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 보이(코브라)
우주해적길드와의 끝없는 전투로부터 탈진한 코브라는 죽음을 가장하고 자신의 외모와 기억을 조작하여 샐러리맨 죤슨으로서 평범하지만 평화로운 생활을 보낸다. 하지만 죤슨은 우연히 자신이 코브라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새로운 자극을 찾아 우주를 도약한다.
비록 시작은 중년의 일상일탈을 다룬 아저씨만화 같았지만 ‘우주해적 코브라’는 주간소년점프에서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연재한 소년만화이다. 본 작품은 세계관의 핵심설정인 해적길드의 정체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각종 매체를 거쳐 수차례 재창작을 거쳐왔으나, 해적길드의 간부인 크리스탈 보이만큼은 코브라의 숙적으로서 그가 상대하는 악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잡아 주었다.
코브라 최대의 무기는 운과 유머지만, 그의 가장 상징적인 무기는 왼팔에 장착된 사이코 건이다. 이 무기는 스토리의 필요성에 따라 위력과 한계가 변동되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역할을 맡는데, 크리스탈 보이는 특수재질로 만들어진 육체로 사이코 건을 씹어먹음으로써 강력함을 어필하고 절박감을 조성했다.
그의 최대의 매력은 코브라와 나란히 작품의 세계관을 축약하는 비주얼에 있다. 투명한 육체를 넘어 관능적으로 드러난 내장과 금색 골격, 그리고 얼굴에 덮인 철판은 그의 비인간적인 냉혹함을 노골적으로 그려냈으며, 오른팔에 장착된 집게는 사이코 건과 완벽한 거울 대칭을 이루는 악역다운 무기이다.
크리스탈 보이는 초반에 사망하는 단역 악당으로 설정되었으나, 우월한 디자인의 혜택을 받아 차후 코브라의 왼팔을 잘라낸 인물이라는 설정이 붙으며 그의 라이벌로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부작용(?)으로 숙적이자 자신의 육체를 박살낸 원수인 코브라의 위장사망을 파악하지 못하고, 사이코 건을 보고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얼빠진 모습을 보이는 등 설정구멍의 희생자가 되었다.
사이코 건을 무시하는 육체, 사격을 무효화하는 분신술, 편이에 따른 부활능력 등 악당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춘 크리스탈 보이지만 위에 언급한 건망증 외에도 또다른 약점이 있다. 에너지 병기를 무효화하는 그의 육체는 의외로 실탄공격에 맥없이 금이 가고는 한다. 안습.
그리고 또 하나 흠을 잡자면, 지금까지 크리스탈 보이라고 적었으나 사실 그의 이름의 영문표기법은 Crystal Bowie. 즉 데이빗 보위와 성이 같으며, 크리스탈은 멋들어진 별명이 아니라 그의 진짜 이름이다. 이것은 스트리퍼들이 자주 사용하는 가명이기도 하다.
혈풍당(어둠의 도키)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래 결성된 혈풍당은 각종 무예와 기예에서 뽑아낸 실용적인 살인기술을 이용하는 암살자 무술가 집단이다. 오오타니는 전국시대의 종료와 함께 목적의식을 상실하고 살인집단으로 변모한 혈풍당에 실망하여 퇴출을 결행하지만, 그들은 비기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오오타니를 추적한다.
그는 은둔하는 동안 토키를 양자로 삼고 혈풍당의 비전을 전수하지만 결국 추적자들에게 살해당하고, 토키는 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암살자들을 쫓는다.
토키는 수명의 혈풍당원을 죽이고 그들의 원수로 지목되지만, 그들의 지도자인 무묘사이는 야규 주베이가 이끄는 사무라이 집단의 암살자사냥으로부터 조직의 비전을 지켜내기 위해 원한을 잊고 목숨을 바쳐 토키를 지켜내고 그에게 혈풍당의 비기를 전부 전수한다.
혈풍당은 초인적인 무술실력과 기상천외한 암살기술을 터득한 강력한 적으로 등장하지만, 요코야마 미쓰테루 작품의 악역답게 불쌍할 정도로 비정하게 썰려나간다. 그들은 본인들이 인정할 정도로 동정의 여지가 없는 살인집단이지만, 그래도 평생을 가꾸어 완성한 암살기술만은 세상에 남기고 싶다는 예술가적인 미련이 돋보이는 독특한 악역이다.
주인공 토키는 최후에는 선악의 굴레에서 벗어나 혈풍당과 같은 어둠에 몸담은 자로서 사무라이가 대표하는 정도에 도전한다. 암살자와 사무라이, 양방이 주장하는 정당한 폭력에 관한 질문에 답하지 않고 묵묵히 혈투하는 토키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뒤늦게 ‘어둠의 토키’가 스포츠 만화였음을 깨닫게 된다.
