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1년도 전에 쓴 마케팅에 관한 글 ‘경영대 밖에서 배운 마케팅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읽다가 더 늦기 전에 내가 만들었던 포트폴리오에 대한 얘기를 정리해두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이직을 많이 했다. 7-8년 차에 정규직으로 다닌 회사가 5개에 그리고 지금은 또 회사를 그만둔 상태니까. 이직이 안 좋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 무조건적인 이직을 권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돌이켜봤을 때 회사를 옮겨 다닌 것이 나에게 전혀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 나에게 좋은 점이 더 많았다.
본인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명확하다면 주변에서 ‘너무 많이 옮겨 다니는 것도 안 좋아’라는 말 때문에, 그 이유만으로 발목이 잡혀 있다면 조금 더 용기를 내봐도 괜찮다. 현재 상황에서 도망치기 위한 수단이라면 좋지 않겠지만 조금 더 욕심이 나서 고민이 되는 것이라면, 내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경험들을 토대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만 있다면, 남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확실히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으면 괜찮다. 도전하고 싶다면 응원하고 싶다.
시대가 변했구나 실감한 건 이직이 잦은 걸 안 좋게 보는 곳도 물론 있겠지만 내가 그렇듯 별로 상관하지 않는 사람과 회사도 많다는 것이다. 오히려 “너 여기 평생 있을 거 아니야“라며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는 상사와 회사도 많았다. 내 경력을 보면 3-4년은 광고/홍보 에이전시, 3-4년은 모바일 업계와 스타트업에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런 경력을 원하는 곳들이 많아졌음 또한 느꼈다.
내가 올리는 포트폴리오는 대학교 졸업 후 2010년부터 만들어놓고 2015년까지 한 번씩 업데이트해온 파일이다. ‘경영대 밖에서 배운 마케팅 이야기’에도 썼듯 디자이너, 사진가 친구들에게 영감을 받아 만들기 시작한 이 포트폴리오는 면접 때마다 나에게 강력한 무기가 되어주었다. 솔직히 쓰자면 이 포트폴리오를 펼친 곳에서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마케터가 포트폴리오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는 곳이 별로 없다. 정리된 무언가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놀라는 사람이 많았다. 누구나 그림이 있으면 설명하기도 쉽고 이해하기 쉬우므로, 포트폴리오는 더 재미있고 다양한 대화를 이끄는 데 자연스러운 매개체 역할이 되어 주었다.
나를 위한 포트폴리오
먼저 밝히는 건 내 포트폴리오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모습이 바뀌었다는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씩 업그레이드되다가 지금과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고, 이런 포맷이 정해진 이후로는 바로 전 1-2년의 경험만 업데이트하면 되었다.
포트폴리오를 만든 목적을 제일 먼저 생각해보면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을 최단 시간에 알려주자”였다. 이때만 해도 내가 생각하는 나의 정체성은 마케팅 전공을 한 경영대생이지만 딱딱하기보단 디자인과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졸업 직후 내 이력서에 나에 대해 썼던 한 문장은 “business student with an artistic mind”였다. 그리고 남들은 안 해봤을 법한 특이한 경험을 많이 한 게 내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나의 ‘인생 타임라인’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Tiny Little Sparks)’이라는 페이지는 이력서보다도 앞장에 들어있다.
늘 의문이었다. 왜 이력서는 꼭 대학생 이후의 것들만 적혀있을까. 이전의 경험들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었고, 그게 내가 이 일을 잘할 수 있는 이유에 굉장히 큰 부분인데. 그래서 마음대로 만든 이 두 페이지는 언제나 조금 더 재미난 대화를 이끌어주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 중 하나는 공통의 관심사를 찾는 거라 그런지, 나도 의도치 않게 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첫인상(!)을 남기는데도 한몫했던 것 같다.
