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과 함양에서 무려 705명의 양민을 학살한 뒤 인근 거창군으로 이동한 국군 11사단 9연대(연대장 대령 오익경) 3대대(대대장 소령 한동석)는 1951년 2월 9일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로 들어갔다.
군인들은 가옥에 불을 지르고 마을사람들을 눈 쌓인 마을 앞들로 끌어냈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을 겨냥해 소총과 기관총을 무차별 난사했다. 눈 덮인 논들은 순식간에 검붉은 피로 얼룩졌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마을사람 84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제1차 집단학살, 청연마을 사건이다.
빨치산 토벌 목적의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수행한다는 명목의 이 학살은 이후 11일까지 사흘 동안 이어진 끔찍한 학살극의 서막이었다. 3대대장 한동석은 거창읍으로 가던 중 연대장 오익경으로부터 신원면에 주둔하여 소탕작전을 계속하라는 작전명령 제7호를 무전으로 받고 신원면 내동마을과 오례마을에 주둔하였다.
사흘간 719명 학살, 희생자의 58%가 어린이와 노인
다음날인 2월 10일, 내동마을에서 밤을 보낸 한동석의 3대대는 아침 일찍 신원면 소재지인 과정리로 이동해 병력을 대현리, 와룡리, 중유리 마을에 투입했다. 군인들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하며 주민들을 총으로 위협하여 과정리의 신원국민학교로 몰아갔다.
이 이동과정에서 날이 저물었고 노약자를 비롯한 주민 일부가 기력이 빠져 뒤처졌다. 군인들은 이들을 탄량골짜기로 끌고 가 100명을 학살했다. 이 골짜기에서는 단 한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군인들은 시신 위에 나뭇가지를 덮고 불을 질러 태워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제2차 집단학살, 탄량리 사건이다.
탄량골 학살에 이어 군인들은 끌고 온 주민 1,000여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수용했다. 이튿날인 2월 11일, 굶주림과 추위, 공포에 질려 있는 주민들 가운데 경찰과 공무원 가족을 형식적으로 골라내고 남은 사람들은 박산(朴山) 골짜기로 끌고 갔다.
군인들은 박산 골짜기에서 517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그들은 전투에 사용되는 모든 무기를 학살에 사용했다. 이들은 2시간에 걸쳐 확인사살을 했지만 현장에서 기적처럼 세 사람이 살아남았다. 한 생존자(신현덕)는 끔찍한 학살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군인들은 주민을 개머리판으로 떠밀어 산사태로 움푹 팬 박산 골짜기로 몰아넣었다. 언덕 위에 설치된 기관총이 주민을 향한 가운데 지휘관인 듯한 군인이 나를 포함해 6명을 손가락으로 불러냈다. 우리더러 솔가지를 쳐오라고 하고는 계곡 아래로 기관총을 난사해댔다. 우리는 군인이 시키는 대로 솔가지를 시체에 덮고 불을 질렀다. 그때 갑자기 총구가 우리 쪽을 향하더니 콩 볶듯 쏘았다. 다 죽고 문홍준 씨와 나만 살았다.”
- 정희상, ‘시사저널’ 기사 중에서
군인들은 시신 위에 나무를 올려놓고 휘발유를 뿌려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고, 사살된 어린이의 사체들은 2km 떨어진 계곡으로 옮겨 은밀히 암매장하여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였다. 제3차 집단학살, 박산골 사건이다.
거창에서의 학살극은 사흘 만에야 끝났다. 그러나 그 사흘 동안 신원면 일대에서 학살된 사람은 모두 719명이었다. 학살된 사람 가운데 14세 미만 어린이가 359명, 60세 이상 노인이 59명으로 희생자의 58%가 어린이와 노약자였다. 성별 분포는 남자가 327명, 여자는 392명이었다.
