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이하 『징비록』)을 읽었다. 서해문집에서 2015년 5월 개정증보판 5쇄로 찍어낸 책이다. 크게 대단한 내용이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기대가 컸던 탓이지 싶다.
전쟁은 끔찍하다. 그 끔찍함이 책에도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전쟁은 있는 사람보다 없는 사람한테 더 참혹하다. 400년도 넘은 옛적 난리지만 그 고통은 지금 전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게다가 우리한테는 그때 그 일본이 지금도 그대로다.
내가 알기로 일본은 중세 이후 대륙 진출(한국에서 보면 침략) 의도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는 ‘명나라를 치러 갈 테니 길을 내놓으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로, 19세기 메이지유신 때는 ‘조선을 정복하자’는 정한론(征韓論)으로 나타났다. 20세기 들어서 조선은 잘 알다시피 50년 안팎 일제에 강점당했다.
일본 지배집단의 이런 욕심은 지금도 줄곧 이어지고 있다. 일본 아베 총리가 평화헌법을 버리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외국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는 나라로 일본을 만들어가고 있다.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면 0순위 대상 국가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자위대 육해공이 우리나라에 올라오는 것은 이대로라면 시간문제도 아니다.
임진왜란은 또 자기 힘으로 자기를 지키지 못할 때, 또 다른 면에서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명나라에 기대어 나라를 부지할 수밖에 없는 데서 오는 비애와 고통이 곳곳에 스며 있는 『징비록』이다.
지금으로 돌아와 보면, 일본의 이런 (재)무장화는 미국이 뒷배를 봐주고 있다. 북한을 지렛대로 삼은 미-일-한 동맹에서 한국은 말석이다. 일본에게는 밀리고 미국에게는 끌려간다. 왜국과 명나라-일본과 미국.
‘징비’는 알려진 대로 ‘(지난날의 잘못을) 나무람으로써 (앞날을) 경계한다‘는 뜻이라 한다. 우리는 제대로 ‘징비’하고 있는가. 『징비록』이 기록하고 있는 여러 정상을 한 번 드문드문 옮겨본다.
배가 고파 시신을 베어 먹었다
나도 명나라 병사들과 함께 (한양에) 들어갔다. 성안의 백성들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았는데, 살아 있는 사람들조차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있어 얼굴빛이 귀신 같았다. 날씨마저 더워서 성안이 죽은 사람과 말 썩는 냄새로 가득했는데 코를 막지 않고는 한 걸음도 떼기가 힘들었다. (178쪽)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군량 운반에 지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되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해 살아남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185쪽)
계사년 10월, 거가가 환도하니 불타고 남은 것들만이 성안에 가득하고, 거기에 더해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은 자들이 길에 겹쳐 있으며, 동대문 밖에 쌓인 시체는 성의 높이와 맞먹을 정도였다. 그 냄새가 너무 더러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어, 죽은 시신이 보이면 순식간에 가르고 베어 피와 살이 낭자했다. (288쪽)
밤새 앓다가 굶어죽은 사람들
당시 한양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다. 나는 용산 창고에서 명나라 좁쌀 100석을 꺼내 날마다 병사 1인에게 두 되씩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병사가 되겠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교감당상 조경이 이 사람들을 다 받을 수 없으므로 선발 기준을 세우자고 했다. / 때마침 전라도 소모관 안민학이 겉곡식 1,000석을 배에 싣고 당도했다. 즉시 임금께 장계를 올려 이를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 먹이기로 했다. 우선 전 군수 남궁제를 감진관에 임명한 후 솔잎을 따다 가루를 낸 후 솔잎 가루 열 푼에 쌀가루 한 홉을 섞어 물에 타서 마시게 했다. 그러나 곡식은 적고 사람은 많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71-172쪽)
이렇게 해서 큰 돌 하나를 놓고는 먼저 돌을 들어보도록 했다. 다음에는 한 길쯤 되는 담을 뛰어넘도록 했다. 이 과정을 통과한 사람은 선발했는데, 굶주리고 기운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열에 한둘 정도밖에 통과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시험을 기다리다가 쓰러져 목숨을 잃기도 했다. (242쪽)
경기도 수백 리 안에 더 이상 곡식은 없으니, 백성의 삶은 길바닥에 고인 물속 붕어 신세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구하고자 하나 곡식이 없고, 그대로 두자니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275쪽)
오늘날 보건대 충주 등지에서는 기근이 매우 심하고 바다와 먼 지방에서는 소금이 금과 같이 귀합니다. 곤궁한 백성들이 초근목피를 캐기는 하나 간을 맞추지 못해 입에 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284쪽)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아기
언젠가 큰비가 내린 날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이 밤중에 내 숙소 곁에서 모여 신음 소리를 내는데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주위를 살펴보니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172쪽)
한편 마산 가는 길에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를 본 사 총병은 아기를 데려다 기르기 시작했다. / “아직 왜적이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이 지경이니 어찌하면 좋겠소?” 사 총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 “하늘도 한탄하고 땅도 슬퍼할 일입니다.” 나 또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171쪽)
죽은 사람을 깔고 베는 왜군
포위 8일째, 진주성이 결국 함락되었다. 목사 서예원·판관 성수경·창의사 김천일·의병복수장 고종후 등이 모두 전사하고, 6만 명에 이르는 병사와 백성이 목숨을 잃었으며 닭과 개마저 남은 것이 없었다. / 왜적들은 성을 파괴하고 참호를 메웠을 뿐 아니라 우물도 묻어 버리고 나무도 모조리 베어 버리는 만행을 저질러 지난 패배의 분풀이를 했다. 6월 28일의 일이었다. (181쪽)
3도를 짓밟은 적은 가는 곳마다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죽였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을 붙잡기만 하면 코를 베어 위세를 부린 까닭에 그들이 직산에 도착할 무렵부터 한양 사람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213쪽)
평양에서 패해 도주할 때부터 독이 오른 적은 앙심을 품고 지난달 24일 밤 동시에 성을 불 지르고 백성들을 마구 죽이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날카로운 칼을 피해 가까스로 살아난 이들은 중흥과 소천 등에 흩어져 숨었으니 그 수가 1만여 명에 이릅니다. 이들은 굶주리고 발가벗은 채 죽은 사람을 깔고 베고 하니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275쪽)
그러나 왜군도 참담한 상황을 겪지 않았을 리 없다.
