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1차 토론회는 지난 12월 4일에 열렸다. 이미 2차 토론까지 하는 마당에 쉬어도 한참 쉬어버린 이런 떡밥을 굳이 물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1차 토론을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이미 트위터에서 1차 토론을 둘러싼 개드립이 흘러 넘쳤고 온갖 사이트에서 패러디물이 쏟아졌으며 심지어 천조국의 C일보에서는 아래와 같은 심층보도 기사마저 났기에 이 글에서는 굳이 이 토론이 지닌 정치적 의미나 각 후보의 인품 따위를 논하진 않겠다.
필자는 자신의 밥벌이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오로지 기호 1번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이하 공주님), 기호 2번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이하 문실장), 기호 3번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이하 돌직구)의 국어능력만을 검증하고자 한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리승환이 우리 구멍가게에서 일할 사람을 소개시켜줘서(…)?
1. 화법의 정의 부합 여부
‘토론’은 토의, 회의 등과 함께 ‘집단 화법’ 유형에 들어간다. 집단 화법도 화법이니 일단 화법의 정의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화법과 작문I(박영목, 천재교육)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해놓았다.
화법이란 구두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 행위이다. – 박영목,, 천재교육, 2011, p. 16.
아마 이번 주부터 절찬리에 진행될 고등학교 기말고사에서 국어 선생들이 1차 토론을 발췌하여 문제를 출제해 “나도 시험 문제로 인터넷 스타!” 같은 걸 꿈꿨겠으나 일단 ‘화법’이라 부를만한 장면은 안타깝게도 없었다. 지난 12월 4일 대선 첫 TV 토론에서 가히 ‘화법’의 정의에 부합되는 화법 행위는 단 한 장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공주님: 그… 이거가… 그… 뭐… 외교문제하고 관련된 건 아니지만 이정희 후보는 계속 해서 인제 단일화를 그 주장을 하고 계시는데 어… 이렇게 단일화를 그 주장을 하고 계시면서 또… 이런 토론회에 나오셔 가지고 어… 그… 그… 나중에 같이 후보를 사퇴하시게 되면은 국고보조금을 또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그… 도덕적인 문제도 있는데 단일화도 계속 주장을 하시면서 이렇게 또 토론회에도 나오시는 이유가 그… 있습니까?
사회자: 죄송합니다만 지금은 외교와 관련된…
공주님: 알겠습니다.
돌직구: 네, 대단히 궁금해 하실 것 같아서,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겁니다. 저는 박근혜 후보를 반드시 떨어뜨릴 겁니다.
일반적인 토론과 달리 대선 후보의 TV 토론은 사회자와 토론 참여자 뿐만 아니라 집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잉여 국민들도 감안해야 하기에 아무래도 서로서로 생각과 느낌을 주고받기 보다 TV를 시청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기에 급급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려 ‘한반도 주변국과의 외교정책 방향’이란 거창한 소주제로 진행되고 있던 토론이었음에도 모든 외교관계 따위 쿨하게 ‘업그레이드’ 하면 다 해결되리란 걸 알고 계시기에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을 돌직구와 주고 받으셨다. 돌직구 역시 ‘대단히 궁금해 하시는’ 공주님의 욕구를 십분 이해하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전했다.
이 얼마나 훈훈한 화법인가. 실제로 공주님께서는 선거 포스터에서보다 훨씬 환하게 웃고 계신다. 심지어 TV를 보고 있는 국민들에게 농을 던지는 듯한 포스까지 보이고 있지 않으신가.
2. 청자를 고려한 말하기 여부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위해 화자는 청자가 주제에 대해 얼마만큼의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관련성을 느끼는지, 얼마만큼의 관심이 있는지,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고 ‘청자 지향적 말하기’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 – 박영목,, 천재교육, 2011, p. 26.
연설이나 토론에서는 화자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지 판단하기 위한 ‘분석적 듣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국어교육학계의 중론이지만 TV토론에 나온 대선 후보들이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차피 대답 한 번 하고 나면 재질문이나 재반론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쿨하게 듣지 않아도 좋다. 그냥 뭘 묻는지만 잘 알아먹으면 된다.
