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정치 상황과는 무관하게 소시민들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고 여기기 쉽다. 여기서 자유란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는 사전적 뜻으로의 자유다. 가끔 ‘표현과 사상의 자유’ 문제가 정치적 현안으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게 내 삶의 어떤 부분과 겹쳐지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다.
경북의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배용한(65·수학), 박무식(54·영어)도 그런 소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들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합원이었고, 시민단체인 6·15 대구경북본부 상임대표(배용한)와 안동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정책실장(박무식)이었다는 점이 여느 소시민과 달랐을 뿐이었다.
2011년 6월 19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른 아침, 안동 근교의 시골집에서 집 밖으로 소변을 보러 나온 배용한은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 낯선 차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볼일을 보고 나왔을 때 이미 그들은 마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국가보안법이 그들에게 왔다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였다. 영장을 제시하고 그들은 집과 차량을 뒤지기 시작했다. 압수수색은 그가 근무하던 의성의 학교 교무실에서도 집행되었다. 같은 시간, 안동시 용상동 박무식의 아파트에서도 압수수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찰은 영양에 있는 박무식의 학교 교무실과 사택, 그가 담임하던 고3 교실까지 뒤졌다.
뒷날 배용한은 이날을 ‘어느 한순간 캄캄한 어둠으로 던져졌다’고 회고했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도 경찰이 차를 세우면 자신이 어떤 법규를 위반했는지를 곰곰 더듬어보게 마련이다. 하물며, 휴일 이른 아침에 들이닥친 경찰의 압수수색, 그것도 국가보안법 제7조, 그 서슬 푸른 법 조항 앞에서라면 없던 죄도 마음속에서 지어낼 일이었다.
그러나 영장에 적시된 국가보안법이 자신의 삶과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한 어떤 행위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었는지 전혀 짚이지 않았다는 말이다. 국가가 자신에게 물은 범죄행위가 무엇인지 가늠되지 않는 당혹감 속에 두 달이 지났다.
이들이 자신에게 겨누어진 혐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게 된 것은 8월과 9월에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으면서였다. 이들의 혐의는 ‘이적 표현물을 제작·배포’하여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하였다’는 것이었다.
‘적을 이롭게 하는 표현물’? 국가보안법은 두 사람이 안동지역의 교사와 지인들이 회원으로 있는 산악회 카페에다 올린 게시글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이들이 직접 쓴 글이 아니라, 지금도 인터넷에 걸려 있는 <통일뉴스> 기사를 옮기거나 인터넷 곳곳에서 퍼온 웹 문서를 발췌해서 올린 글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제3의 혐의’가 있는 건 아닐까
공안 당국은 그런 행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어서 상응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실정법을 어긴 혐의만으로 이들이 인터넷 카페에 퍼나른 통일 관련 뉴스, 남북의 화해·통일과 이어지는 논의들은 간단히 ‘이적 표현물’로 뒤바뀌어졌다.
그처럼 이들의 혐의는 일반의 상식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항소심이 끝날 때까지도 두 사람 다 ‘자신도 모르는 제3의 혐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고 술회한 결정적 이유였다. 배용한이 ‘차라리 스스로 조금이라도 인정할 죄가 있었다면 편한 마음으로 벌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했다.
두 차례의 조사로 자신들의 혐의가 충분히 소명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일단 그것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지 않았겠냐고 숨을 돌렸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이후 6년여에 걸친 길고 지루한 법정공방으로 들어가는 터널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2011년 12월 7일 아침, 출근을 앞두고 들이닥친 서울경찰청 보안수사대에 체포되어 두 교사는 서울로 압송되었다. 법원에서 심사를 받고 경찰서 구치소에 갇혀 대기하면서 이들은 비로소 자신들에게 지워진 국가보안법의 굴레가 자신들의 삶을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딸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배용한은 조사를 받으면서도 딸아이의 결혼식 생각밖에 없었다. 구속영장이 기각되어 돌아와 이듬해 봄 그는 무사히 이웃의 축복 속에 첫딸을 여읠 수 있었고 그해 여름에 자신의 회갑을 맞이했다.
‘어둡고 긴 터널’로 들어가다
2012년 2월에 박무식에게는 구속영장이 재청구되었지만 ‘범죄사실이 소명되지 않고 증거 및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 해(2012년) 6월에 두 사람은 서울 중앙지검에서 다시 조사를 받았다. 압수수색으로부터 꼭 1년 만이었다.
다시 한 해가 흘렀다. 끝난 것도 이어지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은 전혀 개운하지 않았다. 그것도 ‘끝나야 끝나는 것’이었다. 2013년 6월, 대구지방검찰청 안동지청은 두 사람을 각각 불구속기소 했다. 압수수색으로부터는 2년, 검찰 조사가 끝나고 다시 1년이 지나서였다.
2013년 박무식의 첫 공판에서 재판장은 ‘거의 2년이 다 된 시점에 기소한 이유’를 물었고 검사는 ‘본인의 권한’이라고만 답변하였다.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국가보안법 사범을 2년 동안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가 ‘뜬금없이 기소’한 이유를 그는 아직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재판장은 2014년 11월부터 결심을 하려 했지만, 기일은 계속 바뀌었고 검찰은 변론이 종결된 뒤에까지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검찰은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2015년 6월 30일, 열두 번의 공판 끝에 1심이 끝났다. 재판부는 ‘명백한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적 목적이 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각각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검찰은 이내 항소했고 두 사람은 다시 2심을 기다려야 했다.