일본군의 패전 행렬이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날 밤 북풍이 심하게 불어 동상에 걸린 병사들은 화살도 잡을 수 없었으며, 아픈 다리를 나무토막처럼 끌면서 걸어갔다. 그러나 걸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멈추는 순간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57쪽 각주)
왜군보다 심했다는 명나라 군사의 행패
물론 처지를 바꿔놓고 보면 충분히 이해는 된다. 명나라 군사들이 그 먼 거리를 이 나라까지 오고 싶었겠는가. 여기 와서 죽으면 또 개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이들로서는 어쨌거나 목숨을 부지해 돌아가는 것이 최선, 그리고 여기 있는 동안 몸 상하지 않는 것이 최선.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의 군사가 고을 수령을 함부로 때리고 욕하며, 찰방 나상규의 목을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니며 피투성이를 만드는 모습을 본 나는 통역관에 그를 풀어 주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211쪽)
하루는 명나라 장수들이 군량이 바닥났다는 핑계로 제독에게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제독이 화를 내며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좌감사 이정형을 불러들였다. 뜰 아래 우리를 꿇어 앉히고는 큰소리로 문책했다. 나는 우선 사죄하면서 제독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나라의 모습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 (164쪽)
“내가 들으니 조선 사람들이 말하기를, 왜적은 얼레빗 같고 명나라 군사는 참빗 같다고 말한다는데 사실입니까?” / 내가 대답했다. “옛사람이 말하길, 군사가 주둔하는 곳에는 가시덤불이 난다고 했으니 작은 피해야 어찌 없을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참빗이라는 말은 천만부당한 일이니 필시 중간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바라건대 노야께서는 결코 믿지 마십시오.” (298쪽)
지나온 고을을 보면 한결같이 초토화되었고 오직 산과 계곡만이 옛 모습을 유지할 뿐 백성은 열에 여덟아홉은 죽었고, 밭과 들은 쑥밭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충주는 왜적이 오래 주둔했다가 후퇴한 데다 명군의 왕래가 끊이지 않아 피해가 다른 지방에 비해 더욱 심합니다. (282쪽)
신은 명나라 군사가 이 땅에 들어온 처음부터 오늘까지 지방에서 명나라 군사의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동안 소모되고 거듭된 폐단은 끝이 없으니, 아무리 세상의 힘을 다한다 해도 그 요구를 다 들어주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 최근 남으로 내려온 후에는 요동·계주·선주·대원 등의 병사들이 길을 걸으면서도 싸우고 관리를 구타하며 하인을 결박해 술과 밥을 요구하니, 날이 갈수록 행패가 심합니다. 수령도 견딜 수 없어, 구차하지만 이 순간이라도 면하기 위해 궁벽한 곳으로 피해 버리고 하인에게 맡깁니다. / 말은 처음부터 서로 통하지 않고 곁에서 마음을 전할 통역관도 없으니 그 한없는 행패를 어찌 금지하겠습니까. 심지어 역참마다 쇄마까지도 빼앗아 간 후에 백에 한 마리도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 아침저녁으로 이런 일이 계속되니 민가에 소와 말이라고는 다 사라지는데, 그런데도 내놓으라고 졸라 대니, 백성들이 화를 당할 것은 당연합니다. (285-286쪽)
이렇게 조선 조정은 괴로웠다. 그렇다 해도 명나라 일반 병졸들이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조선이든 왜국이든 명나라든 아랫것들은 언제나 괴로웠던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명나라) 총병 유정이 거느린 5,000여 군사는 대부분 강남 출신인데, 여름부터 입은 옷을 가을까지 입어 다 헤어져서 벌거숭이 병졸이 많습니다. 가을이 눈앞에서 깊어가는데, 만약 오래 머무른다면 이 홑옷으로 겨울을 어찌 넘기겠습니까. / 그런데 우리나라 물자는 이미 바닥이 났으니 많은 군사에게 의복을 해주고자 하나 마음뿐 실천에 옮길 형편이 아닙니다. 그러나 명군은 우리나라를 위해 만 리 밖에서 왔으니,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286쪽)
지배집단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총체적 고통이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은 이렇게 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까.
원문: 지역에서 본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