청자의 태도가 이 모양이다 보니 아무래도 화자가 청자를 고려한 말하기를 해줘야 한다. 특히 사실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경우 꼭 지적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돌직구: 네, 먼저 토론에 기본적인 예의와 준비를 갖춰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저희 당의 의원님들 성함은 김석기, 이재연 의원이 아니시고, 훗, 네, 이석기, 김재연 의원님이십니다. 분명하게 해주시고요. 그리고 아까 문재인 후보께서도 민주노동당이란 말을 하셨는데, 저희 전신이고, 통합진보당입니다. 두 분 다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제가 민주노동당 대표를 2년간 했죠?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도 했고, 저를 못보셨던 모양입니다. 제가 당 대표로서 국가행사에서, 이런 국가 차원의 공식 의례를 다 함께 했고, 어, 그, 텔레비전에도 방송이 됐는데, 왜 기억을 못하시고 계신지, 질문을 하고 계신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어, 그래서 정확하게 좀 아시고 질문하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문실장: 우선, 음, 금감원 압력 의혹 말씀하셨는데, 금감원이 국가기관이지 않습니까? 이명박 정부, 음, 관할 하에 있죠. 만약에 제가 금감원에 압력을 이렇게 행사한 일이 있다면 진작 밝혀졌을 것이고, 검찰 조사에 의해서도 밝혀지지 않았겠습니까? 사실이 아닌 것으로, 오, 드러났는데도 계속 말씀하시는 것은 유감스럽고요. (중략) 그런 사실이 없는 것으로 다 확인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만 그런 네거티브는 좀 중단해 주십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공주님: 그리고 아까, 그 6억이나 그런 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는데, 어, 그건, 그 당시에, 어, 그, 아버지도 그렇게 흉탄에 돌아가시고 나서 어린 동생들과, 아, 그, 살 길이 막막한 상황에서 어, 이런 거, 아무 걱정, 문제가 없으니까 아 좀 배려하는 차원에서 이렇게 해 주겠다 할 때,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또 그거는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식도 없고, 또 아무 그런, 그, 어떤, 그, 가족도 없는 상황에서, 나중에 그것은 다 사회에 환원을 할 것입니다.
3. 공감적 듣기 여부
보통 아동 심리 상담에서 자주 사용되는 것이 이 ‘공감적 듣기’이다. 공감적 듣기는 크게 소극적 듣기와 적극적 듣기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소극적 듣기는 상대방에게 관심을 표명하면서 말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격려기술을 사용하는 것으로 상상 속의 동물 여자친구와 대화를 나눌 때 자주 사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재질문과 재반론의 여지를 막은 채 닥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게 만든 이번 대선 토론은 평소 만나기만 하면 싸움질만 하는 대선 후보들에게 ‘공감적 듣기’를 가르치기 위한 선관위의 신의 한 수라 하겠다.
이번 회차의 모범 토론자 돌직구는 선관위의 이런 깊은 뜻을 알아채고 한 발 더 나아가 화자의 말을 요약, 정리 하고 반영해주어 화자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적극적 듣기’까지 행하는 기적을 보인다. 이것이 교육의 힘이다.
공주님: 그 다음에 골목 상권, 어, 유통법 이 문제를 왜 반대했느냐 그러셨는데, 어, 이거는, 어,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대형 마트에 납품을 하고 있는, 그 농어민, 또, 그 중소 납품 업체들, 또 맞벌이 부부들을 위해서 이것이 조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 그대로, 지금, 어, 유통법이 되게 되면은 농어민들의 손해도 연간 1조 이상, 또 납품 업체들도 한 5조 이상, 이렇게 큰 손해를 보고, 맞벌이 부부들이 불편한 이런 문제도 있어서 조정을 하는데 상인 연합회에서도 영업시간 조정에 대해서 수용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민주통합당이나, 또 정당들이, 야당도 논의에 참여해서 이번 회의, 회기에 이것을 통과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돌직구: 이번 회기에 통과시키신단 말씀입니까? 의무 휴일을 늘리는 안에 대해서 이번 회기에 통과시킨다는 말씀이신가요?
공주님: 네, 그것만, 그, 상인 연합회에서도 수용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여야가 합의하…
돌직구: 약속하셨습니다. 새누리당만 합의하면 되죠.
4. 까다로운 질문 회피 기술 구사 여부
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래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까다로운 질문을 회피하는 능력일 것이다. 지금까지 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던 문실장이 여기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진 공주님께서 상대방의 회피까지 눈치채시기엔 읽어야 할 수첩 내용이 너무 많아 적극적으로 지적하지 않으신다. 안타까운 장면이다.
