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 떡밥이 한참이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연경 편에 서 있는 지금, 흥국생명은 미쳤다고 똥고집을 부리는 걸까? 그래서 뒤져봤다. 그 결과, 그다지 법과 제도는 물론 정당성도 김연경의 편만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다.
서로가 억울하다는 김연경과 흥국생명
사실 김연경과 흥국생명 관계는 꽤 훈훈했다. 김연경은 흥국생명을 4년간 3번 우승시킨다. 그 중 정규리그 MVP 3회, 챔피언 결정전 MVP 3회, 공격상 3회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흥국생명은 대승적 차원에서 큰 물에서 놀라고 김연경을 임대료 없이 일본으로 이적시킨다. 김연경도 후하게 연봉의 10% 정도를 장학금으로 쾌척한다. (삥 뜯겼다는 이야기가 돌던데, 확인된 바는 없다)
하지만 이후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망가진다. 일본 생활 2년을 마친 2012년 김연경은 에이전시와 손을 잡고 독자적으로 터키 클럽팀과 계약한다. 흥국생명은 여전히 자기 소속이니 독자적인 계약은 말도 안 된다고 항변한다. 제1의 아해가 억울하다 말하고, 제2의 아해가 억울하다 말한다.
둘이 왜 억울한가? 김연경에 빙의해 보자.
“야, 이것들아. 원래 국제 규정에 따르면 해외 임대도 FA 기간에 포함된다고. 근데 나 한국서 4년 뛰고 일본서 2년 뛰었잖아. 그러니까 난 FA야. 근데 구단에서 아직도 자기들 소속이래. 이게 말이 되냐고? 나 FA 자격으로 에이전트 중간에 끼고 계약하면 돈 더 벌어!”
다음으로 흥국생명에 빙의해 보자.
“야, 이것들아. 우리가 김연경 6년 쓸 수 있는 거, 나름 애 크라고 4년만에 해외에 임대했어. 우리 임대료 한 푼도 못 받았어. 말 그대로 큰 뜻으로 공짜로 풀어준 거지. 근데 김연경이 우리가 양보한 건 무시하고, 이제 FA 되겠대. 우리가 호구로 보여?!”
그래서 이게 어떻게 됐냐… 이 당시에는 ‘국제배구연맹(FIVB)의 뜻에 따르자’로 적당히 넘어갔다. 그런데 FIVB에서 흥국생명 손을 들었다. 여기까지가 팩트다. 그리고 김연경 측은 “나랑 흥국생명이랑 썼던 합의서(여기에는 김연경은 흥국생명 소속이며 흥국생명으로 복귀할 거라는 내용이 있다)를 흥국생명이 FIVB에 넘기지 않기로 했는데 지들 맘대로 넘겼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별다른 근거는 없다.
흥국생명과 대한배구연맹은 김연경 죽이기?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대한배구연맹의 규정은 두 가지다. 먼저 김연경이 일본 진출 후 생긴 신설 규정이다.
(일본 임대 전) 유상임대로 외국에서 뛴 기간에 대한 규정 없음 > (임대 후 신설) 유상임대로 외국에서 뛴 기간도 FA 자격 기한에 산입
이 규정이 김연경에게 적용된다면, 그녀에게 더 없이 감사할 일이다. 4년 한국 + 2년 일본만으로 FA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소급적용이라는 이유로 김연경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김연경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소급적용이 아니더라도, ‘국제 룰’을 따라 ‘당연히’ 임대 기간은 FA 자격 기한에 삽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허나 흥국생명은 억울하기 그지 없다. 그랬다면 왜 굳이 ‘무상 임대’를 택했겠는가? 지금처럼 가치가 폭등한 시기는 아니지만, 일본 이적 당시만 해도 이미 김연경은 세계무대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었다. 굳이 임대료 한 푼 받지 않고 넘길 필요가 있겠는가? 하다못해 2년 간 흥국생명에서 뛰었다면 더 상위권에 있었을 텐데. 김연경이 나간 4년간 흥국생명의 성적은 4위, 3위, 5위, 5위이다. 참고로 6팀 중 순위다(…)
또 하나는 FA 규정의 ‘정규리그’ 표현이다. 김연경에게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정규리그’가 V리그만을 칭하지 않는 점을 지적한다. 즉 해외의 정규리그 역시 정규리그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허나 이 규약이 쓰여진 곳이 바로 ‘한국배구연맹’이고, 한국 프로배구에 소속된 이들은 당연히 연맹의 규약을 준수하겠다는 계약 하에 발을 들인 것이다. 이 부분을 무시한다면, 리그 자체가 와해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FA 제도의 의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계약기간은 이미 끝났다”는 게 김연경 측의 주장인데, 이를 왜 배구계는 ‘어디도’ 받아들이지 않을까?
