옷 리차드슨에게 특별 검사를 임명해 워터게이트 은폐 의혹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5월 17일 미 상원의 워터게이트 청문회가 시작되었고 5월 18일에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수사할 특별 검사로 아치볼드 콕스가 임명되었다. 닉슨은 이제 의회의 정치적인 조사와 법무부 특별 검사의 형사 조사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특히 엘리옷 리차드슨은 아치볼드 콕스 특검에 대통령과 워터게이트 사건의 연관성을 조사해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일부 측근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려고 한 닉슨의 의도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6월 25일. 백악관 법무 담당관이자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 총책임을 맡았던 존 딘이 상원 청문회 증언대에 섰다. 딘은 전국 TV로 생방송되는 청문회에서 245페이지에 달하는 증언서를 8시간 동안 읽어 내려갔다. 내용에는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일어났던 각종 불법적인 감청, 언론 통제, 사건 은폐, 강도 행각을 통한 자료 탈취, 정보 조작 행위를 비롯한 불법적인 선거 운동 및 음모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7월 16일에 증인으로 출석한 백악관 부 보좌관인 알렉산더 버터필드는 대통령 집무실에 감청 장치가 있다는 증언을 한다. 존 딘의 주장은 단순한 그의 주장일 수도 있었지만 집무실에 설치된 비밀 감청 장치는 존 딘의 주장을 증명할 증거가 될 사안이었다. 모든 언론과 사람들의 관심은 백악관의 비밀 도청 내용에 쏠렸다. 과연 닉슨은 무엇을 말했는가? 그리고 이를 전혀 알지 못했던 일부 백악관 직원들과 정부 관리들은 충격에 빠졌다. 특별 검사인 아치볼드 콕스와 의회는 닉슨 대통령에게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된 비밀 도청 내용을 담은 테이프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닉슨은 이를 안보와 국가 기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4. 닉슨, 탄핵의 위기에서 결국 사임하다
이제 모든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미국 국민의 관심은 닉슨의 비밀 도청 내용에 집중되었다. 그 내용이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의 관여 여부를 밝혀내는 결정적 증거인 스모킹 건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닉슨은 특별 검사 아치볼드 콕스에게 집무실 도청 테이프의 소환 요청을 철회할 것을 명령했지만 콕스는 이를 거부했고, 양측을 둘러싼 긴장이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10월 20일 닉슨은 법무부 장관 엘리엇 리처드슨에게 특별 검사 콕스를 해고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법무부 장관은 이를 거부하고 자진 사임을 한다. 이에 닉슨은 법무부 차관 윌리엄 럭셀스하우스에게 콕스의 해임을 다시 요구한다. 그러나 법무부 차관 역시 이를 거부하고 사임한다. 코너에 몰린 닉슨은 법무부 차관보 로버트 보크를 통해 특검을 해임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는 닉슨의 정직성에 대한 심각한 의혹을 낳고 언론은 “토요일의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사태를 조명한다. 점차 악화되는 여론에 밀려 TV에 나와 인터뷰를 한 닉슨은 11월 17일 “난 사기꾼이 아니다(I’m not a Crook)”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그가 사기꾼이라는 이미지만 강화시켰다.
미국 대배심을 통해 1974년 3월 닉슨의 집무실 비밀 도청 내역을 공개하라는 판결이 내려졌고 1974년 7월 24일 미연방 대법원은 비밀 도청 내역이 담긴 테이프 전체를 편집 없이 공개할 것을 판결함으로써 닉슨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테이프에는 존 딘과 닉슨이 1973년 3월에 가진 대화 내용을 비롯해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행한 행위와 계획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974년 8월 5일 추가로 공개된 테이프에는 대통령과 그의 측근인 스윙글스, 그리고 홀드먼이 워터게이트 사건이 벌어지고 며칠 뒤에 나눈 대화가 담겨 있었다. CIA를 이용해서 FBI의 수사를 방해하고 막을 것을 논의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으로 닉슨의 미래는 이미 결정된다.
최종 테이프가 공개되기 전 7월 24일, 열린 미의회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27-11로 사법권 및 재판권 방해 혐의로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고 29일과 30일에 각각 집권 남용과 의회 모독 혐의로 탄핵이 제안된 상황에서 마지막 테이프의 공개는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테이프 공개 후 하루 뒤인 8월 6일 의회 법사위에서 탄핵안에 반대표를 던진 10명의 의원이 탄핵안에 찬성함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8월 7일 공화당 수뇌부의 베리 골드워터와 휴 스콧이 백악관으로 찾아와 사임을 요구했다. 그리고 1974년 8월 8일 저녁, 전국에 생방송되는 TV를 통해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된다.