6명의 감시자(마즈)
자연이 파괴될지언정 인간이 죽을 뿐이고, 생명이 멸종할지언정 우주는 끊임없이 돌아간다. 하지만 고작 지구조차 파괴하지 못하는 인간이 뭐 대수롭게 보였는지 외계문명은 인류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여섯 명의 감시자를 배치한다.
그들은 지구의 문명이 우주진출에 다다랐을 때에 각성하여 대륙 하나를 파괴할 수 있는 슈퍼 웨폰 육신체(六神体)를 이용하여 인류를 멸망시키게끔 프로그램되어있다. 하지만 그들은 화산폭발로 수십 년 앞서 각성하여 버리고, 핵병기가 대략 위협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어찌 되었든 인류를 멸망시키기로 한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감시자의 우두머리이자 일찍 깨어나는 바람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마즈 뿐이다.
하지만 마즈의 신체(神体) 가이아는 육신체가 전멸할 시 자폭하여 지구를 소멸시키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었다. 마즈는 압도적인 힘이 아니라 지혜를 발휘해서 교묘하게 짜맞춰 진 지구파괴 메커니즘을 타파하여야 한다.
감시자들은 일견 지구파멸을 꾀하는 흔한 악당 같지만 아 아저씨들은 어째 주인공 마즈와 그 주변인물보다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질문하지 않고, 자신의 창조주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는 전문적인 일꾼이다. 그들의 목표는 잔인하고 행동은 기계적이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워낙 뜨거운 나머지 그들을 무참하게 짓밟는 마즈가 냉혹한 배신자로 보일 정도이다.
마즈의 선택을 아쉬워하고 그에게 인류절멸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모습에서는 작중 어떤 캐릭터들보다도 강한 감정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감시자들이 이 작품에서 가장 목표의식이 분명한, 가장 사상이 명확한, 가장 뜨거운 캐릭터들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즈의 행동원리가 명확하지 않고 작가가 고뇌와 같은 복잡한 감정선을 연출하지 못하는 탓도 크다.
작가의 대표작인 ‘바벨2세’에서도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비록 정의롭지만 그저 실용적이고 기계적인 주인공 바벨 2세보다, 사리사욕을 충족하기 위해 초능력을 악용하는 요미가 더욱 정감 있고 따듯한 인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야기에서 지독한 악역이 아름다운 비주얼 탓에 독자들에게 옹호 받고 회개하는 사례는 흔히 있으나, 용서할 요소가 전혀 없는 악당에게 이토록 감정이입 할 수 있게 그려내는 작가는 무척 드물 것이다.
사탄(데빌맨)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공룡보다 앞서 지상을 장악했던 존재들이 있었다. 데몬이라고 불리는 그 생물들은 더욱 강한 생명으로 거듭나기 위해 서로를 잡아먹고 융합하였다.
신은 진화론이 모독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들을 처분하지만, 신의 사도 사탄은 오히려 그들의 편에 서서 신과 맞선다. 그러나 사탄은 무참하게 패배하고 데몬들과 지하 깊숙이 매장되어 두꺼운 얼음 아래에 잠들게 된다.
그렇게 수억 년간 잠들어 있던 그들은 인간들이 초래한 지구온난화와 함께 각성한다. (수억 년간 수차례 간빙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무시하도록 하자.)
후오쿠 아키라라는 이름의 소년은 부모가 실종된 이후 소꿉친구의 집에 얹혀 지내는 것도 모자라 학교에서는 왕따에 시달리는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게이 친구 아스카 료에게 유혹당하여 요상한 현대 오컬트 의식을 치른 이후 인간의 마음을 지닌 악마, 데빌맨으로 탄생한다.
데빌맨은 부활하는 데몬들을 보이는 족족 때려잡지만 큰 의미가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게이 친구의 정체가 사실은 데몬의 수장이자 신을 배신한 사탄이며, 사탄은 양성이기 때문에 그는 게이가 아니었으며, 아키라를 데빌맨으로 만든 것은 무척 개인적이고 은밀한 이유 때문이었고, 어차피 데빌맨보다 사탄이 훨씬 세기 때문에 작품 자체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는, 매우 나가이 고 적이고 허무한 결론만이 남는다.
사탄은 주인공과의 끈끈한 관계와 압도적인 강함 탓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는 악역으로 남기는 하였으나, 분위기를 제외하면 좀처럼 깊은 알맹이를 찾기 힘든 캐릭터이기도 하다.
결국 데빌맨은 ‘강력한 힘을 지낸 게이 소년인 료가 연모하는 상대인 아키라가 게이가 아닌 데다 일본에선 동성혼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양성구유가 되었다가 급기야는 세상을 멸망시켰다’는 내용의, 환경보호와 게이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비뚤어진 교훈이 담긴 이야기라고 간추릴 수 있다.
시레누(데빌맨)
데빌맨을 치기 위한 자객 중 한 명이며 긍지가 강한 반인반조 형 데몬이다. 아몬 (아키라와 융합한 악마)과는 과거 인연이 있는 듯, 그가 인간에게 사역 당하는 신세를 동정하고 데빌맨을 죽이기로 한다.