김연경의 주장, 선수와 구단의 공동 이익이라는 FA제도 기반을 무시
김연경의 주장이 힘을 받기 힘든 건 FA 제도의 존재 이유에 있다. 규정을 해석할 때는 단순히 글자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규정이 생겨난 이유에서부터 합리적 판단을 이끌어내게 된다. ‘정규리그 6시즌 뛴 선수에게 FA를 부여’한다고 할 때 ‘국내리그’가 없다고 해서, 해외 어느 리그를 뛰든 정규리그로 인정해 FA 권한을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FA 제도는 ‘선수를 위한 제도’로, 선수들이 리그의 독재에 맞서 싸우며 얻어 온 것이다. 요즘이야 선수 노조가 힘 좋다고 유명한 메이저리그이지만 1969년 커트 플러드가 구단의 일방적인 트레이드에 반발할 때조차 법원은 ‘프로야구는 독점금지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1922년 판결을 지지했다. 이후 선수들의 단합과 반발이 지속되며 지금의 FA제도에 이른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 역시 선수협의 노력을 통해 FA 제도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FA 자격을 얻기 전까지 ‘구단은 선수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가진다’는 룰을 인정하고 준수하며 상호 이익을 추구함을 기반에 두고 있다. 유럽 축구와 비교하는데, 유럽 축구는 열린계(opened system)로 한국과 미국의 프로스포츠가 기반한 닫힌계(closed system)와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한국 프로축구 역시 닫힌계로 굴러가고 있다. 닫힌계가 딱히 나쁜 건 아니다. 열린계 시스템을 채택할 경우 몇몇 대자본의 강팀으로 선수들이 몰려서, 자본이 적은 팀들은 금방 사장될 수 있다.
그렇다고 프로배구의 FA 제도가 극히 불합리한 것도 아니다. 한국 프로야구는 FA가 되기까지 7년이 걸린다. 그것도 이적료와 보상선수를 지불하고서야 팀을 옮길 수 있으며,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는 9년이 필요하다. 이에 비하면 여자 프로배구는 6년이면 FA 자격을 획득한다. 물론 이는 배구계가 천사라서가 아니다. 농구나 배구는 한 선수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즉, 프로배구의 FA가 되기까지의 기간이 짧은 것은 신인 한 명 잘 뽑아서 장기간 리그가 초토화되는 걸 막고자 하는 팀간 타협의 결과물이다.
김연경의 주장은 원소속팀이 소속 기간 동안 아무런 이익을 보지 못해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이는 FA 제도의 이유인 ‘선수와 팀의 공생’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설령 법적으로 김연경의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그러면 FA 제도의 취지를 무시한 김연경이야말로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마지막 질문. 정말 흥국생명은 김연경의 앞길을 가로막았는가?
흥국생명은 김연경을 자기 팀에서 뛰게 하고 싶을 것이다. 김연경만 있으면 약팀이 단순간에 우승 1순위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국생명은 일본과의 계약이 끝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김연경이 원하는 해외 팀으로 이적시켜주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반해 김연경은 외국으로 나갈 생각은 있지만, 반드시 FA 자격으로 나가고자 하고 있다.
이 때 팀과 김연경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임대료, 또는 이적료이다. 이적료는 김연경이 아닌 해외 팀이 흥국생명에게 지불할 돈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흥국생명은 자신들이 임대료를 전혀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고,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반박 자료는 없다. 이제 와서 이걸 받겠다는 게 ‘도의적으로’라도 그렇게 잘못된 자세일까?
정리해 보자. 원래 6년이 지나서야 자유의 몸이 될 선수가 4년만에 해외 진출에 의지를 가졌고, 여론도 그쪽 편이었다. 흥국생명은 선수의 뜻을 존중해 4년만에 해외 시장으로 김연경을 풀어줬다. 그리고 김연경은 2년 임대 기간 동안 국내에서 벌 수 없는 고연봉을 받았고, 이제와 흥국생명은 자신들이 2년간 얻지 못한 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이적료와 임대료로 이익을 얻기를 원한다. 그런데 왜 김연경은 구단에 이적료를 벌 기회를 부여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인가?
흥국생명은 좀 호구스럽지만, 어쨌든 선수와 구단의 상호 이익이라는 FA 제도에 대한 존중에 기반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흥국생명을 단순히 ‘악한 가해자’로, 김연경을 ‘선한 피해자’로 볼 수 있을까? 김연경의 해외 진출을 반기면서도 김연경과 흥국생명을 선악 구도로 바라볼 수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