5. 워터게이트 사건은 왜 일어났는가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의 비밀주의와 소통 부재,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와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집착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닉슨 스스로 워터게이트 호텔에 사람들을 보내 민주당 선거위원회의 사무실을 도청하도록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현재는 밝혀진 사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닉슨은 대통령 재선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찬반으로 두 갈래로 갈라진 여론에 밀려 베트남 철군을 결정했지만 절대 베트남을 포기하거나 베트남의 공산화를 두고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압도적인 지지를 확인해야 차기 행정부의 정책을 집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그는 거의 선거 본부와 선거 기획단에 민주당의 선거 전략과 약점을 더욱 자세히 면밀하게 검토하고 정보를 수집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이에 그의 측근들이 워터게이트에 있는 민주당 선거 본부에 대한 도청을 요청했다. 이러한 도청과 감청을 비롯한 각종 불법적인 정보 수집 행위는 이미 1971년부터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전 운동가인 대니엘 엘스버그의 정신과 의사의 상담 기록을 훔쳐내는 것과 같은 행위들이 그런 행위였고, 이런 행동들을 수행한 사람들이 워터게이트 사건 때 체포된 인물들이었다.
결국 워터게이트 자체는 단순히 실패한 불법 도청 사건이었다. 하지만 닉슨과 그 측근들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모든 불법적인 행위가 대중에게 공개되어 정권의 몰락을 가지고 올 수도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렇기에 사건이 발생하자 닉슨과 그 참모들은 사건의 은폐에 앞장섰고 이런 시도는 상당히 오랜 시간 성공적으로 수행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진실과 정의는 결국 그 모습을 드러내는 법. 후버 국장의 사망 이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FBI는 정권에 대한 충성이 강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사건을 수사하면 할수록 백악관과 법무부, CIA의 방해가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고 결국 당시 워터게이트 사건의 총 책임을 맡은 마이클 펠트 부국장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수사에 방해를 받고 있는 사안들을 언론에 비공개적으로 유포하게 된다. 펠트가 워싱턴 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지속적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의 정보를 제공한 정보 제공자였다. 펠트는 여러 언론에 이와 같은 사실을 제공하고 공론화하고자 했지만 이에 관심을 가지고 기사화한 사람들은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였다.
또한 여기서 잊어선 안 될 사람은 미국 지방 법원의 시리카 판사다. 그는 자신 앞에 주어진 사건의 배후에 더 큰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이를 자신의 권한으로 알아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밝히는 것이 자신의 권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를 공론화하고 의회에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해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법관의 의무가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시리카 판사의 행동은 정당하고 존경스러운 일이다. 그가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을 했는가의 여부를 두고는 아마도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역시 이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고민과 진실의 추구는 결국 닉슨의 모든 은폐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시금석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닉슨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언론과 법조인의 사명감을 통한 진실의 추구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너무나 잘 드러난 사례가 워터게이트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닉슨의 대외 정책에 대한 의회의 견제가 이루어졌으며, 대통령 선거 기간에 운영되는 각종 지원 단체에 대한 자금 운영의 투명성이 높게 요구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내 언론의 입지가 강해져 언론인의 지위가 1950년대 매카시즘 반대 운동 이후 더욱 강화된 계기가 된다.
6.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
국회 탄핵 소추 이후 3개월간 진행된 대통령의 탄핵 심판은 우리 사회에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침과 동시에 개혁과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 본다. 탄핵 심판을 통해서 사법 체계의 허술함과 공정성의 부재, 전문직 특히 법조인과 정치인들의 수준이 국민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은 우리 사회에 일종의 자괴감을 주었으나 이들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자성을 불러오고 시스템에 대한 보완의 필요성을 알게 된 것은 다행이다.
이제 많은 사람이 법조인과 사법 체계에 대한 알 수 없는 신비감을 접게 되었고 정치인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수준도 알게 되었다. 또한 언론인들과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의 허상과 위선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우리 사회는 다시 한번 변화와 문제 해결의 기회를 잡았다고 본다. 물론 탄핵 국면과 특별 검사들의 수사, 그리고 각종 의혹을 통해 알려진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부조리의 인지 또한 우리 사회의 변화에 기여할 것이다.
미국의 유명 작가이자 강연자인 지그 지글러는 “문제를 해결하는 첫 번째 단계는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인정하고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원문: 로빈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