타임라인에는 내가 생각하는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들이 적혀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꽤 특이하다. 돌이켜봐도 다양한 세계 안에서 놀고 싶은 대로 놀게 해 준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초등학생 때는 나비에 빠져서 강원도에 있는 생태학교를 매 주말마다 가면서 나비 도감을 달달 외우게 되었다. ‘한국 청소년 리코더 합주단’의 일원으로 앨범도 내고 해외 공연도 다녔다. 중딩 때는 동생과 회원수 1,000명짜리 포토샵 강좌 카페를 운영했고, 고딩 때는 고적대에서 플루트를 불고, 밴드에서 기타를 치고 클럽을 빌려서 공연도 했다. 대학 때도 쇼핑몰을 운영했다. 그 이후로도 그저 관심 있고 좋아서 한 일들이 많았고 이게 분명 일에도 연결이 될 텐데 대학교 이전의 삶은 이력서에 전혀 쓸 공간이 없었다.
나는 좋아하는 게 매우 많은 사람이다. 이게 내가 애초에 마케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기도 하지만, 이 일을 잘할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취향이 많은 건 카피라이팅을 할 때도, 무언가를 기획할 때도 언제나 도움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설명하지 않고서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졌다. ‘Tiny Little Sparks’라는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밴드 Royksopp의 노래 ‘Sparks’ 중 나오는 가사로 ‘사소하고 작은 반짝임’이란 말이 곧 내가 일상 속에서 영감 받는 순간, 감동받는 순간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내 취향을 보여주는 페이지의 제목으로 정했다.
나의 경력을 한눈에 보기 좋게
다음 장부터 본격적으로 내 경력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이력서가 나오고, 회사별로 주요 프로젝트를 정리했다. 나를 면접하는 사람이 이력서를 못 뽑아왔을 때를 대비해서 이력서는 몇 장을 뽑아서 넣어두었다. 없는 경우에는 여기서 그냥 한 장을 꺼내서 주면 되었다. 그럼 또 한 번의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이력서에 들어가 있던 내용을 하나씩 이미지와 함께 펼쳐서 보여준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가능하면 내가 했던 Task들을 종류별로 묶어서 구분했다. 앱리프트(모바일 UA 플랫폼)의 경우에는 오프라인 행사 및 이벤트 기획, 각종 판촉물 만들기(조금 더 크리에이티브 쪽), PR(강조하고 싶은 기사들), 온라인(블로그 운영 및 뉴스레터) 이렇게 묶어서 구분했다.
PR회사 프레인의 경우에는 내가 담당했던 클라이언트와 프로젝트로 묶어서 구분했다. 프레인에서 했던 경험들을 정리해둔 포트폴리오를 조금 더 클로즈업해서 보여주자면 이런 형태다.
내가 했던 일들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미지나 강조하고 싶은 이미지와 함께 프로젝트명과 시기, 주요 업무와 그에 대한 결과를 텍스트로 정리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설명하면 놓치기 쉬운 것들도 짚고 넘어가기 좋고, 질문이 들어와도 쉽게 예시를 보여주면서 ‘이렇게요!’ 할 수도 있다.
가장 재미있게 일했었던 영화 50/50에 대한 자료. 이때는 워낙 한 일이 다양한데, 특히 예전에 쇼핑몰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50/50 쇼핑몰을 직접 만들고 운영했던지라 더 강조하고 싶었다.
신혜경 작가님과 콜라보레이션 한 로마 위드 러브 지도처럼 내가 조금 더 아이디어를 주도했던 일들은 조금 더 크게 밖으로 빼두었다.
오른쪽은 프레인 영화 팬들로부터 받았던 편지와 리플렛을 직접 넣어두었다. ‘실물’로 가지고 있는 건 레퍼런스 용으로도 좋지만 내가 했던 일들을 돌아볼 때 기념하는 의미에서도 좋다.
오른쪽 종이를 보면 어떤 프로젝트의 이름을 만들기 전에 고민한 흔적이 있다. 이것도 역시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고,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미국에서 1년 동안 카피라이터로 일할 때. 가장 보여주고 싶은 건 오른쪽에 있는 카피들이었다. 내가 거의 처음으로 카피다운 카피를 썼던 프로젝트.
