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 수녀는 힘없고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는 사랑의 선교회를 통해서 빈민, 병자, 고아 등을 위한 헌신을 보여주어 인류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존경받아 마땅한 봉사자 중에는 이름 없이 살다간 사람도 많습니다.
그중에서 조선의 테레사, 조선인들의 어머니, 푸른 눈의 어머니라고 불렸던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J. Shepping), 서서평은 어렵던 조선말에 백성과 함께하며 헌신적으로 살다 간 성자였습니다.
푸른 눈의 어머니 서서평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 백성들… 나라를 팔아넘긴 자들은 자손 대대로 풍요롭게 살 길이 열리는 순간이지만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던 조선백성들에게는 더욱 피폐한 삶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1912년 조선에 온 쉐핑은 힘없는 백성, 가난한 서민, 멸시받는 거지와 따돌림받는 나병 환자 등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이며 간호사입니다. 본래 이름은 ‘엘리제 요한나 쉐핑’입니다. 독일인이었던 쉐핑이 미국으로 건너가며 가진 이름이 엘리자베스 쉐핑이죠.
푸른 눈을 지닌 독일계 미국인이었던 쉐핑은 조선에 오며 서서평이란 이름을 가집니다. 그리고 조선어를 하고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으며 보리밥과 된장국을 먹는 조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선교사 겸 간호사로 조선에 파견되었지만 서서평으로 살며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는 것을 보고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도와주었고, 한국 간호학계의 기틀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흔히 문둥병이라고 부르는 나병(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치료에도 공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선인들에게 푸른 눈의 어머니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여성의 교육과 불우아동 봉사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당시 선교사는 생활비로 3원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 쉐핑이 자신을 위해 쓴 돈이 겨우 10전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불우한 조선인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불우한 아동들을 14명이나 입양해서 키웠고 ‘이일학교’와 ‘조선간호협회’도 세웠습니다.
1934년, 22년간 조선인으로 산 서서평이 운명할 때 가지고 있던 것은 겨우 반 장짜리 담요와 동전 7개였습니다. 풍토병과 과로로 숨졌지만 영양실조 증세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침대맡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간호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
쉐핑은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초년은 불행했습니다. 아버지는 1살 때 사망하고 어머니는 미국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할머니 품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할머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쉐핑은 가톨릭 교구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할머니마저 사망한 후 고아가 된 아홉 살의 쉐핑은 어머니를 찾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쉐핑은 미국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데 성공하고 뉴욕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간호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탓인지 불쌍한 이웃을 돕는데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낮엔 간호사로, 밤에는 선교사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이때 쉐핑이 기독교로 개종하며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와 충돌이 있었고 결국 둘은 갈라서게 됩니다.
그런 쉐핑에게 친구가 “조선에 훈련된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주었습니다. 그녀는 조선으로 갈 결심을 했고 기독교 교파인 남장로회에서 파견해주었습니다.
1912년 쉐핑은 조선에 도착합니다. 그녀는 한국어를 배우고 이름도 한국식으로 서서평이라고 지었습니다. 간호 선교사로 새로운 삶을 맞는 기대 가득한 시점이지만 그녀에게는 조선인들의 현실이 참담하기만 했습니다.
처음 맡은 일은 전라도에서 간호사 양성과 기독교 선교활동이었고,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이 터지자 조선인들을 치료해 주고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는 이유로 일제는 서울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1920년대에는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방문 간호와 공중위생에 힘썼으며 인신매매나 공창폐지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머리가 지저분한 여성을 보면 손수 빗질해주고, 속옷이 보이거나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면 옷매무시를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더불어 노예처럼 살아가며 인신매매를 당하던 소녀들을 구출해 교육하고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 인물로 키워냈습니다. 서서평은 14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며 나병 환자의 아이들을 입양하도록 주변에 알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쉐핑의 공헌
서서평은 한국 나병 환자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나병 환자는 병의 전염성 때문에 따돌림받고 멸시당했습니다. 서서평이 만든 나병 환자 시설도 주변 주민들이 반발 때문에 시외로 옮겨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서서평은 포기하지 않고 환자들을 보살피고 보듬어 새로운 희망을 품게 도왔습니다. 그녀가 목사님과 서울에 상경했을 때는 나병 환자들과 모여서 대행진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일제총독부는 결국 소록도에 나병 환자 단독시설을 허락하고 지금의 국유지인 전남 소록도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서서평은 선교사이기도 했기에 조선인들에게 성경의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해방의 꿈을 가지도록 도왔습니다. 자신의 월급을 쪼개서 운영비를 마련하며 시작한 이 사업은 한국의 문맹 퇴치에도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또한 1923년엔 조선간호부회를 조직했습니다. 국제간호협의회(ICN)에 가입하려 노력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습니다. 이 단체는 지금의 한국 간호협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1922년 이일학교(Neel Bible college)를 설립한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처음엔 학대받는 여성들, 배울 기회를 못 가진 여성들을 계몽하기 위해 침실에 모여 공부하곤 했습니다. 이후 미국인 친구 로이스 니일(Lois Neel)의 후원을 얻어 그의 이름을 따 정식으로 지은 것이 이일학교입니다. 지금의 한일장신대학교죠.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여성의 지위는 매우 낮았으며 힘없는 계층의 여자들은 성매매에 희생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한 달이나 걸려 봉사를 다녀온 어느 날 서서평은 이름도 없이 살아가는 조선 여인들의 인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부인이면 ‘대전댁’, 어리면 ‘큰 년’ ‘작은 년’ 같은 명칭을 이름 대신 불리며 자기 인격권이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서서평은 이일학교를 설립해 여성교육에도 이바지했습니다.
서서평은 1934년 만성 풍토병과 과로로 숨졌습니다. 그녀가 남긴 것은 동전 7개와 강냉이가루 조금, 그리고 담요 반 장이었습니다. 그나마 있던 담요 한 장마저도 길거리의 거지를 위해 반을 잘라주었기 때문입니다. 서서평의 장례식에는 도움을 받은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진정한 푸른 눈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유언에 따라 시신도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되었습니다.
서서평의 침대맡에 있던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문구는 이기적인 행복만을 쫓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합니다.
원문: 키스세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