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한 여성이 내 블로그에 찾아와서 댓글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페미니즘이나 여성인권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로 인해 자신의 남자친구와 자주 부딪혀서 고민이라는 내용이었다. 남자친구를 잘 설득해보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메일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남자친구의 반발 혹은 성차별을 당연시 여기는 반응’을 10가지 정도 사례별로 정리해서,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면 좋겠냐고 내게 물어왔다.
최대한 성의껏 답변을 해주었다. 따로 페미니즘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학부 때 교양 3개와 재수강 하나를 페미니즘 강의로 들은 게 전부다) 여전히 한남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조언해줄 입장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약간의 도움이라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최대한 성실히 답변을 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당한 말로 운을 뗐다.
남성이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 무언가를 배우는 것보다는, ‘공감’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남성은 명백한 사회적 강자이며, 알게 모르게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해하고 여성들의 입장에 서보려고 노력할 때, 페미니즘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묵인과 방조 혹은 여혐적 언행 등으로 여성혐오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지 않았나 언제나 성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그에게 답변을 해주면서 남성(일명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 기준)이 페미니즘을 견지한다는 것,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고민했다. 젠더권력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남성이 말로만 ‘나는 페미다’하는 게 아니라, 페미니즘을 감지하고 성 평등을 위해 실천하고 싸우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남성들에게는 대체로 성별에 의해 차별당한 기억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주류질서에 잘 순응한 상태다. 여성들이 차별로 인해 체득하는 불안감이나 고통이 없으니 그만큼 운동의 원동력이 되는 ‘절박함’이나 ‘한’ 같은 것도 없다. 그러므로 남성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시혜적이거나 선언에 가까울 때가 많고 실상 페미니스트를 표방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반성해야 할 사람들이 매일 남 욕만 하고 앉아있네’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남성들이 한남에서 벗어나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세 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역시 첫 번째 과정부터 큰 어려움을 느낀다.
1. 반성, 반성, 반성
한남이 페미니즘을 수용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사실 ‘반성, 반성, 반성’이다. 물론 나도 처음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남성사회 주류에 반하는 ‘여성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할 때는 우쭐했었다. 고등학교 때 호주제 폐지를 나 혼자 지지하면서 수학 선생과 싸울 때도, 교양 수업 때 다른 토론 조의 헛소리를 짓밟을 때도 나의 진보성과 나의 옳은 말들에 심취해 있었다.
어렸을 때 페미니즘 혹은 반 성차별을 이야기하던 나는 내가 아주 무고하다고 믿어왔다. 내 삶에 대해서 돌이켜보고,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 상상해보지 못했다. 단순히 내게 성 평등이라는 것은 지당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였고 옳기 때문에 지향해야 할, 그런 것뿐이었다.
2015년도부터 온라인상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나 논쟁을 경험하게 됐다. 나와 생각이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여러 여성의 목소리를 접하게 되면서 나 자신이 ‘살아가며 계속 부당한 권력과 이익을 누렸으며’ ‘학창시절부터 간접적으로라도 여성들을 향한 폭력에 동참하거나 묵인’했고 그럼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을 실감했다.
반성만 한다고 해서 끝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주제 파악’은 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내 사회적 위치나 성격 혹은 삶의 ‘질’ 같은 것들에, 젠더권력의 우위가 일부 작용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 권력을 놓지 못하는 ‘비겁자’라는 것을 스스로가 알다 보니 그 부채의식이 내 안에서 일종의 ‘규율’로 작용했던 측면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안온하고 걱정 없는 한남의 삶을 쉽사리 뛰쳐나가지 못했다. 집안에서는 여전히 나는 ‘한남 아들’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그저 매일 반성하고 더 고민하고 조금씩 내 모습을 바꿔나가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내 안의 ‘한남성’을 극복하는 과정은 남성으로서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2. 페미니즘에 연대하기
반성이나 자기 성찰은 기본으로 깔고, 그 이후에는 여성들의 페미니즘 운동에 어떤 식으로 연대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해왔던 생각이지만 남성이 페미니즘 운동에서 맨 앞에 나서거나 과도하게 주목을 받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 지원군이나 보조자의 역할에 있는 게 맞다고 본다. 그래서 남성 필자가 페미니즘을 교조적으로 설파하는 것도 나는 좀 거북하다. 왜 그 자리를 여성들의 몫으로 두지 않는가?
그래서 남성 스스로 무언가를 주장하고 외치는 것보다 여성들의 운동에 연대하는 것, 즉 지지를 표명하고 반대자들에 대해선 강력하게 규탄하는 행동에 함께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남성들이 몇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부고발자’로서의 역할, 남성공동체에 경각심을 주는 역할, 자신이 남성이기 때문에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역설적으로 설득과 변화를 주도하는 역할(예를 들자면 문유석 판사의 경우) 등을 수행할 수 있다.
어쩌면 남성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집안의 남자들, 남자 친구들, 직장 동료 등등의 남성집단 사이에서 나타나는 주류적인 ‘여혐 정서’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밖에서 아무리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문제를 제기해도 꿈쩍 안 하고 그들만의 정당화를 하며 “요즘 여자들” 타령을 하는 남성집단은 셀 수 없이 많다.
공격을 하든, 설득을 하든, 읍소를 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남성집단을 귀찮게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한남들에게는 “모르면 배우세요”가 아니라 당신들이 왜 배워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배울 수 있는지 장시간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3. 남성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 확립
‘정체성 확립’, 그러니까 남성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인데, 나는 이 단계까지 오지 못했다. 스스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많이 깨졌다. 지금 온라인상에서,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시는 분들과 내 생각은 각론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게 내가 남성이어서인지, 아니면 남성 중에서도 보수적이어서인지는 모르겠다. 그 의견 차이 때문에 온라인상에서 ‘여혐’까지는 아니더라도 ‘역시 어쩔 수 없다’와 같은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깨진’ 일들을 뒤늦게 생각해보면 어떤 건 내가 좀 얕게 생각한 것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강하고 과격한 언어가 더 널리 퍼지는 온라인의 특성상 조금 힘들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여자친구, 친구들, 직장 선후배들과 이야기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가까운 그들과 페미니즘이나 여성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감정이나 삶의 궤적에 조금은 공감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동시에 내 한계를 가장 체감하게 한 것도 그들이 해주는 이야기였다. 나는 여성으로 살아오지 않았고, 게다가 남성으로서도 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적이 없으므로 ‘차별당하는 사람이’ 가지는 감수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이 운동의 정서에 ‘이입’할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답은 없다. 계속 불편해하고, 의문을 품는 수밖엔.
‘시혜적’이거나 ‘자기 만족적’인 페미니즘을 추구하고 싶진 않다. 적어도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나는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진보 운동’이라고 보았고, 이것의 성공 여부가 우리의 삶의 질과 사회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봤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고 싶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내가 명확하게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운동의 주체로 서야 한다. 나는 선명해질 수 없다. 선명한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그렇다면 선명하지 못하고, 무언가 어정쩡한 상태에서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나는 어떤 형태의 페미니스트가 될까? 아니 될 수 없을까?
여전히 한남이지만, 아니 계속 한남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부딪혀 보려고 한다.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