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근의 논문 표절 이슈가 한창이다. 가방끈이 짧아 그 진실은 전문가에게 맡겨두고자 한다. 다만, 내가 여기서 느끼는 건 왜 송유근이 여기까지 왔는가이다.
송유근이 처음 화제가 된 것은 만 6세, 즉 초등학교 1학년 때 정보기능사 자격을 따면서부터이다. 부모에 따르면 구구단을 시작한지 7개월만에 미적분 계산을 했고, 초등학교 6년 과정을 3개월만에 끝냈으니 천재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부모의 말에서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장래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페인먼처럼 양자전기역학을 전공하겠다는 꿈을 지닌 송군의 가족들은 “이공계 기피 현상으로 기초과학이 외면당하고 있다”며 “이번 자격증은 장래 유근이가 전공 공부를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송유근이 영재라는 데 이견을 가지기는 힘들지만, 이 어린 나이에 이미 뭔가 ‘위대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느껴진다. 심지어 송 군의 어머니는 당시 “만 12세까지 검정고시를 볼 수 없다는 교육부의 방침에 맞서 연령 제한을 풀어 달라는 행정소송까지 냈다”며 영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사회에 대해 울분을 쏟아냈다고 한다.
왜 그 아이는 혼자만을 위한, 사회와 동떨어진 영재 교육을 받아야만 했는가? 도대체 왜?
물론 영재는 쉽게 나지 않고, 이들을 위한 교육 코스가 마련되어야 함에 이견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꼭 정규교과과정을 완전히 벗어난, 오로지 천재가 성과를 내기 위한 길이어야 하는가?
방법은 많다. 천재들에게 월반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한국에서도 만 15세, 즉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대학 진학을 확정 짓는 영재들은 존재한다. 과학고 외에 영재학교도 있다. 이곳 역시 사회와 유리된 측면이 있지만, 최소한 동년배와 어울릴 기회는 어느 정도 누리게 된다.
사람들의 능력은 모두 다르다. 대다수는 천재가 아니지만, 또 그들은 나름 사회화되어 살아간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회와 동떨어진 수월성 영재교육을 받고서, 사회화되는 게 쉬울까? 그것은 또 하나의 과제다. 또한 위대한 학문적 성과를 내는 것만큼이나 ‘영재 개인’에게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송유근의 삶을 보자.
2004년 심석초등학교 졸업
2005년 고입, 고졸 검정고시 최연소 합격
2006년 인하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자연계열 입학 (중퇴)
2009년 학점은행제도 학사 학위 취득 (컴퓨터 공학)
2009년-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천문우주과학과 석박사통합과정 재학
어떤 연구 목적이나 학습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빨리 마치는’ 것에 주력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이 8세때 정보처리기사를 딴 것으로 시작해서 최연소 합격, 최연소 학사, 최연소 박사(에서 무너졌지만)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정도면 아직 언급이 섣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단계적으로 괜찮게 공부해 나갈 수 있었던 영재를 주변의 욕심이 몰아붙여서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만든 듯하다. 마치 사회와 단절되어 기록 세우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하다.
사회도 이를 부추긴다. 10년 전, 과학기술부는 송유근이 공기정화기를 고안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중소기업 제품을 시연한 것이었다. 한 언론사는 송유근 아버지의 말을 인용해 영재교육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50년 전 또다른 영재를 떠올릴 수 있다. 바로 김웅용 교수다. 그는 송유근보다 더했다. 4살 때 IQ 210을 기록해 기네스북에 올랐고, 5살에 4개국어를 구사하고 일본 방송에서 미적분을 풀어냈다. 사실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지만,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8살 때 미국으로 떠나 연구활동을 하다 해외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국에 돌아온다. 그리고 온전하게 대학에 갈 나이에 충북대학에 입학한다.
사람들은 당시 ‘실패한 천재’라 말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 과거로 돌아가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겠습니다. 1966년에 한양대를 다니지 않고 그냥 제 나이에 맞게 초등학교를 갔더라면 이 모든 일들이 없었겠지요.”
― 자신이 신동 신화의 피해자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릴 땐 나가 놀지도 못하고 힘들었지요. 늘 혼자라 고립돼 있었고요. 지금도 이런 의혹을 받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제가 어릴 때 신동이었다는 걸 이용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어요.”
― 요즘 부모들도 영재교육에 관심이 많지요. 그걸 보면 어떤 기분이 듭니까.
“예전의 저를 보는 것 같습니다. 공부 잘하고 어려운 문제 몇 개 더 푼다고 인생이 행복해지는 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나씩 성취하면 돼요. 만족한 삶을 살려면 주변에서 도와줘야 하죠.” (조선일보 인터뷰)
― 세간의 기준으로는 아니, 왜 세계적인 천재가 서울대를 못 갔어, 실패한 천재 아니야 이런 얘기 들으셨어요. 어떠셨어요?
“그런데 실패했다라는 자체가 극히 주관적인 얘기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저는 어쨌든 굉장히 어렵고 힘들었던 곳을 빠져나와서 편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해서 왔는데 굳이 실패했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노컷뉴스 인터뷰)
― 천재 소년 송유근 군과 비교도 많이 한다.
“제발 부탁인데 나를 유근이와 결부시키지 말아 달라. 신동이라는 세상의 기대 어린 시선으로 유근이나 그 부모가 겪는 부담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 보태고 싶지 않다.” (서울신문 인터뷰)
과연 수십년 후 송유근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우리의 관심사는 그가 천재로 어떤 연구성과를 내고, 국격을 높일 수 있을지에만 집중돼 있다. 그가 동년배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지, 사회구성원들과 원활히 지낼 수 있을지, 가정을 잘 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김웅용은 지금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한다. 그는 이제서야 자신이 원하는 평범한 행복을 찾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실패한 천재’로 각인돼 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영재교육을 통해 다시는 그 실패를 낳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 난무한다. 우리 사이에 김웅용은 없었고, 지금은 송유근이 없다. 오직 한 영재가 당연하다는 듯 공공재로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