공주님: (중략) 또 정무 특보로 계실 때 공공기관에 부당하게 취, 취업을 하, 한 것, 이것도 국정감사에서 확인이 되었습니다. 또 최근에 집을 사시면서 다운 계약서를 쓰신 사실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권력형 비리, 정말로 막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문실장: (중략) 고용정보원이 역시 또 국가 산하, 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이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 때 비리가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밝혀졌을 것이고, 제가 뭔가 책임 추궁을 당했을 것입니다. 에, 그런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 되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만, 그런 네거티브는 중단해 주십사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공주님은 일단 적어오신대로 질문을 다 던졌다. 그 가운데에는 ‘다운 계약서’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문실장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천천히 하시면서 교묘하게 회피한다. 게다가 답변에 대한 반박도 못하니 공주님은 더욱 답답하신 상황이다. 그러나 공주님의 표정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카메라를 지긋이 응시하며 적어온 질문을 다 읽어냈다는 여유, 그리고 딱히 너의 답변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는 기상까지 보이신다.
질문을 회피하는 것이 하수의 실력이라면 진정한 고수는 질문 따위가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괴력을 보이는 것이다. 선관위가 주최하는 대선후보 고등학교 화법 I 특훈 시간에 과연 학력고사 수석답게 빠른 속도로 학습 내용을 이해하는 돌직구는 고수의 면모를 보인다.
공주님: 예, 그, 특별, 그, 음, 감찰관제, 또, 상설 특검으로, 어, 뭐, 권력형 비리, 아, 그러니까, 특별 감찰관제와 상설 특검이, 이, 야당이, 그, 주장하는 그런, 그, 고위 공직자 비리 수사처보다도, 어, 더, 어, 저는 효과적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 여기에 대해서, 우리, 어, 이정희 후보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돌직구: 어떤 제도가 어떻게 도입되든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제도 안 만들어 봤습니까? 그런데, 다, 피해나갔죠. 그리고 다 유명무실하게 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새누리당이 온갖가지 비리 사실, 예를 들면 지난 달의 현영희 의원 공천비리부터 시작해서(중략)
5. 언어 구사의 유창성 여부
친구간의 대화 같은 경우에 유창하게 말을 할 경우 재수없다는 소리 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토론과 같은 자리에서는 얼마나 유창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반박하는가가 점수 따는 데에 매우 중요하다. 이 항목은 위에서 필자가 존나 힘들게 받아 적은 것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주님의 ‘에’, ‘어’, ‘그’, ‘아’의 수만 세어봐도 문실장, 돌직구 따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영역에 공주님이 계심은 자명하다. 공주님께서 압도적으로 앞서 나가시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지지율처럼 문실장이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 종목이 언어 구사의 유창성 여부인 것도 확실하다. 경상남도 사람 특유의 억센 억양이 실려 있는 것까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린 이미 김영삼, 노무현을 통해 접했으니까.
그러나 ‘네가티브’ 등의 구성진 한국식 영어발음을 구사하시면서 동시에 경상도 지역에 오랫동안 전해내려온 비기를 선보인다. 바로 ‘ㅅ’이다.
문실장: 자신이 잘해서 성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실패시켜서 성공하려는 그런 정치, 그 때문에 서로 사움만 하는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국회의원 선거 때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도, 제발 사우지 말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라도 나서서 우리 정치를 바꾸는데 힘을 보태자고 결심한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우지 않고, 정치 보복하지 않는 상생과 통합의 정치, 품격있는 정치를 하고 싶습니다.
6. 총평
솔직히 진지 먹고 썼으면 딱히 평할 가치조차 없는 토론이었다. 이는 토론 참여자들의 능력이 딸려서라기 보다는 ‘공감적 듣기’를 전 국민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선관위의 충정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기이한 토론 방식 때문이다. 앞으로 남은 토론도 이런 방식으로 갈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되면 돌직구의 방식을 벤치마킹하여 일단 한 번 지르고 어차피 반박하지 못하니 생을 까는 상당히 무책임한 토론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난장판 개싸움을 벌이지 않고 국민이 직접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이런 방식을 고집했다고 쓰고, 공주님께 유리하게 하기 위해 그랬다고 읽는, 토론은 가히 한 번이라도 입을 열고 누굴 밟아야 뜨는 요즘 예능과 다를 바 없었다. 바뀐 룰을 정확하게 이해한 이정희 후보는 잘 나가는 예능 MC처럼 날아다녔고 시작부터 약체로 지목되었던 박근혜 후보는 게스트처럼 신나게 털렸다. 문재인 후보가 병풍이었던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물론 그게 그로선 최선의 스탠스였지만.
어쨌든 불합리한 토론 방식 하에서는 뭔가 쓸만한 토론을 보기는 힘들 것이다. 5년 만에 박빙의 상황에서 대통령 후보 첫 토론회가 열렸는데 기억에 남는 거라곤 ‘다까끼 마사오’와 ‘널 떨어뜨릴거야!’ 정도라면 씁쓸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