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교 교사를 그만둔 이계삼
‘이계삼’이라 하면 나는 가장 먼저 정직이 떠오른다. 1973년생인 그는 2000년대 초반 수도권에서 중등교사로 임용되어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인 경남 밀양으로 돌아왔고 여기서 10년 정도 선생님 노릇을 하다가 2012년에 그만두었다. 그가 교사를 그만둔 까닭은 학교가 교육 불가능 상태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총선을 앞둔 2016년 2월 그가 펴낸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KTX 여승무원을 인터뷰하는 말미에 이계삼은 자기 학교 학생들을 위하여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해고된 지 오래된 만큼 오랜 세월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벌여온 KTX 여승무원은 부탁을 거절한다. 학생 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나중에 좋게 될 줄 알았는데, 또 그렇게 해서 KTX에 정규직인 줄 알고 취직했는데 결국은 비정규직이 되어 이렇게 피눈물 흘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나중에 밝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노라 거짓말할 수도 없고,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해도 앞에는 고달픈 비정규직 나날이 있을 뿐이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다는 얘기다. KTX 여승무원 관련 얘기를 그는 아주 생동하고 실감 넘치는 필치로 그려내어 감동을 준다. 도저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는 그렇게 사람 마음을 저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표현을 글로 지어내는 재간이 없다.
이계삼은 이 승무원의 얘기를 녹음해 와서는 아이들에게 교실에서 들려준다. 이것을 들은 아이들은 싸─하게 조용해진 교실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며 눈물을 훔칠 뿐이었다. 아이들은 본능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제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지개가 살고 있다고 비현실을 현실인 양 가르칠 수도 없다.
그는 이런 현실을 앞에 두고 비켜서지 않았다. 아무리 훌륭한 교사가 오더라도 현실이 이 모양 이 꼴인 이상 더 이상 어떻게 가르치고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교직을 그만두고 학교 바깥으로 나왔다.
2. 용기라기보다는 정직함
어떤 이는 이계삼의 이런 결정과 행동을 두고 ‘용기’를 떠올릴 것이다. 지금 교사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안정적인 직업이다. 근속 기간이 20년인가를 넘으면 연금도 나온다. 그런데도 그는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이 그만두었다. 전체 근속 기간이 10년 남짓이니 연금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편하고 안락한 삶을 걷어차 버린 것이기에 용기라 해도 틀리지는 않겠지. 그러나 나는 그것을 용기에 앞서는 정직이라고 본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사라지고 가르칠 수 없는 것만 남았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은 교사가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어쨌든 사기꾼이다. 그는 더 이상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고는 교사를 그만두었다. 이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정직이 없으면 아무리 용기가 있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3. 실력자 이계삼
‘이계삼’이라 하면 내게 두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실력이다. 그는 실력이 있는 사람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는 학교 밖으로 나와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어른이든 아이든 함께 어울려 생활하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생활을 하려고 했다. 이처럼 학교 교사 월급 따위 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다. 그런 생활을 위해 나름 알뜰하게 준비도 해왔다. 그래서 그에게는 한 치도 비굴함이 없다.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 실린 글을 보아도 그렇다. 자신의 힘으로 쌓아온 실력이 있고 그런 실력에 바탕을 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돌아보면 이렇게 실력이 있는 사람이 드물다. 자기 힘으로 자기 한 몸 충분히 거둘 능력을 갖춘 사람이 흔하지 않은 것이다. 자기 힘으로 자기 한 몸 제대로 거두겠노라 마음먹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다. 무슨 대기업 임원이라 하더라도 그 자리를 그만두면 소득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이 남의 밧줄에 매달려 있을 때 아등바등 힘써 돈을 벌고 재산을 불리는 이유도 다 이런 데 있다.
나중에 남의 밧줄에서 떨려 나왔을 때 연금이나 이자에 기대는 것이 이들의 노후 대책이기 십상이다. 스스로 자기 힘으로 자기 한 몸 건사하고 세상을 위하여 할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드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직 실력을 내보이지 못하고 있다. 밀양 76만 5,000볼트 초고압 송전탑 반대투쟁 때문이다. 그는 교직을 그만두자마자 이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의 사무국장을 맡아야 했다.
지나온 세월 그와 함께한 밀양 할매·할배들의 고매한 인격과 넉넉한 인성이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 풍성하게 담겨 있다. 지내온 세월 그를 둘러싼 권력과 자본, 한전과 경찰의 비열한 인격과 악마의 인성 또한 넘치도록 담겨 있다. 가슴 미어지게 하고 눈물 울컥하게 쏟게 하고 때로 부르르 손 떨리게 하는 장면들이 있다.
4. 물질이 가난하지 않으면
이계삼이 이렇게 정직과 실력으로 마주한 것은 ‘가난’이다. 가난은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결핍 또는 부족이다. 똑바로 눈 뜨고 보면 지금 세상은 가난이 미덕이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육체든 정신이든 가난할수록 좋다.
나는 아직 체계적으로 쉬이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쓸 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이를테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삼성 이재용은 개망신 쪽팔림을 넘치도록 당하고 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을 일이다.
이재용의 아버지 이건희가 1인당 500만 원씩 집어주고 여자들이랑 거시기머시기를 했다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물질의 넘치는 풍요에서 비롯되었고 5,000만 국민에게 더없는 쪽팔림과 개망신을 당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물질의 넘쳐남과 망신의 넘쳐남은 이렇게 직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물질이 가난한 사람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역설 아닌 역설이 이 대목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물론 물질의 절대 빈곤까지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5. 마음이나 정신이 가난하면
그러면 마음 또는 정신의 가난함이란 무엇일까? 어렴풋이 짐작하건대 그것은 옹달샘 같은 것이다. 슬픈 존재 또는 슬픈 현실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옹달샘처럼 언제나 충분하지 않고 언제나 넘치지 않으며 언제나 지나치지 않다. 이를테면 세월호 아이들, 그 아이들이 물이 차오르는 배에서 보낸 문자처럼 말이다.
“엄마 내가말못할까봐 보내놓는다 사랑한다”
커다란 배와 함께 침몰해 다시는 떠오를 수 없게 된 이 아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슬픔이 어떻게 충분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지나칠 수 있을까. 그것은 언제나 모자랄 수밖에 없다. 슬픈 존재나 슬픈 현실에 대하여 슬퍼하는 마음은 언제나 가난한 것이다. 이처럼 자본이나 권력에 빙의되지 않는 한 우리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가난이 이계삼이 펴낸 『고르게 가난한 사회』에는 곳곳에, 고르게, 넘치도록 담겨 있다. 1부에서 5부까지 나누어 다루는 반핵·교육·농사·노동·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 등은 그저 이 가난을 널리 알리기 위한 글감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