진상은 은폐된 채 학살자는 풀려나고
덮여서 잊힐 듯했던 학살은 1951년 3월 29일, 제54차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 출신 신중목 의원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군부의 방해가 있었지만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신익희가 힘을 보태면서 다음날에는 국회와 내무·법무·국방부의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박산의 학살 이후 ‘공비들과 내통한 자 187명을 처형했다’는 한동석의 보고를 받았던 군부는 진상의 은폐에 급급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국회 진상조사단의 길 안내를 맡은 경상남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과 모의하여 조사단의 현장 진입을 막았다.
빨치산으로 위장한 9연대의 수색소대를 조사단에 들어오는 길목에 배치하여 조사단을 습격하고 사격을 가하게 했던 것이다. 결국 조사단은 빈손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가 이를 집중보도하면서 정부는 결국 1951년 7월, 11사단의 지휘관들을 법정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9연대장 오익경은 무기징역, 3대대장 한동석은 징역 10년, 국회조사를 방해한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은 징역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판은 사건의 축소 은폐를 위한 형식적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학살의 진상은 규명되지 않은 채 피고인들은 1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와 군에 복귀하였기 때문이다.
학살 3년 후인 1954년에야 유족들은 과정리에 합동 묘를 마련했다. 1951년 2월 11일, 박산에서 희생된 5백여 명의 뼈를 추슬러 큰 것은 남자, 작은 것은 여자, 아주 작은 것은 어린아이 유골로 나누어 보통 봉분보다 다섯 배가량 큰 묘 2개를 만든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서글프고 슬픈 무덤이었다.
쿠데타 정권의 ‘두 번째 학살’, 침묵의 세월
유족들의 분노와 피맺힌 한은 4·19혁명과 함께 분출되기 시작했다. 1960년 5월 11일, 박산 합동묘역 에 설치할 석물을 운반하던 중 유족들은 학살 당시 주민 성분검사에 참관하여 학살을 방관했던 당시 면장 박영보를 타살했던 것이다.
11월에는 박산합동묘역에 이은상이 비문을 쓴 위령비를 제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발생한 5·16 쿠데타로 유족들의 희망은 다시 무너졌다. 군사정권은 유족회 결성을 문제 삼아 유족 17명을 반국가 단체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6월에 군사정권은 합동묘역 ‘개장명령’을 내려, 박산의 합동 묘소는 헌병들에 의해 산산이 파헤쳐졌고 위령비문은 정으로 지워져 땅에 파묻히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것은 ‘두 번째 학살’이라고 할 만한 반인륜적인 것이었다.
이듬해 7월, 구속 유족회 간부들은 군사재판에서 무죄로 석방되고, 면장 피습 혐의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유족들은 이제 숨을 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다. 1965년에 박산 합동묘역 위령비 원상회복과 거창 양민학살 희생자 명예 회복과 배상을 호소한 것을 끝으로 박정희 18년 독재가 끝날 때까지 유족들은 기나긴 침묵의 세월을 살았다.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공포된 것은 1996년이었으니 45년 만에야 희생자들과 유족들은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후 희생자 유족회의 설립이 허가되고 명예회복을 위한 위령사업이 시행되어 2004년 4월에는 거창사건추모공원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국가 배상의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2008년에 보상내용을 추가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발의되었지만 2012년 제18대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되었다.
지난해 11월 11일, 민주당 김병욱 의원이 대표 발의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 배상 등에 관한 특별법’은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학살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게 배상금과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 등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이 법의 제정에 가장 큰 난관은 ‘천문학적 배상금’에 대한 정부의 우려다.
양민학살의 현대사,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양민학살 사건이 빚어진 지역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일반에 널리 알려진 충북 영동 노근리, 제주 4·3 외에도 학살지는 경북 문경[관련 기사 : 1949년 오늘–국군, 문경에서 양민 86명 학살]과 경산 코발트 광산 등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전쟁유족회 누리집에 게시된 전국 학살지에 관한 기록은 여전히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해 준다.
1951년 경상남도 거창의 한적한 시골마을 몇 군데서 저질러진 양민학살이 그 전모를 드러내고 희생자의 명예가 회복되는 데 무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이들의 해묵은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배상이 이루어지는 데는 또 얼마의 시간이 소요될까.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