그녀는 뛰어난 능력과 끈질긴 집착을 발휘하여 데빌맨을 몇 번이고 궁지에 몰아넣는다. 또 치명상을 당한 이후에도 동료 데몬 카임과 합체하여 계속해서 맹공을 쏟아부은 끝에, 데빌맨에게서 패배 선언을 받아내며 만족스런 표정으로 사망하였다.
합체한 데몬 카임의 경우, 사실은 악마왕 제논을 소환하려고 하였으나 갑툭튀한 것이 이 카임이었다. 카임이 소환된 순간 시레누의 표정에서 실망한 빛이 역력하다.
사실 원작의 활약상만 놓고 보면 카임 외에는 친구가 없었다는 것과 나름 실력 있는 데몬이라는 정도 외에는 정보가 부족하지만, 상대적으로 감정선이 살아 있는 캐릭터이기도 했고 섹시한 여성형 몬스터+여전사 기믹이 겹쳐 높은 인기를 끌면서, 데빌맨 관련 작품이 나올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는 간판 캐릭터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다만 외전 격 작품에서 캐릭터성을 주려고 시도할 때마다 오히려 평소의 날카로운 맛이 사라지는 감이 있고, 최근의 ‘데빌맨’ 관련 매체에서는 서비스신만 남발하기 때문에 올드팬들이 경악하고 있다.
칸자키 사토루(에어리어 88)
자살을 기도한 모친의 살해시도로부터 살아남은 칸자키는 고아원에 맡겨지고 그곳에서 운명의 친구인 카자마 신과 만나게 된다. 칸자키는 카자마와 함께 파일럿의 꿈을 이루지만, 실력이 우월할 뿐 아니라 항공회사 사장의 딸과 연인 관계로 발전한 카자마 신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그를 속여서 용병부대에 팔아넘긴다.
이후 그는 항공회사에서 높은 자리를 꿰차는데, 부정을 서슴지 않고 사장자리를 노리기도 하며, 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용병부대에 암살자를 보내기도 한다. 사실 그는 욕망과 열등감 탓에 스스로의 가치관을 상실한, 어느 정도 사실적인 악당… 일 뻔했다. 원작의 스케일이 산으로 가기 전에는.
칸자키는 무기상인으로 이루어진 음모 집단에 몸을 담고 정치의 배후에서 전쟁을 조작한다. 한편 제대 후 아프리카 난전에 참가한 카자마 신은 어쩌다가 대통령의 비자금을 물려받고 용병부대에 항공모함을 조달하며 무기상인들에게 대항한다(…).
그런데 사실 신과 칸자키는 일본 제일의 갑부의 후손이고 먼 친척관계이며, 칸자키는 어머니의 죽음의 원인이 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개인적인 원한을 지니고 있다는, 아침 드라마와 전쟁 영화가 섞인 전개가 이어진다.
작가가 만들어낸 억지 드라마에 매몰된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칸자키 또한 어차피 작가의 창작품. 그냥 그런 인물이다.
유우키 미치오(MW)
아역배우였던 유우키 미치오는 촬영을 위해 방문한 오키노마후네 섬에서 불량청년들에게 납치되어 산 위 동굴에 감금당한다. 가라이는 유우키를 감시하기 위해 동굴에 남지만 하룻밤이 지나도 그의 일행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산한 가라이와 유우키가 발견한 것은 청년들과 섬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시체의 산이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유우키는 중독된 듯 발작을 일으키지만 무사히 생존한다. 미군의 화학병기 MW의 유출이 초래한 참사는 어둠에 묻히고 진실은 유우키와 가라이 사이에서만 남게 된다.
이후 가라이는 수도사의 길을 걷고, 유우키는 은행원을 가장한 쾌락범죄자로 성장한다. 그는 유괴 살인으로 돈을 모으며, 가라이의 육욕과 죄책감을 자극하고 그에게 애정을 호소하며 죄에 끌어들인다. 가라이는 도덕적 괴로움에 시달리는 도중 유우키가 MW와 관계된 자들만을 죽인다는 연관성을 발견하고 그를 구원하겠다는 일념으로 그의 공범이 되어 그를 멈추기로 한다. 하지만 유우키가 원했던 것은 복수가 아니라 세계를 멸망시킬 수 있는 병기 MW 그 자체였다.
흔히 휴머니스트로 평가되는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인 MW에서 유우키가 악의 화신임을 납득하기는 어렵지 않다. 유우키 미치오는 수많은 데즈카 오사무의 악당 캐릭터들과는 다른, 악으로서의 완전성을 지닌 인물이다. 유우키는 인류의 천적도, 세계를 멸할 마왕도 아니라 인간, 즉 일반적인 감정을 전부 지닌 감성적으로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랑을 이해한다. 악은 자의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임을 감안하면, 완벽한 악은 오로지 완성된 자의식만이 구성할 수 있다. 그는 사랑을 이기지도 못하지만 절대 사라지지도 않는 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