피고인이 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일은 단순한 시간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송달되는 공판기일 통지서와 기일변경 명령 등 등기우편으로 점철된, 당사자만 아니라 가족들마저 일상적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피고인들은 숱한 불면의 시간과 위산과다로 인한 속쓰림을 겪어야 했다.
대구지법에서 2심 첫 공판이 열린 것은 다시 1년 후인 2016년 4월이었다. 10월, 네 번째 공판부터 검사가 두 사람 더 붙었고, 그중 한 사람은 대검 공안부에서 파견된 이였다. 이들은 공소장을 변경했고, 집요하게 새로운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결심 이후에도 검찰은 의견서 3권, 참고 자료 2권을 내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1월 25일의 결심에서 변호인 이광철 변호사는 정연한 논리로 열정적인 변론을 펼쳤고 피고인들도 지금까지 성실하게 재판에 임해 온 소회를 밝혔다. 그것은 6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반 징역살이’를 해온 피고인답지 않게 감정을 최대한 절제한 것이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고 합니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보는 풍경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남북관계도 그렇습니다. 시대의 상황에 따라 공존 번영의 남북화해가 되기도 하고 주입된 증오나 학습된 미움에 따라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 박무식
“나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알지 못하고, 그 정권을 추종하지 않습니다. 다만, 북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릴 뿐입니다. 북녘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 동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땅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내금강도 가보고, 묘향산도 가보고 싶습니다. 청천강 맑은 물에 손 담가보고 싶습니다.” ― 배용한
2017년 2월 17일 10시(박무식)와 오후 2시(배용한)에 각각 열린 마지막 여덟 번째 공판에서 재판부는 두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선고 이유는 1심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고인의 행위에 이적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의 존립·안전과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에 실질적 해악이 되지 않는다. 피고인이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 선군정치, 핵 개발, 군사력 강화와 같은 노선을 맹목적으로 찬양 동조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두 사람은 국가보안법 위반(찬양·고무 등) 피의자로 2년, 피고인으로 3년 세월을 살았다. 서울에 붙잡혀 갔던 첫해에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박무식에게 “아빠, 선생님을 못하면 우린 어떻게 살아?”하고 물었다. “농사짓고 살지, 뭐”하고 대답하니 “그럼 됐어”하고 놀러나간 그 아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세월이었다.
‘무죄를 확신했지만, 무죄선고를 확신할 수 없던’ 세월
딸의 혼사를 치르고 회갑을 맞고 정년퇴직을 하고 지난해엔 부친을 여의었던 시간이 배용한의 5년 8개월이었다. “무죄를 확신했지만, 무죄 선고를 확신할 수 없었던 세월”이었다고, “고통의 긴 터널, 이제 어렴풋이 끝이 보이는 듯하다”고 배용한은 말했다.
오래 통일운동에 종사해 왔다고 해서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피의자·피고인으로서의 삶이 여느 사람보다 덜 힘든 것은 아니었다. 정년 전에는 사표도 낼 수 없고, 허가받지 않고는 나라 밖 여행도 할 수 없고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법원 송달을 목을 매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들. 2심 선고 후 배용한의 소회다.
나는 내 나름대로는 평생을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선고를 받는 순간 법정에서 홀로 서 있지 못하여 의자를 꼭 잡고 있었습니다. 피의자가 된 후, 피고인인 세월 동안 나란 인간이 이렇게 나약한가 하는 점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게 고통스러웠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내가 구차하게 이들에게 내 무죄를 구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지니 몸이 약해졌습니다.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도 일주일이나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피고인으로, 그것도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되어 살아간다는 건 그런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스스로 무죄를 확신했지만, 유무죄를 가르는 것은 몇 줄의 법 조항이라기보다 재판장의 판단이었다.
배용한은 사건 초기에 국가보안법을 읽어보니 “우리 현실에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 있을 법하지 않다는 생각에 이 법에 별문제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항소심이 끝 무렵에 비로소 그는 깨달았다.
이 법으로 그들은 나와 같은 무고한 사람을 조사하고, 잡아가고, 가두고, 유죄 선고를 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죄 판결받은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로 한 걸음 나가는 것이고,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된다는 생각입니다.
2심까지는 승리했지만, 검찰은 다시 대법원에 상고할 것이니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나기까지 두 사람은 이후로도 얼마간은 더 피고인으로 살아야 한다. 지난 5년 8개월 동안 이들을 짓누르던 국가보안법의 굴레를 벗고 이들이 평화와 통일을 꿈꾸는 건강한 시민으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정년퇴직한 지 2년이 지난 배용한은 ‘기운이 그만할 때 해외여행을 좀 다니라’는 주변의 권유를 자주 받는다. 아내도 은근히 원하건만 2015년에 재판장의 허락을 받아 발급받은 여권은 이미 기간이 만료되었다. 그가 피고인 신분을 벗고 먼 길을 떠나도 되는 날은 언제일까.
두 선후배 교사가 겪고 있는 국가보안법 사건을 통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기실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국가보안법 사건에 적시된 이적 표현물이란 여느 가정의 서가에 얼마든지 꽂혀 있는 책일 수 있다.
또 우리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길어온 게시글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해악을 끼치는 무시무시한 물건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한 우리의 자유는 온전하지 않다. 때로 표현과 사상의 자유란 공민 교과서에나 존재할 뿐 우리 개인의 삶과 무관한 추상적 자유일 수도 있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보내는 축하와 함께 우리는 스스로 되묻는다. 정말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온전한 것인가. 날것 그대로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원문 :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