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소수자, 마이너리티에 대한 혐오 정서가 강한 나라일까? 대답하기 쉬울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문제다.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노골적인 혐오 발언이 늘고 있긴 하지만, 직접적인 물리적인 폭력이나 배격에 이르고 있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기에 한국은 소수자를 혐오하는 사회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혐오란 반드시 폭력만을 뜻하진 않는다. 여성은 2등 시민 취급을 받으며 남자들의 지갑에 기생하는 ‘된장녀’ ‘김치녀’로 여겨진다. 소수 인종과 이민자들은 우리의 문화를 파괴하고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로 유입을 막아야 할 것들이다. 성소수자는 말할 것도 없어서, 에이즈를 퍼트려 국가의 세금을 축내고 항문 성교에 집착하는 희대의 악마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다른 존재’로 여긴다. ‘흑형’이란 유행어는 일견 흑인을 치켜세우는 농담처럼 보이지만, 사실 흑인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구분 짓는 칼이다. 이에 대해 가나 시민권자 방송인 샘 오취리는 흑형이란 호칭이 결코 기분 좋지 않다며, 흑형 말고 이름을 불러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같은 인간으로 바라봐달라는 것이다. 흑인이면 모름지기 이러할 것이란 선입견을 버리라고, 한 사람의 정체성을 흑인이란 고정관념에 끼워 맞추지 말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건 결국 같은 맥락에 있는 현상이다. 소수자들을 다른 그 무언가로 여기는 것. 그 위에서 우리는 그들을 측은해 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며, 그리고 적잖이 악마화하기도 하는 것이다. 얼굴빛이 검기에 운동과 음악에 능하고, 남성으로 태어나 남성을 사랑하기에 성적으로 방종하다. 동성을 사랑하기에 패션과 예술에 능하고, 얼굴빛이 검기에 범죄나 마약과 친하다. 모두 차별적인 시선이다. 혐오이며 타자화다.
예술 작품에서도 그렇다. 소수자는 어딘가 다른 존재로 묘사된다. 흑인 문화를 다룬 영화는 으레 R등급(미성년자 관람 불가) 딱지를 달고 있기 마련이다. 랩과 마약, 그리고 총기사고가 화면을 뒤덮는다. 성소수자들은 음침하거나, 우울하거나, 아니면 아예 성적으로 방종한 삶을 산다.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살을 시도하거나 폭력에 희생되고, 그렇게 비극이 완성된다.
그러나 삶이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운동 능력도 뒤떨어지고, 음악적으로 재능이 갑자기 폭발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이성에 끌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갑작스레 찾아온 사랑의 열병에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친구들과 성기 크기를 비교하기도 하고, 야한 동영상을 돌려보기도 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긴 사춘기에 걸쳐 자연스럽게 체화한다.
그렇게 삶은 그 자리에 존재한다. 어떤 흑인 아이는 운동 능력도 뒤떨어지고, 음악적으로 재능이 갑자기 폭발하지도 않는다. 어떤 성소수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이 동성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갑작스레 찾아온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에 고뇌하거나 그로 인한 충격으로 방종하는 대신 자신의 정체성을 긴 사춘기에 걸쳐 자연스럽게 체화한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그들의 삶도 그러하다. 그게 ‘문라이트’가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는 방식이다.
물론 모든 것이 같지는 않다. 리버티 시티 출신의 흑인 소년은 범죄와 마약을 일상처럼 접한다. 또래 아이들의 괴롭힘에 쫓겨 들어간 피난처가 마약 소굴이라거나, 날 이끌어주던 스승이자 부모 같은 존재가 마약상이라거나, 주변인이 마약에 중독되어 날 학대하고 버려두는 일 같은 건 – 동아시아의 치안 좋고 인종 문제 없는 반도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다.
심지어 그 흑인 소년이 게이라면, 그의 유년은 더욱이 고되다. 나를 지지해줄 수 있는 어른도 없고, 비밀스레 만나 같은 정체성을 공유할 또래 집단도 만나기 힘들다. 단지 ‘호모(faggot)’라면 마땅히 배제하고 멸시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마초적인 흑인 커뮤니티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그는 점점 소심해지고 유약해진다.
그건 그가 흑인이자 게이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미국 사회에 여전히 내재된 인종 차별 문제와 그렇게 만들어지는 흑인 커뮤니티의 속성, 그리고 게이에 대한 더 거센 차별과 멸시에 이르기까지, 이것은 그가 소수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던져진 환경이며 역경이다.
그러나 이건 그가 흑인이자 게이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흑인이라 해서 마약과 친할 이유도 없고, 게이라 해서 소심하고 유약할 이유도 없다. 다만 그렇게 만들어질 뿐이다. 소수자를 차별하는 사회 환경과 문화가 그를 그렇게 빚어낸다. 주류파, 다수파가 소수자들 하면 으레 생각하는 바로 그 선입견에 따라서 말이다.
오스카는 미국 영화계 최대의 축제지만, 백인에 치우친 시상자 구성과 수상 결과 등으로 ‘백인들만의 잔치’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백인 위주의 세계는 백인들의 세계를 조명한다. 혹여 게이라거나, 여성이라거나 하는 소수자들을 조명하더라도, 어딘가 불완전하고 어그러진, 불행하고 결핍된 삶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문라이트’는 흑인이자, 정체성 문제로 흔들리는 게이의 삶을 다룬다. 소수자로서의 그의 삶의 궤적은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몹시도 어색하고 낯선 것이다. 그 주류란 미국이라면 백인 이성애자들일 터이고, 한국이라면 아마 아시안 이성애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장과 삶의 궤적은 흑인스럽다거나, 게이스럽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고 보편적이다. 또다시 그게 ‘문라이트’가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이다. 보편성 속의 비보편성, 비보편성 속의 보편성. 백인과 흑인, 히스패닉과 아시안,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들, 주류와 소수자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산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 같은 삶을 산다.
소수자들에게도 삶은 늘 그곳에 있었다. 폭력과 공포, 분노와 증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통의 삶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주류의 시선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보이지 않았을 따름이다. 오스카는 거기에 작품상을 주었다. 늘 우리 주변에 있었으며, 늘 우리와 같았지만, 우리가 조명하지 않았던 삶의 궤적. 소수자들의 삶이 늘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에.
원문: YEINZ.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