마지막은 내가 직접 만든 아트웍과 사진을 넣어두었다. 어떻게 보면 보너스 페이지인데, 예술에 말로만 관심 있는 게 아니라 너무 관심 있고 좋아해서 미술을 부전공했고, 포토샵을 즐기고, 도자기도 만들고,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뒷장에는 내가 했던 아르바이트나 앞에 넣지 못한 부가적 자료 등 나를 더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콘텐츠도 들어있다. 앞장 얘기만 제대로 해도 만족하지만, 정말 얘기가 더 길어질 때는 이보다 더 뒷장으로 넘어간 적도 있었다.
누구든지 자기만의 포트폴리오를 가질 수 있다
꼭 디자이너나 포토그래퍼나 ‘크리에이터’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원한다면 자기만의 포트폴리오를 가질 수 있다.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보여주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지만, 가장 보여주고 싶은 부분들을 강조해서 더 매력적으로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PT’할 수 있다. 참고로 내 포트폴리오는 키노트와 파워포인트를 합쳐서 만들어졌다.
이건 내 경험에 맞춰진 나의 포트폴리오지만 정해진 형식이란 게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포트폴리오는 당연히 온라인으로 옮겨와도 좋다. 그게 결국 개인 웹사이트가 된다. 지금 내 포트폴리오는 업데이트가 필요한 상태다. 지금 업데이트를 한다면 내 브런치에 대한 장표도 들어갈 것 같고, 최근 1년 동안 올윈에서 했던 많은 일도 들어가겠지. ‘특별히 좋아하는 인물’도 업데이트될 것 같다.
또 한 가지, 포트폴리오와 무관하게 취준생들에게 팁을 주자면, 면접 후에 나를 면접한 사람에게 이메일로 감사 인사를 보내보길. 결과와는 관계없이 나에게 시간을 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거다. 의외로 이런 메일을 보내는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데 감사 인사를 보내서 나쁠 것도 없고, 설령 면접에서 떨어지게 되더라도 다른 사람은 받지 못했을 ‘답장’을 받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커리어의 어느 순간부터는 ‘포트폴리오’가 예전만큼 필요하지 않게 된다는 것. 아는 사람이 많아지고 내가 어떤 일을 해온 사람인지 외부에 조금 더 알려지며 포트폴리오나 이력서를 요구받지 않고도 ‘오퍼’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경험이 생기면서 정말 신기했는데, 페이스북이든 블로그든 외부 네트워킹을 통해서든 지속적으로 ‘나’라는 사람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릴 수 있는 창구가 있는 건 좋은 것 같다.
오퍼를 주는 사람들은 이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가 될 수도 있고, 취미 생활을 함께하던 친구일 수도 있고, 파트너로 일했던 내 클라이언트가 될 수도 있다. 직접 만나보진 못했어도 ‘페친’이나 블로그 이웃이 될 수도 있다. 내 브런치 글을 보고 만나게 된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다.
포트폴리오는 꼭 취업을 위한 수단이나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나를 위한 자료’라고 생각하고 만들어도 좋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들이 예전보다는 살짝 흐릿해져 갈 때, 내가 정리해둔 타임라인이나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그래 맞아 내가 이런 일도 했었지, 이런 일도 있었지’하고 추억할 수도 있고, 과거의 나를 돌이켜보면서 나를 더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특히 ‘인생 타임라인’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인 사람이라면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자주 써온 이력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나타내기엔 너무 역부족이다. 내가 만약 어떤 회사의 대표라면 이 타임라인을 적어서 내보라고 하고 싶다. 남들은 안 해봤을 것 같은 당신만의 독특한 경험이 보고 싶다고.
잊고 싶지 않은 인생의 순간들이 있다면 더 늦어지기 전에 그런 순간들을 한번 떠올려보고, 태어났을 때부터의 연도를 쓰고,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들만 연도별로 한번 정리해보시길. 내가 잊고 있었던 나를 다시 발견하게 될 수도 있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원할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를 역으로 이해하게 될 수도 있다.
원문: yoonash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